디지털 피아노, 유감

by 익호

취미생의 연습용 악기로서 그럭저럭 쓸만하다고 생각했던 내 디지털피아노에는 사실 결함이 하나 있었다. 인간이 만드는 것들 중에서 완벽한 것을 어디 쉽게 찾을 수 있겠느냐마는, 한낱 대량생산 공산품일 뿐인 이 기계에는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기에도 버거울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소음’이라는 악기에 있어서는 안 될 치명적 결함이.

어떤 도구든 의도하지 않은 소음이 야기하는 스트레스란 상상 이상인 법이고, 하물며 그 도구가 소리를 내는 데에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88개의 건반 중 단 하나만이라도 의도와 다른 소리를 내더라도 그것은 이미 악기라 불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흰건반들은 대부분 문제없지만, 검은건반 몇 군데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훨씬 전부터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난 이 문제를 줄곳 모른 척 눈감아 왔다. 초급 중에서도 걸음마 수준인 내게 검은건반을 칠 기회란 게 애초에 많지 않았기도 했거니와, 그저 우연히 한두 번 그랬겠거니, 하며 외면해 왔던 것이다. 어떤 물건이든 한 번 들이고 나면 좀처럼 반품이나 수선을 꺼려하는 내 성격도 그 모른 척에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소나티네 앨범을 시작하면서부터 도저히 참기 힘들어졌다. 검은건반을 건드리는 빈도도 확연히 늘어났고, 특히 중점적으로 연주하는 높은 4-5옥타브 사이의 검은건반들은 두 개 중 하나 꼴로 멍텅구리가 되었다. 눌렀다 뗄 때마다 발생하는 묘하게 기분 나쁜 덜커덕 소리. 헤드폰을 써도 뚫고 들어올 정도로 커다란 그 소리. 손끝을 타고 올라와 손목으로 이어지는 불쾌한 진동은 덤이다.


문제의 원인을 이리저리 궁리해 보다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건반 저 끝쪽 결합부의 윤활액이 소모되었을 때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원인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디지털피아노를 위한 산업용 구리스, 그것도 특정 회사에서 발주한 한정된 모델 전용 제품을 개인이 소량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국내 총판인 코스모스악기사라면 유지보수용 여분을 제조사로부터 제공받아 갖추고 있을까도 싶었지만, 요전에 중간 A음의 튀어나오는 소리 문제로 출장을 의뢰했다가 아무 문제없음 판정을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또다시 AS를 부른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바로 자가 수리.


플라스틱 제품용 윤활제를 인터넷에서 닥치는 대로 검색해 주문했다. 그것들은 모두 내 피아노에 적용된 분홍빛 몰리브덴 구리스와는 색깔도 점도도(그리고 아마 성분 구성도) 다른 것들이지만, 덜그럭거리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 쓰는 데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후로 몇 주동 안은 속된 말로 ‘뻘짓’의 연속극이 이어진다. 겉으론 공교한 듯하나 실상은 조잡하게 조립된 이 전자 악기를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하고. 그 순환의 과정을 적어도 열 번은 반복하는 정신 나간 일인극 말이다. 손에는 싸구려 수동 드라이버 하나를 쥐고서.


처음 뚜껑을 열었을 때는 눈에 보이는 부분에만 윤활제를 짜 넣는 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실제로 문제의 검은건반들에서 윤활액이 많이 새어 나가 있었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첫 번째 시도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는가 했지만, 성취감에 취할 새도 없이 몇 번의 연주만에 소음 문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더욱 심해진 것 같다. 하릴없이 재차 피아노 뚜껑을 연다. 드라이버 한 개로 수십 개의 나사를 반복해서 돌리다 보니 손아귀가 빠지게 아파온다. 이번에는 조심스레 건반부를 통째로 떼어 내 윤활제를 발라 본다. 재조립 전에는 미리 신중하게 건반 터치를 체크했지만, 구조상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 어쩔 수 없이 생긴다. 그러나 이미 땀 범벅에 지친 나는 포기하고 뚜껑을 닫는다. 시범 연주. 전보다 나아진 듯하지만 이번에는 터치감이 어째 쩍, 쩍, 둔하다. 설상가상 며칠 뒤에 소음 이슈는 어김없이 재현되고. 오기가 생긴 나는 아예 주말 하루를 통째로 빼 모든 건반을 하나하나 분해해 본다. 기존의 분홍색 윤활제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말리고, 새로운 윤활제를 정성 들여 채워 넣는다. 완벽하게 재조립한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광기에 가까운 해체와 조립 퍼포먼스를 거듭한 내 방은 어느새 공장에서나 날 법한 화공약품 냄새로 가득 찼고, 놀랍게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처음보다 더 심해졌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건반 문제는 제쳐놓고, 잦은 해체와 재조립으로 인해 외장부터가 10년은 더 낡은 듯하다.


처음부터 설계가 잘못된 거야.

내가 내린 결론합리화이다. 똑같은 건반을 탑재한 모델들의 국내외 리뷰를 살펴보았다.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문제점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건반은 태생적으로 덜그럭거리는 결함이 어느 순간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제조사는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판매한 것이다. 메이저급 회사에서 개발되어 벌써 수십 년 넘게 인기 모델들에 탑재되어 온 건반인 데다가, 터치감이 좋다고 극찬까지 받는 물건인데. 어이가 없다. 이런 일이 통용되어서 되는가? 이 건반이 클래식 피아노처럼 잦은 다이내믹 변화와 지속음, 스타카토 등 변화무쌍한 아티큘레이션을 위한 연주에 적합하게 설계된 모델은 아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함은 결함 아닌가. 수십 년 동안 문제 있는 제품을 판매해 오면서 그 누구도 문제점을 고발하지 않은 걸까? 혹은 이 정도 수준의 결함은, 그리고 그 클레임은 ‘적절한’ 조치로 덮을 수 있을 만큼 디지털 피아노 시장이란 게 좁고 마이너한 곳인가?


디지털 악기에 대해 막연한 신뢰와 애정을 품고 있던 내가 권태기의 연인 보듯 시들해지기 시작한 게 바로 이때쯤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심경의 변화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슬슬 진짜 피아노를 경험해 보는 게 좋겠다는 지인의 권유도 있고 해서 나는 연습실을 한 번 빌려보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지인에게 레슨도 받아볼 겸.

진짜 피아노. 어떤 느낌이었지? 마지막으로 만져 본 건 고등학교 음악실에서, 혹은 그즈음 다니던 동네 교회에서였겠지. 그런데 그 목재 악기의 음색도, 울림도, 건반의 느낌도 무엇하나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디지털 피아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리라는 것 정도야 예상할 수 있지만, 그 다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힌다. 이렇게나 쉽게 잊힐 수도 있는 것이구나. 다시 만져 본다면 그제야 떠오르려나.


디지털 피아노는 가성비의 유혹과 상술한 이유 등으로 인해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첫 레슨을 통한 진짜 피아노와의 재회에서는 되도록 좋은 첫인상부터 만들고 싶다.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를 아마추어 취미생에게 빌려주는 스튜디오는 찾기 힘들었지만, 보통 사이즈의 그랜드피아노가 비치된 연습실은 여럿 후보가 있었다.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첫 레슨을 받기로. 가져갈 곡이야 대단할 것이 없지만, 일단 연습 중인 소나티네 한 곡으로 충분할 것 같다.


날짜는 정해졌고, 연습에 매진하는 중이다. 늘 느끼지만, 인간은 구속된 상황에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인 듯하다. 마감 날짜가 정해진 이후로는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집중력이 솟아나고 있다. 연주회도 발표회도 아닌 가벼운 레슨일 뿐이지만, 곡을 갈고닦아 타인 앞에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적당한 압박감과 의욕을 동시에 부여함을 느낀다.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나와 같은 사람들도 가끔씩 남 앞에서 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좋은 자극이 될 듯하다.

또 한 가지 신기한 건, 레슨이 임박한 지금 건반 소음이 아주 거슬리지는 않게 됐다는 점. 당장 연습할 악기가 이것뿐인데 소음이 다 무슨 문제랴. 그저 소리만 잘 나도 감지덕지.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하고자 한다면 종이 건반 위에서라도 연습이 술술 잘 될 것만도 같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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