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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세 Dec 17. 2022

사랑하기 힘든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한평생을 피해의식에 갇혀 사셨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이해한다. 아마 내가 그러하듯이 어머니도 진보적인 성향을 타고나셨고, 당시 시골에서 나름 고학력이었던 고졸이라는 점과 진보적 성향이 합쳐지면서 -내가 어렸을 때 그러했듯이- 어른들을 비판적으로 보게 됐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책임지기 위해서 확신이 필요했으리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 그 확신이 힘이 되어 어머님은 보수적인 시골 사회에서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셨고 두 아들들을 무사히 키워낼 수 있었다. 나는 자식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이 세상을 떠났을 거라는 어머님의 말이 진실인 것을 안다. 나는 어머니가 위대한 사랑의 표본임을 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 이유는 어머님이 이 세상을 살아온, 그 모든 역경을 견뎌낸 힘이 바로 증오와 멸시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자살을 생각해봤을 정도로 억울한 아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2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보수적인 어른들의 입장, 그동안 나를 공격했던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나 역시 그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나의 에너지를 나를 위해 쓸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게 됐고, 더 의미 있는 날들을 보내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억울함에 갇혀있는 어머니를 사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나의 피해의식 극복과정이 나의 정체성과 자존감 형성에 막대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을 사랑하는 내 자신을 사랑한다.


 어머님이 억울함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듯이, 나 역시 세상을 긍정하는 나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다. 나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내가 증오하는 모습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있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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