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래몽상가 Aug 18. 2024

힐빌리의 노래

 얼마 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동료가 직장 내 독서 동아리 가입을 의했. 순간 망설였다. 망설이는 나 자신을 보고 실망도 했다. 책을 엄청 많이 읽지는 않지만, 독서를 하며 사색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독서 동아리 가입 제의를 받았을 때 흔쾌히 수락했어야 했다. 왜 망설였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동아리에서 2주 단위로 정해주는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눈다는 설렘에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에 서로 나누기로 한 이야기는 '힐빌리의 노래'이다. 최근 트럼프 대선 후보와 함께 자주 거론되고 있는 J.D. 밴스의 자서전이다. 2016년에 쓴 책이지만, 트럼프가 밴스를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더 주목받게 되었다. 트럼프는 미국 백인 중산층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트럼프가 재선에 도전하면서 J.D. 밴스를 지명한 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 당선이라는 목적을 위해 J.D. 밴스와 같은 배경을 지난 인물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저자인 밴스가 지금까지 잘 성장한 것처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로 계속 남아있기를 바란다.   





<힐빌리의 노래> 저자  J.D. 밴스

 자서전과 같은 종류의 책은 거의 읽었던 적이 없다. 기껏해야 역사적 인물의 평전 몇 권 정도가 전부다. 가장 최근에 '세종평전'이 생각나고, '마키아벨리 평전' 정도가 떠오른다. 이미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고, 후대의 다양한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자서전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꽤 젊은 나이의 작가이면서 나와 비슷한 시대를 걸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근 언론에 조명을 많이 받고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독서 동아리에 초대해 준 동료와 허락해 준 동아리 회장님께 감사드린다.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수많은 상념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고, 짧은 문장들로 책 속 어딘가에 기록해 두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흔적들 위주로 느낀점을 소개해볼까 한다.

 가장 먼저 어느 페이지에 적어둔 문구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다" 나이지리아의 속담이었다. 저자는 어릴 적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아이들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는 부모들, 학업을 이어가야 할 만한 동기부여가 적은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거칠게 자랐던 것 같다. 가난의 대물림이 학습된 무기력으로 전염되어 버린 환경에서 그 동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품는 게 사치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저자처럼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청년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은 아이들을 탓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어른들의 무관심과 무능력만이 문제였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회 공동체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성을 잃은 채 방치되었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누구도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걱정하며,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인간은 환경을 만들지만 결국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아이 한 명 한 명을 소중한 존재로 대해줘야 올바른 성장 환경이 만들어진다. 조정래 선생님의 '풀꽃도 꽃이다'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이들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나이지리아 속담처럼 아이 한 명을 제대로 성장시키려면 온 동네 사람들의 진심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 부모, 학교, 지방단체, 교사 등 모두가 한 사회의 책임 있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아이의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아주 오래전 내 딸들이 다니던 여주의 작은 시골학교가 곧 폐교가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우리 딸들은 초등학생이었는데,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 학년에 우리 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우쭐대지도 않았다. 그저 전교생과 함께 자연을 벗 삼아 같이 있는 것 자체를 즐거워했다. 학교 가는 게 가장 재밌다고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폐교 소식이 들려오던 그때 마침 여주와 양평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 내가 근무하던 부대를 방문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을 받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나 홀로 과감히 손을 들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쏟아졌다. 그 학년에 전교생이 우리 딸들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하니 모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곧 폐교가 된다는 소식에 힘 있는 의원님께 강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 마이크를 잡았다고 말했다. 나의 부탁은 간단했다. 동네에 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단 한 명뿐이라도 그 아이를 위한 학교가 없어지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는 나이지리아 속담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미 내 가슴에는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속담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약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아이들은 그 학교를 졸업했고, 안타깝게도 나의 간절했던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올해부터 학생을 안 뽑기로 했고, 지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졸업하면 폐교를 한다고 한다. 초저출산 사회에서 시골 동네에 아이가 한 명 태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학교 및 지자체 관계자들, 동네 어르신들과 부모, 필요하면 국가가 나서서 1인 1 학교를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줬으면 좋겠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골 작은 학교의 풍경
모든 활동은 전교생과 학부모들이 함께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분교의 전교생




 두 번째는 '평온을 위한 기도(Serenity Prayer)'의 한 구절이다. 저자의 할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 저자의 엄마가 방황을 견디지 못해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힘겨운 날을 보냈다고 한다. 다행히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서 나름 아버지가 없는 공허한 빈자리를 마약이 아닌 받아들임으로 치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저자의 엄마가 자주 들고 다니던 기도문이 소개되는데, 얼마 전 김혜남 선생님의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에서도 깊은 울림을 받았던 구절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김혜남 선생님의 책에서 <평온을 위한 기도문>이 소개된 이유는, 선생님의 친언니가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무척 힘들었고, 무엇보다 본인이 알츠하이머라는 현실을 인정하기가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나니 이제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고, 그런 심정을 아주 축약적으로 표현한 기도문으로 <평온을 위한 기도문>을 소개하고 있다.


 세 번째는 '나의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는? ?'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문뜩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의 할아버지를 먼저 떠올리는 게 정상이지만, 너무 어릴 적 돌아가셔서 나에겐 할아버지의 기억이 없다. 러나, 우리 아이들의 가슴에는 나의 아버지가 할아버지로 존재하고 있다. 직장 특성상 자주 이사를 해야 하다 보니 안정감 있게 아이들을 키우고자 우리 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지냈다. 나보다 할아버지랑 지낸 시간이 더 많고 추억도 많다.


 딸들이 어릴 적에는 나를 부를 때 '할아버지... 아니 아빠...'라고 했던 적이 자주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우리 딸들을 키워주셨다. 단 한 번도 나와 아내에게 손녀 키우는 게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으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비록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가슴 깊숙한 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 딸들이 부탁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든든한 안식처이자 힘들 때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분들이다.


 손녀에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이지만, 나에게는 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다. 저자를 언제나 지지해 줬고, 저자 또한 정서적으로 의존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접하는 순간, 내 딸들이 생각났다. 언젠가 우리 딸들도 할아버지랑 이별할 날이 올 거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불거지는 눈시울로  '나의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는? 나는?'이라는 모호한 질문을 남기고 책을 덮었다. 


 <힐빌리의 노래>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검색해 보았다. 미국 백인 사회의 불평등한 모순을 지적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솔직히, 나는 별로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이 책이 임팩트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장애물이 도처에 깔려 있는 인생이라는 힘겨운 여정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버팀목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화목한 가정, 교육환경, 경제적 여유, 심리적 안정감 등 다양할 것이다. 그 무엇이 되었던 이 사회의 불평등은 결국 사회적 공감의 반경을 넓히는 만큼에 반비례하여 작아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 다시 맨 앞장으로 넘어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힐빌리의 노래는 절박한 노래다. 우리 사회, 내 주변에도 가난과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줘야 한다. 마치 내가 그들과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작가의 이전글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