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을 벗은 지 벌써 반년. 정글북이라는 독서 모임도 어느새 여섯 번이나 함께했다. 일곱 번째 모임을 기다리던 어느 날, 집으로 작은 택배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독서 모임을 만드신 분이었다. 알고 보니 회원 각자의 독서 취향과 개인의 성향에 어울릴만한 책을 한 권씩 선물한 것이었다.
고마움이 앞섰지만, 곧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아직 누구에게 책을 선물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받기만 했던 내가 스스로 작아졌다.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잠시 덮었다. 선물 받은 책을 먼저 읽어야, 이 작은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아서였다. 감사함, 부끄러움, 미안함이 뒤섞인 채로 마주한 책, 박훈 교수님의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였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시기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박훈 교수는 일본 근대사를 연구하신 분이다. 일본 근대사를 시간순으로 단순히 나열하며 설명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눈으로 일본의 변화를 깊이 들여다본다. 감정을 절제하고 성찰하고 통찰한다. 이 책이 내게 더욱 특별한 이유이다. 선물 주신 분과 깊은 대화를 자주 하지 못했다. 근데, 이 책은 나의 독서 취향과 역사인식에 꼭 들어맞았다. 한 번을 만나도 다 만날 수 있을 만큼 진솔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의 독서 취향을 짧은 만남으로도 정확히 짚어내신 안목에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문뜩, 문소영 작가의 '조선의 못난 개항'이 떠올랐다. 문소영 작가는 조선의 근대화가 일본보다 늦어진 요인을 조선 내부에서 찾았다. 개혁을 추진할 정책 기획과 실행능력의 부족, 성리학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사상적 편견, 인재등용과 관리의 실패를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막부 말기 메이지 유신부터 전후 일본의 현대사까지 중요한 사건과 영향력 있던 인물들을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읽다 보면 일본 역사를 공부한다기보다 그 시절 동아시아의 거친 숨결이 느껴진다. 같은 사건을 보고 거친 숨을 내쉬는 두 개의 다른 눈을 보게 된다.
#. 같은 사건을 보는 두 개의 다른 눈.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하고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홍콩은 영국에 넘어갔고, 광저우를 비롯한 5개 항구의 문이 열렸다. 2,100만 달러의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외세에 굴복해 개항한 동아시아 최초의 조약이었다. 전통적 중화 질서가 무너지는 신호탄이었다. 중국 중심의 조공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서양 세력은 일본, 조선, 베트남 등으로 시선을 넓혀갔다.
조선은 북경 주재 사신을 통해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단편적 정보만을 받았다.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난징조약 전문은 물론, 서양의 무기와 군함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입수했다. 조선은 지리적으로 안전하다는 안이한 인식이 강했다. 서양 선박이 출몰하면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으로 버텼다. 반면 일본은 서양의 군사력을 직시하고 위기로 받아들여 대응책을 찾았다. 다음 차례가 일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편전쟁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며 해군력과 근대 군사 기술 도입 필요성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위기를 직시한 일본과 외면한 조선, 두 개의 다른 눈이 있었다.
#. 근대 해군 교육의 설계자 - 아베 마사히로(1819~1857). 난 육군이었지만, 지정학을 공부하면서 대한민국은 해군력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아베 마사히로는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끈 함대가 내항하기 전부터 나가사키에 해군전습소 설립을 준비했다. 1855년 일본 최초의 근대적 해군 교육기관을 만들고, 인재를 길러내고, 서양식 군함 건조를 추진했다. 비록 짧은 삶을 살았지만, 일본 근대 해군 교육의 초석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베 마사히로가 죽자 훗타 마사요시가 뒤를 잇는다. 그는 미국과의 통상조약 칙허를 받기 위해 천황을 찾아갔다. 당시 천황은 상징적 존재일 뿐, 조정의 건의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가까웠다. 그러나 고메이 천황은 훗타의 요청을 거절한다. 재위 12년째를 맞은 27세 청년 군주의 거절은 막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루아침에 나온 즉흥적인 결단이 아니었다. 천황의 꾸준한 학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치 조선시대 경연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은 일본보다 훨씬 먼저 군주를 지독하게 교육시키는 제도가 있었지만, 정작 근대적 위기 앞에서 그 제도가 제 역할을 다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조선에는 누가 있었는가? 있었지만,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개인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제도의 벽 때문이었을까? 혹은 애초에 그런 인물이 등장할 수 없는 사회 구조 때문이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비교로 일본을 미화하고자 하는 게 절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미래를 위해 어떤 리더십과 인재양성 제도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함이다.
#. 유연한 전환 - 사카모토 료마(1836~1867).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 유신의 상징적 인물이다. 미국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일본을 개항시키고자 나타났던 1854년 그는 에도에 있었다. 서양에 일본의 문호 개방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곧 서양 학문을 배우고 수용하는 길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 과정은 놀라울 만큼 경쾌하고 유연했다. 조선의 근대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전환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맺은 '삿초동맹'을 중재하며 일본 근대 정치사의 흐름을 바꾸는 입지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삿초동맹'은 막부 타도를 위해 오랜 라이벌 관계였던 두 유력 번(조슈번 - 사쓰마번)이 1866년 손을 잡은 사건이다. 일본 근대화의 정치적 전환점이자,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한 실질적 동력이었다.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 조슈번은 일본 육군의 주축이 된다.
물론 삿초동맹 자체가 이상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동맹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정부 수립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로 흐를 수 있는 정치적 힘의 재편 과정이기도 했다. 라이벌 관계의 두 세력 간 합목적적 연합 그 자체 보다, 앞뒤를 모두 살펴보는 균형이 필요하다. 일본 근대화를 미화하는 서사적 사건으로 보기 보다, 당시 일본 사회가 보여준 유연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과연 근대화의 과정에서 어떤 유연함을 보였는가? 상황을 직시하고, 유연하지만 단호한 전환을 시도한 인물이 있었는가? 사실 조선에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같은 개화파 인물들이 있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 전환을 시도한 인물들이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갑신정변(1884)으로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3일 만에 무너졌다. 청의 개입과 조선 내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 때문이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의회 정치를 시도했지만, 곧 해산당했다. 개인의 의지와 비전은 있었지만,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원대한 비전을 수용할 토양이 부족했다.
#. 사상의 불씨 - 요시다 쇼인(1830~1859). 메이지 유신의 또 다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요시다 쇼인을 만나게 된다. 흥선대원군보다 10살이 어리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메이지 유신 주역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였다. 요시다는 조슈번에서 쇼카손주쿠를 열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처한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바라봤다. 단순한 성리학적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서양의 군사력과 기술을 학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전통을 지키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이후 일본 근대화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었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사상의 불씨는 제자들의 실천으로 이어졌고, 결국 메이지 유신의 거대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조선에도 개혁을 꿈꾸고 이끈 사상가와 정치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내부에서 묵살되거나 배척당했다. 제도의 장벽과 보수적 기득권의 압력이 개화파의 이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없게 만든 것이다.
#. 바다 건너 불길한 메아리 - 류큐 왕국의 병합(1879). 1879년 일본은 류큐 왕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영토 확장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류큐 왕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개 무역을 하며 독자적 문화를 이어왔다. 류큐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는 이중적 외교 구조를 유지해 왔다. 일본은 이를 종식시키고 류큐를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시켰다. 청나라와의 외교적 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 이 작은 왕국의 종말은, 동아시아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이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바다 건너에서 들려온 불길한 메아리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과연 류큐 왕국의 병합을 위기로 인식했을까?
류큐 왕국은 근대 일본이 팽창의 길로 가는 역사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과 통리기무아문 설치 등 내부적으로 불안전했다. 성리학 중심의 경직된 사상과 보수적 기득권 세력이 너무 강했다. 반면 개혁 세력은 소수였고 힘이 약했다. 사상적 한계와 기득권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국제 질서의 급격한 변화를 온전히 읽어내지 못했다.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그 대가는 뼈아팠다.
류큐 병합은 일본의 근대화가 단순한 제도 개혁을 넘어 대외 팽창과 제국주의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수령이었다. 류큐 병합 이후 일본은 홋카이도의 아이누 지역을 병합하고, 대만과 조선, 사할린까지 세력을 넓혀가며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해 갔다.
#. 전후 일본의 선택 - 요시다 독트린. 2차 세계대전이 패전 후, 일본은 폐허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경제 재건에만 집중하고 안보는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를 '요시다 독트린'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가 한미동맹을 통해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박정희 정부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경제 성장에 집중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요시다 독트린과 유사한 성격을 보였다.
요시다 시게루가 일본의 전후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음은 틀림없다. 다만, 안보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한 점은 일본 스스로의 자율적 선택 공간을 줄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로 인해 과거사 성찰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비판도 있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는 미국의 푸들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선택은 적중했다. 전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고 1980년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전후 일본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양날의 검이 되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가파른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지만, 미국 의존적 안보구조가 고착회되어 주도권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경제 성장에 집중하면서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책임이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과거사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 비난보다 성찰, 탄식보다 통찰
이 책은 역사를 "비난보다 성찰, 탄식보다 통찰"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 책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만행은 역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세월이 흘러도 용서해서는 안 되는 비극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맹목적인 비난을 넘어 통찰이 필요한 시대가 찾아왔다. 결코 일본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성숙한 태도가 이제 필요하다는 뜻이다.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했고, 일본은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의 성공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위기 속에서 내린 결단과 그 이후의 시행착오를 역사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역사 인식도 깊고 넓어질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면 선조들의 결정은 언제나 한심해 보인다. '그때 왜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라는 탄식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했다.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과 K-문화를 자랑하는 선진국 대한민국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를 극복한 대한민국이다. 분단이라는 현재 진행형 아픔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대한민국이다. 이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선진화되어야 한다.
일본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근대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근대화의 동력을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이어가는 과오를 범했다. 2025년은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과거를 성찰해 보고, 지금을 통찰해 보고, 미래를 향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바로 그것이 2025년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