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여덟 번째 시간
상담을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됐다. 이성과의 관계에서 극복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 시작한 개인 상담이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구멍이 나기 직전이었다. 꾸준히 상담 내용을 기록하고 이렇게 브런치에 적어 내려가는 일이 도움이 많이 됐다. 상담을 통해 마음의 구멍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만큼이나 이미 생긴 구멍을 메우고 다시 마음을 채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조금씩 나를 알아가고 있다. 나를 모른 채로 상대를 알고 싶지 않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상대를 이해한다고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지난 시간에는 빙고게임에서 나는 나를 표현하는 키워드로 여러 가지를 적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앞 글에서 다뤘기 때문에 '해맑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키워드 : 해맑음
언제부터 해맑았던 것 같은지 질문을 받았다. 나는 사람 간에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를 견지디 못한다. 참을 수 없이 싫은 건 아닌데, 뭔가 불편하고 그 정적을 조금은 깨뜨려 분위기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게 해맑은 것과 상관이 있는진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생님에게 어느새 말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해맑게 웃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초등학교 1학년과 4학년 즈음 사진을 보면 내 표정이 그리 밝진 않다. 1학년 때는 단체 사진인데 혼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양 손으로 턱을 괴고 있고, 4학년 사진은 찡그린 사진이 많다. 어두운 분위기가 스멀스멀 풍긴다.
하지만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좀 밝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5살 때 만난 친구들과 쉬는 시간만 되면 매점에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지러지게 웃고, 수학 시간에 뭐가 그리 웃기는지 끅끅 거리며 웃다 교실 뒤로 나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 시절 만난 친구들, 성인이 되고 여행하며 알게 된 사람들, 곁을 스쳐간 많은 사람들 덕분에 천천히 나는 해맑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 찬찬히 대답했다. 선생님은 사진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그 당시 상황마다 다 다르기도 한데 잘 생각해내었다고 말하셨다. 그리고 내 미소가 무척 자연스럽다고 했다. 처음 얼굴을 봤을 때 밝은 사람인 것 같아 놀랐다는 말까지 했다. 내가 잘 웃는 편이긴 한데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키워드 얘기를 토대로 가장 극복하고 싶은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선생님은 상대에게 얼마큼의 기대 수준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대감이 생기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적당히 눈치채서 알아줬으면 하는 게 연인 관계예요."
그러면서 선생님은 내가 생각하는 남편과 아내는 어때야 하는지 질문했다. 나는 남편이 책임감 있게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아내에게 져주는 가정이 화목하게 잘 사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우리 집을 봤을 때 '어머니'들이 너무나 힘들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대답을 들으면 '뭐 저런 편협한 생각이 다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선생님은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요. 둥둥 씨가 그렇게 대답하니까 꼭 둥둥 씨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어요. 둥둥 씨가 생각하는 것들은 직접 겪은 가정환경과 주변 친구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생긴 결혼에 대한 생각, 가정에 대한 이상이기 때문이에요. 원가족의 영향이 절대적이진 않겠지만 여러 연구결과를 보면 원가족 환경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가족에게 있었던 일들로 인해 남편이 아내에게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 경험에 의해 형성된 고정관념(?) 이상(?)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빠에 대한 생각 때문에 연인에게 거는 기대도 많았던 걸까.
"상대에게 기대하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다만 내가 상대에게 얼마큼 기대를 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좋아요. 상대방에게 기대했던 것들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 그런 경험이 쌓여서 더 서운하게 되고 속상해졌을 거예요. 그러니 '나는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걸 알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연인에게 내가 기대하는 것이 뭔지는 사실 알고 있다. 나를 품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기대어 쉴 수 있게 든든하면서 때로는 내가 상대에게 든든해질 수 있는 사람. 불안하지 않게 하는 사람. 웃음 코드가 잘 맞는 사람.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보는 사람. 물질 소비가 아니라 경험 소비를 좋아하는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
사실상 모든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중요시하는 상대방에 대한 기준을 잘 알고 있으면 그런 대상을 만났을 때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가진 이상이 무엇이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연인을 대했었는지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라보게는 되긴 했는데, 실제 내가 이런저런 것을 얼마큼 기대하는지를 알고 있으면 정말로 실망을 덜 하게 되는지, 상처를 덜 받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은 잘 와 닿지가 않는다.
오늘 H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언니는 혼자 여기서 지내면 안 심심해요? 저는 혼자 있으면 너무 심심해요. 혼자 잘 못 있는 편이라.."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외롭다. 나도 사람이니까. 집에 돌아오면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나를 반겨주면 좋겠어서 한 달에 꼭 한 두 번씩은 반려동물 입양을 고민했다(한번 아픈 고양이 임보를 맡았던 이후 마음이 아파서 그런 생각을 안 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남자 친구를 만나도 모든 이들이 떠나고 남은 그 자리가 한 번씩 너무 공허할 때가 있다. 좀 전까지 가득했던 사람 냄새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들면 갑자기 시계도 없는 내 자취방에 우울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간다.
외로움에 대해 잠시 언급한 이유는 하나다. 내 안의 그것(외로움)이 내가 품은 기대의 출발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 처럼 나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품어주는', 불안하지 않게 하는'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지나친 기대이거나 욕심이 아닐까. 나의 마음 저변에 깔린 외로움과 결핍을 연인에게서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안전 기지가 필요한 게 아닐까. 내가 늘 갈구했던 사랑을 그렇게 상대에게 바라는 건 서로 힘들어지는 지름일텐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그래서 결국 내가 극복하고 싶은 건 애정결핍? 외로움? 도대체 뭐지. 과연 내가 극복할 수 있는 걸까. 글을 적으며 머릿속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했는데 좀처럼 되지 않는다. 내가 상대에게 가지는 기대가 뭔지 알았고 그 기준이 얼마나 크고 작은 지를 알았다면 이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상담의 효과가 바로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걸 알면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또다시 움직이고, 열심히 생각해서 답을 찾아나갈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바란다. 다음 시간에는 복잡한 내 생각에 대해 질문 하려한다. 머리로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뭔지, 상대에게 어떤 가치를 보는지를 알겠고 이해가 되는데 실제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연습이 필요한지 질문해봐야겠다. 건강한 마음을 만들려고 하는 상담인데 물음표를 달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