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르게이 Jan 16. 2018

새로운 환경, 다른 사람, 다른 시간

세르게이 연재일기_산티아고

D+16

268.7km

373,592 STEP

< Villadangos del Paramo>


다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몸에 배드 버그(빈대)가 물렸다. 약 3일 전부터 가려웠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배드 버그 자국이 맞다. 모기 물린 것과 비슷하지만, 둥글게 10원짜리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동산처럼 빨갛게 부었다면 아마 배드 버그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린 자국이 줄을 잊거나 연달아 있다면 거의 확실하다.


베드 버그가 물리면 다들 죽는 줄 아는데 그 반응이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나에게 배드 버그는 모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튼 난 이 벌레 놈이 내 침낭이나 가방에 서식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짐 검사를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내 침낭과 내 짐은 분명히 아니다. 전에 숙소에 있을 때 옷장에 들어있던 담요를 그냥 덮고 잤는데, 그곳에서 물린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내 짐에 벌레가 옮겨 온 것 같지는 않다.


밤에는 너무 추워 덜덜 떨면서 잤다. 배드 버그가 있더라도 얼어 죽을게 확실했다. 그나마 술기운이 없었으면 거의 선잠을 잤을지 모른다. 아침에 몸이 얼어, 얼은 몸과 텐트를 살짝 햇빛에 데치고 걷기를 출발했다. 몇 년 전에 하루 만보 걷기 운동처럼 유행했던 만보기가 떠올랐다.


매일 하는 일이 걷는 것뿐이다 보니, 하루 10000보는 아무것도 아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딱 그만큼만 걷고 보이는 마을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레네와 그녀의 일당들을 찾아야 했지만, 이미 그건 힘든 일인 것 같다. 이미 어제 20km를 걸었을 것이고 오늘이면 아마 그 이상 지나있을지 모른다. 그녀와 EcoVillige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직 어떤 것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녀는 그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히피나 집시들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인데,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 중에 극히 일부가 정보를 알고 그곳에 가 하루 이틀을 함께 지낸다고 했다.


검색해보니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EcoVillige가 하나 있었다. 혼자서라도 그곳에 갈 생각이다.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기 위해 펍에 왔다. 펍에서는 1.4유로에 맥주 한잔과 안주를 줬다. 기본 안주는 6가지 중에 선택이었는데, 그중에 눈길을 끈 놈은 감자 마요 볶음과 치킨 윙이었다. 치킨 윙은 한 조각 밖에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감자 마요 볶음을 선택했다.


한끼 식사급으로 감자볶음이 나왔다. 그 감동에 이어 맥주를 한잔 더 시키고 치킨 윙을 선택했다. 3조각+ 감자 마요 서비스까지 받아 순식간에 해치우고 마지막 한잔을 더 시켰다.


총 3잔의 맥주를 마시고 배가 차니 그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다모였는지 열댓 명 노인들이 카드 게임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저들끼리 싸운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거의 숫자뿐인데, 40이 어쩌고 30이 어쩌고 아무튼 그 풍경에 묻혀 조용히 밀린 글을 적었다.


내 삶에는 확실히 여유가 필요했었다. 다시 말해 어릴 때 참 바쁘게 지냈다. 지금도 어리지만, 20대 초중반 그 어린 내가 어떻게 그렇게나 바쁘게 살았는지. 지독하고 안타깝고 슬프다. 한국 사회에 대해 바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같지만, 결국 문제는 행동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 가장 큰 요인은 경쟁심이 강한 사회라는 것과 자립심이 강하지 못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가 정해준 틀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고, 자기의 원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주로 타협점을 찾기 때문에 가차 없는 사회에 계속 조금씩 조금씩 맞추어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회는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코앞까지 다가와 압박을 가하곤 한다.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지만, 본인이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거나, 그런 사회에 푹 길들어져 버린 후일지 모른다.


여행은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평소와는 다른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잊고있던, 또는 모르고 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삶의 어떠한 시기에 잠깐 여유를 가지는 것은 참 중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기름과 물은 섞일 수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