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연재일기_산티아고
D+ 15
< Valverde de la virgen>
259.6 km
361,872 STEPs
여행의 묘미는 혼자라는 것이고, 여행에서 깨닫는 것 중 하나는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젯밤 ‘이레네’를 잃어버리고, 다른 친구들과 밤을 보냈다. 대도시 레온에는 운 좋게 토요일에 도착했고, 게다가 축제가 있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갖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거리를 칠했다.
우리는 어젯밤 약 12시 30분까지 술을 마시고 놀았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든 동행들이 숙소에 들어갔고, 다른 숙소에 묵고 있던 나는 따로 숙소로 향했다. 내가 가야 할 숙소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다.
새벽 1시.
그렇다고 대학생 때처럼 “기숙사 문 닫혔다. 먹고 죽자!” 함께 밤을 새우자고 할 수 도 없는 일. 혼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채로 길거리에 외톨이가 됐다.
얼마 전 만났던 78세 남아공 할머니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기름과 물은 섞일 수 없다. 하지만 그 둘도 믹서기에 넣고 잘 섞으면 결국 섞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지구에는 섞일 수 없는 것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바다와 산. 바람과 나무. 개와 고양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 버린 동행들과 나. 등등. 우리는 섞일 수 없었다.
우주는 끝없이 넓고 그 우주에서 인류는 아직까지 또 다른 인류가 사는 지구와 같은 별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가 별로 없다는 것은 지구는 생각보다 잘 섞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되어도 살아날 구멍은 있고, 어찌 되어도 이래저래 세상은 돌아간다.
일행들이 있던 숙소 앞으로 갔다. 그들은 몰래 들어와서 자고 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그것을 바랐을 리 없다.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살아날 구멍을 찾았다.
그들 중 하나에게 텐트와 침낭을 빌렸다. 이 정도면 섞일 수 없던 우리도 그럭 잘 섞였다고 합리화하며, 홀로 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새벽 1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대도시이다 보니 텐트를 칠 곳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축제인 덕에 길에는 취해서 비틀대는 사람도 많았고 이유 없이 무서워 보이는 10대들이 어슬렁 거렸다. 나는 중심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15분 정도를 외각 쪽으로 걸었다.
한동안 걸어 작은 강가 옆 어둑한 풀밭을 발견했다. 풀들이 축축이 젖어 있었고, 한기가 은은하게 풀 위를 맴돌고 있었다. 텐트를 치고 누웠다. 발이 시리고 침낭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가 추위에 지끈거렸다.
이 정도면 잘 섞였다.
자다가 눈을 뜬 건 3시 16분, 3시 28분, 3시 55분, 4시 5분, … 5시 02분. 그리고 시계를 보지 않은 4,5번 정도 더.
추위에 오그라든 등과 축축한 잔디 사이에는 얇은 탠트와 솜 침낭이 전부였다.
5시 33분에 침낭에서 나왔다. 추위에 굳은 몸을 펴고 새벽 공기를 마셨다. 그러고는 한동안 서서 생각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지금 이 모습도 아름답다.’ 처량한 신세 한탄과 함께 텐트를 접었다.
빌려온 텐트라 게는 방법도 쉽지 않았고, 최대한 이쁜 모양으로 게기 위해 두세 번 접어다 폈다를 반복했다.
숙소를 가는길 문이 열려있기를 기도했다. 6시면 숙소 문이 열리겠지.
숙소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물과 기름 이야기를 해주었던 남아공 할머니가 보였다. 그녀의 팔에는 내가 직접 만들어 준 팔찌가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포옹을 했지만, 처음에 할머니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름을 묻고 얼굴을 뜯어보시더니, 팔에 찬 팔찌를 가리키며 얼굴에 보기 좋은 주름을 꽉 채웠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는 이레네의 법칙이었다.
포옹으로 길을 배웅했다. 몸이 피곤했지만, 시야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뒷 모습을 가만히 보고 서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길위에서 생을 마감하기 위해 걷는다는 할머니 앞에서 내 신세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2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늘도 역시 혼자.
혼자 걷는 길은 외로웠다.
도시가 크다 보니 처음에 약 1시간을 도시 속에서 뱅뱅 돌았다. 길을 헤매다가 어제 길에서 만난 전직 대마 중독자를 만났다.
바르셀로나에 사는 그녀는 집에 대마를 키우는데, 약 4kg 정도가 있다고 했다. 그녀가 대마를 태우는 변명은 그랬다. “4kg나 있으니까 피울 수밖에 없다.” 매일 대마만 펴다가 집에서 쫓겨나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루에 약 8~10대를 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오랜 시간 동안 보낸 그녀는 온몸에 문신도 많았다. 걸으면서 문신을 다 보여주는데 가슴 안쪽 깊이 세긴 사과 문신을 보여줄 때는 상당히 부담이 됐다.
그녀는 대마가 그리워서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담배를 태운다. 담배를 끊키 위해 전자담배를 태우던 친구가 떠올랐다.
오늘은 어디까지 얼마나 걸을지, 하루가 시작부터 차암 기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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