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연재 일기_산티아고
D+17
280.0 km
388,464 STEP
< San martin del Camino >
밤새 꽁꽁 얼은 몸이 녹고 텐트가 아침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후에야 침낭에서 나왔다. 텐트 문을 여니 작은 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일어나자마자 참치캔 하나를 뜯어 딱딱하게 굳은 빵에 발라 먹었다. 한국에선 참치캔을 잘 먹지도 않았고, 먹더라도 참치 기름을 항상 걸러내고 먹었다.
지금은 어떤가. 참치캔 뚜껑에 남아있는 기름까지 빵에 발라 남김없이 캔을 비운다.
아침 9시쯤 돼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 길이 다음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고작 10시 50분 정도였다.
딱 두시간을 걷고 마을 초입에 보이는 숙소를 바로 들어왔다. 가격이 7유로로 조금 비싸긴 했지만, 이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이것뿐이라고 한다.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진짜 샤워는 땀범벅이 됐을 때 옷을 입은체로 물줄기를 맞아 버리는 것이다. 마치 길을 걷다 내리는 따뜻한 비를 맞는 기분이 든다.
한동안 비를 맞다가 동네 바를 찾아갔다.
나라가 크다 보니 지역적으로 다른 문화가 있다고 들었다. 약 이주를 걸으면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문화 변화는 단 한 가지뿐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바에서 맥주를 시키면 감자볶음이나 고기, 샌드위치 등 안주를 받아먹었다는 것이다.
한참 지나고 알았지만, 레온이라는 큰 도시 이후로는 점심시간에 맥주나, 콜라, 주스 뭐든지 음료를 시키면 “타파스”라고 부르는 간단한 먹거리를 준다.
친절하게도 한잔 시킬 때 마자 한 접시씩 준다. 며칠 전 먹었던 식사급 기본 안주가 이와 같은 것이었나 보다.
이 바에서는 얇은 소고기와 양파를 볶은 고기 볶음이 나온다. 맥주를 시키자마자 원샷을 해버리고, 안주가 나온 후에 맥주를 한잔 더 시켰다.
오늘 같은 날은 만나는 사람도 없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마디 말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도 아닌 양아치처럼 생긴 깡마른 미국 놈이 먼저 내가 말을 걸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의외로 그는 파스타 좀 나눠먹지 않겠냐며 친절했다. 나는 베이컨 볶음밥을 했다.
양아치와 함께 있던 그의 여자 친구는 25살 즈음된 스위칠란드 여자로 이름은 노아였다. 셋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노아는 구릿빛 피부에 키가 크고 적당한 길이에 생머리를 달고 있었지만, 오른쪽 왼쪽 구레나룻을 내 머리스타일과 비슷하게 시원하게 밀고 다녔다.
밥을 다 먹었지만, 그 둘은 절대로 접시를 치울 생각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난 내 접시만 치워야 할지 다 치워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다.
내 접시만 가지고 들어가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고 나왔을 때 양아치는 우쿨렐레를 치고 있었다. 나도 기타를 들고 나왔고, 그는 기타에 있는 그림들을 보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환호했다.
6살부터 기타를 쳤다는 양아치는 18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버스킹을 하면서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게 가능할 만도 한 게 그는 정말 프로였다. 줄을 튜닝하더니 무릎에 기타를 올려놓고 피아노를 치듯이 기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를 한창 감상 중일 때 양아치 여자 친구는 기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내 이발기를 더 좋아했다. 서로의 머리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이발기가 있다는 말을 하자마자 노아와 베스트 프렌드가 됐다. 그리고 노아는 바리캉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하얗게 밀고 나왔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기타를 치고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그들을 에코빌리지 멤버로 영입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모르지만, 아마도 3일 뒤면 에코빌리지에서 다 함께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레네도 함께.
그들이 먹고 남은 접시는 해가지고 나서야 그들에 의해서 치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