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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일이 언론이나 SNS로 퍼져나가게 된다면?”
연두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래도 괜찮지만...당신은 완전 끝나는 거 아니야? 부모님 재산 노리고 순진한 여대생 꼬신 다음, 계약결혼했다는 프레임. 완전 나락갈 거 같은데? 후계구도? 물거품?”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우리 결혼에 그렇게 기뻐하시던 당신 부모님은, 그때 가서 어떻하지?”
손에 쥔 핸드폰이 살짝 떨렸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당장 내놔.”
고언이 성큼 다가오며 손을 뻗자, 연두는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 녹음 파일이 여기에만 있을 거라 생각해?”
입가에 짧은 비웃음이 스쳤다.
“그리고 내가 돈이면 벌벌 떠는 사람으로 보였나본데...아니! 더는 못 참아!”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높아졌다.
“앞으로 3년, 갑을 관계는 분명히 해야겠어. 나를 공식적인 아내로 대할 거면, 그에 맞는 예의와 대우는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고언의 표정과 말투는 겉으로 잠잠해졌지만, 머릿속은 이미 앞으로의 수를 계산하느라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연두가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호텔 볼펜 하나가 그 위에 얹혔다. 그건 그녀가 결혼식장 신부대기실에서, 눈물을 삼키며 한 자 한 자 눌러쓴 계약서였다.
하나, 계약기간은 3년.
둘, 결혼 이후 얻게 되는 모든 재산과 주택 명의는 부부 공동 소유로 한다.
셋, 육체적 관계는 서로 요구하지 않는다.
넷, 집안일은 각자 알아서.
다섯, 상대의 이성 친구나 개인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여섯, 서로 예의를 갖추고 존중한다.
일곱, 새로운 계약사항이 생기면 협의아래 추가한다.
문장마다 번져 있는 옅은 얼룩이, 잉크가 아니라 눈물 자국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명하기 전까지, 혼인신고는 안 할거야.”
연두는 펜을 그의 앞으로 밀며 덧붙였다.
“빨리 싸인해.”
탁-
펜이 테이블 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려퍼졌다. 고언은 말없이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고언은 짧게 비웃음을 흘렸다.
“훗.”
연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봤다.
‘뭐지? 이 반응은?’
의문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
고언이 미친 듯 웃어대자, 연두는 잠깐 그가 충격을 받아 이상해진 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너도 생각이란 걸 하나보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뭐라고?”
연두가 되묻자, 그는 비웃음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계약결혼이란 거 알고도 덥석 물었을 땐, 그 머리는 왜 달고 사나 싶었거든. 그래도 머리라는 걸 쓰긴 쓰네. 푸웁.”
그 비아냥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두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말 다했어?”
이를 악문 채 쏘아붙이는 목소리. 고언은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싸인 안 하면 난리 날 것 같으니까, 우선 싸인은 해둘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종이를 잡아끌고 펜을 굴렸다. 종이 위로 잉크가 매끈하게 지나갔다.
쓰스슥-
싸인을 마친 그는 펜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귀국하면 담당 변호사가 정식계약서를 줄 거야. 그건 비밀계약서고, 변호사도 내용은 몰라.”
“비밀...계약서?”
연두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는 지루하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네가 적은 조항들도 포함돼. 그리고 제일건설 며느리로서의 품위 유지, 계약결혼 관련 내용은 영원히 함구. 이 조항들을 어기면 책임을 물을거고, 위약금은 계약금의 열 배 이상.”
“계약금...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희 부모님, 상견례 끝나자마자 내 회사로 찾아왔었어. 고이고이 기른 딸 데려가면서 왜 돈 한 푼 안 내냐고. 결국 돈 얘기뿐이더라.”
‘부모님이...회사로?’
연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고언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마치 보고서를 낭독하듯 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 한 분당 1억 5천씩, 총 3억. 그리고...왜 이혼하셨단 얘긴 안 한거지?”
말투는 담담했지만, 연두의 귀에 꽂히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칼날처럼 예리했다. 숨쉬는 공기가 유리조각이 된 것처럼, 가슴 언저리에서 자꾸만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하...”
숨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흘렀다. 고언은 그마저도 끊어버리듯 덧붙였다.
“아버지는 빚이 많으시고, 한의사도 아니시더라? 어머니는 이대 앞도 못 가본 고졸에 식당 서빙. 우리회사 법조팀은 거짓말 안 해.”
그가 던지는 사실 하나하나가 유리 파편처럼 연두의 가슴 안쪽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처음이었다. 부모님 때문에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껴본 것은. 그리고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연두의 가슴에 또 한 번 내려앉았다.
“돈 앞에서 벌벌 떨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어. 너희 부모님도, 너도 어디 두고 보자고.”
탁-
펜이 탁자 위를 치고 굴러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고언은 그 소리를 끝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멀어지는 걸 보는 순간, 연두는 다리에 힘이 빠지며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흐흑...”
겨우 참고 있던 울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때, 그가 다시 돌아보며 무심히 한마디를 던졌다.
“아! 깜빡했다. 내일 화보 촬영 있어.”
‘뭐라고?’
붓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 엉망이 된 기분은 어쩌라는 건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데...’
연두의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끝내 소리로 나오지 못하고 안쪽에서만 맴돌았다.
고언은 그런 그녀의 속사정 땨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말을 끝냈다.
“배고파도 적당히 먹어. 내일 찍을 사진은 신혼여행 공식 화보로 전 언론사에 배포될 거니까. 돼지처럼 나오지 않게 조심하라고. 결혼식 때처럼 이상한 사진 나오면 곤란하거든.”
탁-
문 닫히는 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지는 순간, 연두는 단전 깊숙한 데서 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돼지라고? 내가? 돼지야? 우이씨!”
버럭 뱉어낸 분노를 어떻게 할 수 없어,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움켜쥐고, 있는 힘껏 내리쳤다.
푹- 퍽- 퍽-
두르려 패는 소리는 묘하게 시원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은 더 답답해졌다. 십 분도 못 가 기운이 쭉 빠진 연두는 결국 베개 위로 몸을 털썩 기댔다.
“휴...힘들어.”
푹신한 매트리스가 등을 포근히 삼키자, 시선이 자연스럽게 천천히 테라스 쪽으로 옮겨갔다. 유리창 너머, 푸른 물결이 유리잔 속 얼음처럼 반짝이며 부서지고 있었다.
“하...되지게 예쁘네. 하와이 바다.”
그 광경에 잠깐 넋이 나가 있던 연두의 머릿속에 다시 숫자가 떠올랐다.
‘1억 5천 더하기 1억 5천, 총 3억...공양미...삼백석?’
뜬금없이 인당수가 연상되자, 허탈한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하와이 인당수라니...서글프게 아름답네.’
**
다음날, 와이키키 해변의 화보 촬영장. 아침부터 햇볕은 강렬하게 내리쬤고, 모래 위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열기가 발바닥을 훑고 올라왔다.
고언이 연두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눈은 또 왜 그렇게 부었어? 누구한테 맞았냐?”
하는 말마다 사람 속을 긁는 재주. 연두는 단번에 발끈했다.
“남의 속 긁지 말고 조용히 하시죠. 누구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신혼여행 첫날밤의 독수공방. 눈물로 적신 베갯잇의 흔적이 연두의 두 눈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때, 촬영 스튜디오에서 나온 실장이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신부님, 신랑이랑 더 붙으셔야겠어요!”
밝은 목소리 뒤로, 직원들의 낮은 속삭임이 파도 소리에 섞여 들어왔다.
“저 두 사람 신혼여행 맞지? 그런데 어째 좀 분위기가...”
“셀럽 부부들 많이 찍어봤지만, 이렇게 남남 같은 분위기는 처음이네.”
연두는 애써 못 들은 척 했지만, 귓가를 스치는 어조만으로도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옷은 그게 뭐야? 아저씨도 아니고.”
연두가 슬쩍 고언의 옷차림을 훑었다.
“스튜디오에서 시키는대로 입었어.”
고언의 모습은 검은 반바지에 하얀 셔츠, 세미턱시도 스타일. 그 옆에서 연두는 솜사탕 같은 분홍색 튜브탑 드레스에 작은 부케를 들고 서 있었다.
“더 가까이요! 가까이!”
실장의 주문이 집요할 정도로 이어졌다.
“더워죽겠네.”
“붙으라잖아!”
남들이 보기에 다정한 연출을 해야 하는 순간에도 둘 사이엔 신경전만 오갔다.
‘아...더워.’
내리쬐는 햇볕에 연두의 어깨가 따끔거릴 즈음, 실장이 다시 아이디어를 냈다.
“팔짱 한 번 껴볼까요?”
“팔짱이요?”
아직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는 사이. 어색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얼른 잡아! 그래야 끝나지.”
짜증이 가득 섞인 고언의 목소리에, 연두는 이를 악물고 팔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팔짱을 끼는 순간, 하이힐의 굽이 모래 위를 살짝 파고들었다.
“어...?”
순간, 몸이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었고, 고언은 쓰러지려는 그녀를 살짤 밀어내며 짜증스럽게 이야기했다.
“왜 그래? 내 품에 그렇게 안기고 싶어?”
그 와중에도 빠지지 않는 한마디, 연두는 이를 악물었다.
“무슨 헛소리를...”
말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흔들렸고, 하늘 위에 물감이 번지듯 눈앞이 노래졌다.
“야! 너 왜 이래!”
멀어지는 목소리, 둔감해져가는 바람의 촉감.
결혼식 전부터 이어지던 컨디션 난조가 결국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연두는 두 다리에 힘이 빠지며, 몸이 점점 그의 쪽으로 기울었다.
“서연두! 정신차려!”
어지러움과 열감이 겹겹이 쌓여, 등줄기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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