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언즈냐?

7

file_00000000e9f471fabc640408bbcf1077.png


“온몸이 불덩이잖아!”


고언은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자켓을 벗어 연두의 어깨 위에 덮어줬다.


‘안 되겠어...’


그는 그대로 연두를 번쩍 안아 들더니, 해변 한쪽에 자리한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Whatever is the matter?”


“She is passing out from heatstroke!”


짧은 영어 대화가 오가고, 얼음과 물수건이 바쁘게 주방에서 준비됐다.


“괜찮아? 정신 좀 차려봐.”


체온이 조금 내려갔을 즈음, 연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시야 한가운데, 낯선 얼굴이 크게 들어왔다.


“으악!”


덩치 큰 마오리계 사장님의 품 안. 연두는 반사적으로 몸을 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 상무! 고 상무 어디갔어!”


문 바깥쪽에선 낮게 섞인 목소리들이 오갔다.


“잠깐 중단하고 열기가 식으면 재개하시죠.”


“일정에 차질 없게 준비해주세요.”


나름 보호자라면 보호자인 사람. 연두는 그 말들을 들으며, 아주 잠깐 고언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만이라도...옆에 있어도 되잖아.’


다행히 그는 멀리가지 않았고, 바깥에서 스태프들과 촬영 일정을 조율하고 있었다.


“어 유 오케이?”


카페 사장님이 다시 물었다.


“아임 오케이...오케이. 하하.”


짧은 영어로 허둥대며 대답을 마친 연두가 사장님 곁에서 조금 물러나자, 스태프가 얼음 주머니를 가져다주었다.


“해변에서 쓰러져 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데요.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죠.”


스태프의 말에 연두는 숨을 고르며 얼음을 이마에 더 꾹 눌렀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바깥을 살폈다. 그러나 어느새 고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고 상무...아니 신랑은요?”


망설이다가 던진 질문에 스태프가 짧게 답했다.


“먼저 리조트에 들어가셨데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식혀놓은 체온이 다시 한 번 아래로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늘 이렇지.’


혼자 남겨지는 건, 언제나 자신의 몫. 실장이 다가와 다시 일정을 정리해줬다.


“세 시간 뒤, 리조트 야외수영장에서 뵙죠. 나머지는 의상팀과 메이크업 팀이 객실로 방문해서 도와드릴거예요.”


“네...”


연두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스태프가 커다란 쇼핑백을 건넸다. 그녀는 무심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고, 동시에 숨을 멈췄다.


“허걱...”


얇디얇은 비키니 수영복과, 허리에 매는 시스루 스커트. 손바닥만 한 천조각들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


노란색 하이웨스트 비키니가 침대 끝에 얌전히 놓였다.


화장을 마친 연두의 얼굴은 부기가 빠지면서 선이 또렷해졌고, 눈동자는 어젯밤과 달리 한 톤 밝아져 있었다.

팀장은 거울 앞에 선 연두를 한 번 훑어보더니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아나운서 준비하던 분이라서 그런가? 메이크업 받으면 얼굴이 확 살아난다니까. 의상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나와요.”


연두는 비키니를 집어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인생 최대의 난관, 그나마 하이웨스트라 뱃살은 어느정도 가려 줄 것 같았다.


키 160, 체중은 간당간당 49kg.


원래대로라면 오십 중반을 훌쩍 넘었을 체형이었지만, 결혼식 전 피나는 다이어트로 여기까지 끌어내린 몸이었다.


그럼에도 옆으로 삐져나오는 살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최대한 배에 힘! 하나, 둘....헙!’


뱃살이 튀어나오지 않게 힘을 꽉 주자 복부의 근육이 얇게 떨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젯밤은 본의 아니게 물만 마시며 버텨야했던 것. 영어가 서툰 탓에 룸서비스 주문도 못하고, 생수만 꿀꺽꿀꺽 들이켰으니까.


‘그래, 차라리 못 먹어서 다행이지.’


비키니를 겨우 몸에 고정한 뒤, 연두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야외수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햇빛이 물 위에서 잘게 부서져 반짝였고, 하와이 바람이 파도를 타고 와 발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와우! 이게 누구야!”


실장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아까 그 분 맞아요? 완전 다른 사람인데?”


“누구 닮았어! 그 아이돌 있잖아...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칭찬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진심인지, 분위기를 띄우려는 립서비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연두는 어깨를 펴고 호흡부터 가다듬었다.


“미니언즈냐? 노란색...”


살짝 스며드는 바람처럼 들어온 말에 연두는 고개를 홱 돌렸다.


“지금 뭐라고...?”


따지고 들려던 입술이 멈춘 건, 눈앞에 들어온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남색 삼각수영복 위에 걸친 얇은 셔츠.


바람이 스치자 셔츠 사이로 단단한 복근과 어깨선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물기 어린 햇빛이 그의 쇄골과 목선에 작은 점들을 찍듯 박혀 있었다.


‘뭐야! 하나도 흠 잡을 데가 없잖아?’


스스로 놀란 시선을 서둘러 거두는 사이, 실장이 박수를 쳤다.


“찍겠습니다! 여기 보세요! 좋아요! 지금!”


셔터 소리가 수영장 수면 위로 가볍게 떨어졌다.


“살짝 기대고! 좋아요! 이번엔 팔짱!”


실장의 구호에 맞춰 두 사람은 어색한 스킨십을 하나씩 소화해나갔다. 팔꿈치가 스칠 때마다, 둘은 속으로는 이를 악물며 버텼지만, 카메라 화면 속 모습은 이상할만큼 자연스러워보였다.


“잠깐 쉬어갈게요.”


쉬는 시간, 스태프가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를 연두에게 건넸다.


“연두씨 드세요.”


“감사합니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입술에 닿는 순간, 달달한 맛이 혀끝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여기가 천국인가?’


강아지처럼 혀를 살짝 내밀어 핥아 먹는 표정이 실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연두씨! 방금 그 표정, 너무 좋아요! 계속 가능할까요?”


“네?”


“아니, 그냥 아이스크림 계속 드세요.”


연두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 입 베어물었다. 코끝과 윗입술에 하얀 아이스크림이 살짝 묻은 순간.

옆에서 큰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고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입술이 연두의 입술이 닿았던 아이스크림을 스쳐지나갔다.


‘헐!’


셔터음이 한 번, 두 번 더 연달아 터졌다. 그 순간, 실장이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좋아요! 한 컷 더!”


“내꺼야! 뺏어먹지마!”


연두가 눈을 치켜뜨자, 고언의 입가가 아주 짧게 올라갔다.


사진 속에는 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을 잔뜩 묻힌 채 눈을 크게 뜬 연두와, 옆에서 장난스럽게 한 입 베어무는 고언이 함께 담겨 있었다.


순간의 장난은 카메라 속에서 ‘달콤한 애정행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실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베스트 컷 나왔네!”


촬영이 끝난 뒤, 고언은 카메라 화면을 천천히 넘겨보다가 짧게 결론을 내렸다.


“홍보 자료로 사무실에 보내두세요.”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연두는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이런 사진도 있었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봐 고상무, 다음에 또 이러면 계약위반이야. 알아들어?”


연두가 못마땅한 눈빛을 던지자, 그는 한 귀로 흘려듣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착각은 그만하지? 이건 비즈니스야. 일이라고.”


두 사람은 귀국비행기에서도 여전히 으르렁거렸다. 쇼윈도 부부의 달콤한 이미지는 사진 속에만 남겨둔 채, 현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돌아온 고언의 저택. 검은 대문에 ‘지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 한남동. 비탈을 타고 올라간 골목길 끝, 3층 저택이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외벽은 짙은 암회색, 대리석의 결이 수직으로 흐르고, 주변을 두른 흰 담장은 높은 긴장감을 풍겼다.


차창 밖으로 올라오는 대저택의 윤곽을 바라보며 연두는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있구나, 이런 집. 그런데...지금 이 집으로 들어가면 3년은 버텨야겠지?’


아이보리색 지하주차장 자동문이 옆으로 갈라졌고, 조명이 켜지며 차들이 한 줄씩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 세단, 클래식카, 눈에 익숙한 빨간 스포츠카까지.


“이걸 혼자 다 타는 거야?”


“내 차니까.”


운전대 너머의 목소리는 당연하다는 듯 들렸다.


“저건 우리나라에 두 대뿐인 차야. 주문 제작한 거.”


‘돈 자랑이야 뭐야!’


연두는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고언은 과감하게 핸들을 꺾어 차를 세웠다. 타이어의 바닥 긁는 소리가 주차장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러다 차 망가지는 거 아냐? 차라리 기사님을 고용하는 게...”


“피곤해서 그래. 넌 신경 쓰지마.”


그는 시선을 창밖에 둔 채 핸들을 한 번 더 돌렸다.


“그리고 기사님은 회사에도 둘, 본가에도 셋. 업무가 아닌 이상 부르고 싶지 않아. 난 직접 운전하는 게 좋아.”


‘아끼는 차라면서 운전은 왜 이 따위야?’


연두는 대꾸 대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현관 앞에 서자, 도어락에서 낯선 멜로디가 흘렀다.


“지문 인식?”


“동맥 인식.”


짧은 대답과 함께, 고언이 내민 건 카드키였다.


“너는 카드키.”


연두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씨, 치사하게. 나도 동맥 한 번 써보면 안 되냐?’


철컥하고 문이 열리자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햇빛이 거실을 하얗게 물들였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거실은 호텔 로비처럼 탁 트여 있었고, 햐얀 대리석 바닥은 발밑에서 햇빛을 쏘아올렸다.


“이거 진짜 대리석이야?”


“외국에서 들여온 자재야. 우리 집이 건설산데, 집을 아무렇게나 짓겠어?”


‘얼마나 할까? 이런 집은...’


연두는 잠시 계산기를 두드리는 상상을 하다가, 왠지 마음만 우울해질 것 같아 곧 포기했다. 비누 향이 가득한 욕실에서는 금빛 장식들이 번쩍였다.


“이거 진짜 금?”


“함부로 만지지마. 이 집, 아직 법인 소유야.”


연두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기, 당신 집 아니야?”


“세무 문제로 잠깐 돌려놨어. 이번 주 안으로 혼인신고하면 공동명의로 돌릴거야.”


‘와! 드디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다시 차갑게 내려앉았다.


https://brunch.co.kr/@deuny/502



keyword
이전 06화3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