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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돌아가고, 거실이 조용해지자 고언은 곧장 핸드폰을 들었다.
“어, 김 변. 혼인신고는? 혹시 그거...취소는 안 되지?”
연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취소? 그럼 난 어디로 가야하지?’
수화기 너머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혼인신고는 이미 지나갔고, 무효소송을 해야할겁니다. 하지만 조건도 그렇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차라리 합의 이혼을 하시는 게...”
“계약서는?”
“퀵으로 공증센터와 은행에 각각 한 부씩 보냈습니다. 지금은 금고에 들어갔을 겁니다.”
“계약취소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특히 혼인과 결부되면...우선 당사자 간에 협의를 하시는게...”
툭-
그가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고언이 고개를 돌려 연두를 마주봤다.
“너, 어떻게 할래?”
“뭘?”
“지금이라도 깨끗하게 갈라서자. 3년 기다릴 필요없이.”
연두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처음부터 속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깨끗하게...라니.’
그녀의 고시원 방은 이미 정리된 후였다. 그 사이 방 값은 더 올랐을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복만 바라고 있을 부모님의 기대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싫어. 이렇게는! 계약서에 싸인했으니 내 25억 돌려줘.”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고?”
“계약이 취소되면, 취소 책임이 있는 당사자가 책임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계약서에 나와있는 것처럼.”
“시끄럽고, 1억 줄게. 적당히 너와 내 선에서 합의 보고 끝내.”
“뭐라고? 내 얼굴이 온 세상에 다 알려진 마당에 1억 받고 끝내라고? 내 25억은? 나머지 돈은?”
“아까 그 늙은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그럼 당신 부모님한테 받아서 주면 될거 아니야!”
그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정말 애라도 갖자는 거야?”
분노에서 당황으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연두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래도 25억 앞에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못 할 게 뭐가 있다고?’
“훗-.”
돌아서려는 고언에게 연두가 코웃음을 흘리며 도발적으로 내질렀다.
“당신 정말...게이인거야?”
팍-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고언이 한 손으로 벽을 탁 찍었다. 둘 사이의 공기가 뜨겁게 흔들렸고, 숨소리는 살짝 거칠어졌다.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열기가 돌았다.
두근- 두근-
연두의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다가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당황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그의 목젖이 짧게 움직였다.
“왜, 무서워?”
낮고 건조했던 목소리에 묘한 기운이 섞여있었다.
“넌 이제 내 아내야. 여긴 내 집이고. 아이를 갖자는 말, 네가 먼저 꺼냈잖아.”
“그...그건...”
분노를 터뜨리려던 타이밍이었는데, 연두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벽과 그의 팔 사이, 아주 좁은 틈에 그녀의 숨이 갇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더 숙였다.
“하...미안. 그만하자. 어차피 이러면 계약 위반이잖아.”
그가 말을 남긴 채 팔을 내려놓자 둘 사이에 틈이 생겼다. 연두는 불쑥 치민 민망함을 부끄러운 듯이 내뱉었다.
“나도 아이 갖는 건 싫어! 누가 진짜로 애 낳고 싶대? 화나서 한 말인데...”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계단쪽으로 뛰어갔다.
팍-
3층 방문이 세게 닫히고, 곧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침대 모서리에 쭈그려 앉은 연두는 방금 전 고언의 눈빛을 떠올렸다.
불쾌와 서늘함 사이로, 이상하게 뜨거운 온기가 섞여 들어오던 눈빛.
‘재수없어...’
그런데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며 더 크게 울렸다. 잠시 뒤, 한남동의 밤을 가르는 엔진음이 창문을 긁었다.
부앙-
빨간 스포츠카가 골목을 빠져나갔고, 고언은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며칠이 흐른 뒤,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누구세요?”
“연두야, 나야.”
문을 열자 엄마가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서있었다.
“야야, 이것 좀 받아.”
“엄마! 이게 뭐야?”
연두의 품에 안긴 종이상자에는 한자로 가득한 라벨이 붙어 있었다.
“한약, 너 거랑 고 서방 거랑 한재씩 해왔어.”
“한약?”
엄마는 대답 대신 거실을 빙 둘러보며 탄성을 흘렸다.
“아이구, 신혼집 참 좋아. 고 서방은 잘 해주고?”
“응...”
‘잘 해주긴 개뿔...’
연두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엄마의 시선이 집 안을 한 바퀴 훑으며 누군가를 찾는 듯 맴돌았다.
‘혹시 그를 찾고 있는 걸까?’
하지만 며칠째 연락 없는 사정을 설명하기엔 번거롭고, 무엇보다 엄마의 걱정만 키울 터였다.
“주말인데 고 서방은 집에 없어?”
“회...회사갔어!”
“그래? 얼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요즘 회사 일이 바쁜가봐. 엄마, 뭐 마실래? 주스? 커피?”
“그냥 시원한 거.”
주방 아일랜드에 나란히 앉자 그녀의 엄마가 말을 꺼냈다.
“사부인께서 며칠 전에 전화를 하셨어.”
“뭐?”
“너희...아직 소식 없는 거지?”
“무슨 소식?”
“요즘은 혼수로 다 애부터 갖고 결혼한다잖니. 뭐,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이해는 간다만...나도 부담 주고 싶진 않은데, 사부인이 손주를 빨리 보고 싶다고...”
“뭐?”
“사돈어른이 작년부터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데. 심장 수술 두 번에 폐암 치료 중이시라나? 고 서방이 그런 얘긴 안 했나보네.”
“처음들어.”
“너 걱정할까봐 얘기 안 했나보다.”
3년 후면 끝날 사이.
남이나 다름 없는 연두에게 집안 사정을 일일이 늘어 놓는 건 고언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니 고 서방이 빨리 대표 자리에 앉아 후계 구도를 굳히려면, 네가 애를...아들, 딸 쌍둥이로 떡하니 낳아 주면 고 서방도 마음잡고 경영에 집중할 거라고...”
“쌍둥이? 엄마는 누구 고생하는 꼴 보고 싶어? 쌍둥이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알지. 애 키우는 거 힘든 거 알지. 근데 사부인이 울면서 하소연을...그 양반도 안 됐더라.”
‘지금 가장 안 된 건...엄마 딸인거 같은데요? 엄마.’
연두는 계약결혼이란 사실, 그리고 며칠 전 고 회장의 한마디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버린 이야기를 삼켰다.
차라리 그럴바엔 한약 한 봉지를 들이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근데 난 한약 잘 안 받는데.”
“알 거 없고, 몸 좋아지는 약이야. 하루 두 번, 고 서방 것도 챙겨주고.”
엄마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신혼집에 내가 오래 있어서 뭘해. 고 서방 들어오면 약부터 먹여.”
“으응...”
그녀의 엄마가 떠난 뒤, 연두는 멍하니 서 있다가 한약 상자를 다시 들여다봤다.
‘보약이라...요즘 잠도 들쑥날쑥, 입맛도 없는데 한 봉지 먹어볼까?’
꼴깍-꼴깍-
달큰한 첫맛이 혀에 남았다.
‘어? 맛있네?’
몇 모금 안 되는 양이 아쉬워 한 봉지를 더 들이켰다.
‘하루 두 봉이면 되지 뭐. 이럴 때일수록 몸이라도 챙겨야지.’
그때 도어락이 울렸다.
띠로리- 철컥-
새벽 두 시를 넘겨 들어선 그림자. 술 냄새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안 들어오고 뭐해?”
연두의 말에 그는 잠시 현관에 서서 입술을 달싹였다.
“나 좀...”
“뭐?”
“나 좀...안아 줘.”
“뭐라고?”
“나 좀 안아 달라고.”
말 끝에 얇은 울음이 묻어있었다. 그리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떨리는 숨이 새어나왔다.
“취했어?”
연두가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그의 팔이 움켜쥐듯 다가왔다.
와락-
“이게 뭐하는 짓-”
그녀의 목소리가 입천장에 걸렸다.
“아무도 나를 보고 웃어 주지 않아. 그때 그 소녀처럼.”
그의 말은 술기운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놔. 당신 지금 많이 취했어.”
그의 품에서는 다른 기운이 스며나왔다. 셔츠에 배어든 땀 냄새와 짙은 머스크 향, 심장 박동의 미세한 진동.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낯설게 달콤했다.
‘왜 이러지? 내 심장이...’
한약때문인지? 술 냄새 때문인지? 혹은 이 사람의 체온때문인지?
연두의 가슴이 쿵쾅대면서 박동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동안 나, 외로웠어. 아주 많이.”
귓가를 스치는 나긋한 말은 술주정 같으면서도 진심같았다. 연두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울음으로 젖은 눈동자, 가늘게 흔들리는 숨.
늘 사나운 인상 뒤로 숨어 있던 그의 연약한 모습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 사람에게도 이런 얼굴이 있었구나.’
“제발...내 말 좀...들어줘.”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힘이 풀렸다.
“고 상무! 정신차려! 고 상무!”
그는 그녀의 품에서 무너져 내렸다.
“아우씨, 되게 무겁네...”
187센티의 남자를 끌어안고 2층까지 올라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겨우겨우 그를 침대에 눕히고 나니 연두의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카디건을 훌렁 벗어 던지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평온한 천사같았다. 늘 악마처럼 굴던 표정은 자취를 감췄고, 긴 속눈썹과 고른 숨결만이 남아있었다.
‘만져 보고 싶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볼에 닿기 직전, 그의 자켓 속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벨렐레레- 벨렐렐레-
화면에 뜬 이름.
‘혜정? 혜정이가 왜 이 시간에...’
연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언니?”
‘언니? 기가 막혀서...’
결혼식 때 들은 그녀와 고언의 대화, 하기 싫은 정략결혼 대신 먹잇감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그녀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언 오빠, 잘 들어갔나 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대리 불러 보냈거든.”
‘걱정? 왜 네가?’
“네가 이 사람 걱정을 왜 해. 부인은 난 데.”
“그래도...이틀 동안 계속 같이 있었거든. 오빠가 결혼하고 나서 더 힘들어 하는 것 같더라고. 말은 안 하지만 그렇게 술 마시는 건 처음 봤어.”
“뭐?”
“계약결혼...이라면서? 옆에서 보는 내가 더 힘들더라.”
연두의 속이 부글부글 뜨겁게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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