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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라도 결혼은 결혼이야. 어려서부터 친했던 ‘전’약혼녀라도, 지금 이 사람은 유부남이잖아? 밤중에 부인 옆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전화하는 이유가 뭐야?”
“난 그냥 걱정이 돼서. 늦게 전화한 건 미안하지만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근데 언니랑 오빠,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잖아?”
“뭐라고?”
“이 결혼, 3년 뒤에 끝난다며.”
연두의 숨이 한번에 거칠어졌다.
“3년 뒤에도 언니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두고 볼게. 내 ‘전’약혼자의 ‘예비’ 이혼녀님.”
뚝-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연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잠든 고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의 눈물, 뜨거운 체온, 외로웠다는 고백.
그 순간 가슴이 다시 ‘쿵’하고 울렸다.
‘만져보고 싶어. 그의 얼굴...’
연두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참고, 이불을 끌어 올려 고언의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그런데도 눈길은 도무지 그의 얼굴을 떠나지 못했다.
곤히 잠든 얼굴은 낮동안 자신을 몰아붙이며 독설을 퍼붓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부드러웠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고운 콧날이 고요히 숨결을 내밀었다.
날카로웠던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앙 다문 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두의 가슴이 다시 크게 요동쳤다.
‘왜 이러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내 마음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거지?’
분명 혜정의 전화가 들려준 말들은 불쾌하고 화가 났는데, 정작 눈앞의 고언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아 보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남자가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 버려진 외로운 존재처럼.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손끝이 저절로 움직여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꿈틀대는 알 수 없는 본능. 하지만 연두는 두 손을 꽉 움켜쥐며 억눌렀다.
‘안 돼. 이건 한약때문이야! 잠시도 흔들리면 안 돼! 절대!’
하지만 머리로는 아무리 부정해도, 심장은 이미 그녀를 배신한 듯 거칠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우이씨!”
연두는 허공을 향해 씩씩대며 외쳤다. 이건 한약 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신혜정!”
두 사람을 이렇게 놓아주는 건 너무 억울했다. 그리고 도저히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고언과 신혜정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가만두지 않겠어. 너희 둘 다.’
순순히 이혼을 해 줄 마음 따윈 애초에 없었다. 이제는 오히려 통쾌하게 복수해주고 싶어졌다.
**
다음날 아침, 욕실에서는 토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튀어나왔다.
“우웩! 우웩!”
고언이 변기를 붙잡고 속을 비워내며 괴로워하고 있던 사이.
주방에서는 북엇국 냄새가 구수하게 퍼졌다. 해장국을 끓이는 연두의 손놀림은 제법 야무졌다.
‘이런 거...해주기 싫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은근히 마음이 쓰였다.
“속은 좀 어때?”
“상관 마.”
식탁 위에 국그릇이 놓였을 때, 그가 다가왔다.
축 늘어진 어깨, 촉촉한 땀과 물기가 섞인 이마. 고언은 눈썹을 한번 찌푸리더니 컵에 물을 따르곤, 국을 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연두는 굳이 권하지 않으려다가 말을 걸었다.
“북엇국 끓였어.”
“안 먹어. 속 뒤집혀.”
그를 보는 연두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문득 어젯밤,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툭 내려놓았다.
“그래도 만든 사람 성의는 생각해야지. 어제는 나 붙들고 얘기 좀 들어달라며 그렇게 울던 사람이.”
그 말에 고언의 귀끝이 붉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숟가락을 들고 국그릇을 앞으로 끌어왔다. 따뜻한 밥공기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호로록.”
시원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연두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맛이 어때?”
그녀는 북엇국 하나라면 자신있었다. 그러나 냉담하게 돌아온 대답.
“...먹을 만해.”
연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저 ‘먹을만하다’니! 하지만 더 큰 충격은 곧이어 다가왔다.
그는 국그릇을 멀찍이 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제 한 말, 진심아니야. 그러니까 잊어버려.”
연두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뭐?”
어젯밤의 떨림, 눈가에 고인 눈물, ‘외로웠다’던 힘겨운 목소리. 모두 연두에게는 술주정이 아닌 진심 같았는데, 고언에게는 한낱 술주정이었다니.
“술기운에 나온 소리야. 신경 쓰지마.”
그 한마디에 연두는 얼어붙었다. 잠시나마 마음을 흔들었던 모든 순간이 먼지처럼 흩어져버린 느낌이었다.
딱-
그녀는 차가운 대리석 식탁에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좋아, 그럼 우리 다시 계약하자.”
“...뭐라고?”
“나 이대로 못 나가. 원래 이 집, 내 집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경찰이라도 불러야 나가겠어?”
“혼인신고까지 한, 합법적인 아내를 이렇게 내쫓을 셈이야? 제일건설 고천석 회장의 아들이신 고언 상무께서?”
고언은 두통을 누르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젠장.”
“집안일은 내가 할 게. 대신 시간당 만 오 천 원,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근무 시간 딱 지켜서.”
그녀는 당당했지만, 고언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미쳤구나, 너.”
“미친 건, 먼저 계약결혼하자고 접근한 당신이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네 발로 나가면 끝이야.”
“오케이, 콜!”
그렇게 둘 사이의 두 번째 계약이 성사됐다.
**
그 후로 연두는 집에서 가정주부가 아닌 가정부 신세가 되었다.
유리창의 작은 얼룩까지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 창틀을 닦을 때는 언제나 고언의 잔소리가 뒤따라 왔다.
대신 그녀는 밤만 되면 자신의 다락방, 노트북 앞에 앉아 웹소설을 써내려갔다.
현실의 일들이 고달프고, 힘겨울 때면 글 속 세계는 언제나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주었다.
‘이 곳에서 버티자! 딱 3년 만!’
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이자 최후의 결심이었다.
[“옷 다려놔. 내일 아침까지.”]
[“세탁소에 맡기면 안 돼? 나도 할 일 있어.”]
[“네가 집구석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그의 말은 매번 날카로웠고, 연두는 투닥거릴 때 마다 자존심이 상했다. 매일매일 청소와 빨래,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좋은 말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결국 건설사 부부 동반 모임에서 둘 사이는 끝내 최고조로 치달았다.
“옷이 그게 뭐야? 월급은 뒀다 뭐해?”
“시급이나 제대로 줘! 그것도 최저시급으로 깎아놓고선! 지금 그 돈으로 명품가방에, 비싼 옷까지 사 입으라고?”
순간 터져 나온 연두의 말에 주변의 시선이 한번에 몰렸다. 고언은 차갑게 웃었다.
“모델이 좋아야 협찬이라도 들어오지.”
그의 말은 정교하게 연두의 자존심을 긁어버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연두는 이를 악물고 침묵으로 버텼다. 고언은 라디오 채널을 몇 번 돌리다가 결국 무심히 꺼버렸다.
정적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그 외에도 공식 행사장에서는 매번 날카로운 말들이 이어졌다. 둘의 언성은 쉽게 높아졌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혼 3년 내내 불화설은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계약 만료를 석 달 앞둔 어느 날, 일이 터졌다.
**
고 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듣는 사람의 숨이 막힐 만큼 위압적이었다.
“결혼한 지 3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소식이 없는 거냐?”
집을 불쑥 찾아 온 고 회장의 압박에 연두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고언은 정면으로 맞섰다.
“그만하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이번에도 옆에 서있던 그의 어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 참, 여보. 한약 꾸준히 먹고 있다잖아요. 애 들어서는 게 맘대로 안 되는 건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렇지? 약은 잘 먹고 있는거지?”
그러자 고 회장의 고함이 곧 이어졌다.
“남들은 결혼하자마자 떡하니 손주만 잘도 안기던데! 며느리라고 하나 얻은 게 집안만 시끄럽게 만들고! 언론사 여기저기에 인맥을 대서 입막음을 시켜도 수습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자꾸 삐적삐적 마르는 게 사람 구실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쯧쯧.”
“그만! 그만 하시라고요! 왜 자꾸 잘 못 없는 사람한테 그러세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고 상무의 모습이 연두에게는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연두는 속 시원히 대답도 못 하는 신세. 뭔가 억울했다.
진짜 부부는 아니었어도, 어차피 애는 둘이 만드는 건데 항상 연두에게만 채근이 심했다.
그때, 고언이 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제가...문제가 있어요.”
“뭐어?”
“저...발기부전이에요.”
서재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버지 아들이...병신....이라고요!”
으억-
“여보!”
고 회장의 얼굴이 굳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문 밖에서 지켜보던 연두는 비명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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