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네. 네. 알겠어요. 네”
전화를 끊은 뒤, 연두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라셔?”
“급한 고비는 넘겼다는데, 자세한 건 검사결과 나와봐야 안데.”
“그래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정말 집에 있어도 돼?”
창가에 선 고언은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짧게 웃었다.
“차라리 게이라고 할 걸. 발기부전이라니...그 말에 그렇게 쓰러지실 줄은 몰랐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의 한숨 소리는 공허하게 흩어졌다.
“내가 게이라는 소문은 많잖아. 남들이 하도 떠드니까 그런 얘기엔 익숙하실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었나봐.”
연두는 곧장 받아쳤다.
“능력이 있는데 안 쓰는 거랑, 아예 능력이 없는 건 달라.”
순간 고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연두의 시선이 무심코 그의 하반신으로 스쳤다가, 허겁지겁 위로 올라갔다.
“...너! 지금 어딜 보는 거야?”
“어? 아무 것도 아닌데?”
연두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얼굴은 화끈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일까? 발기부전? 아니면 게이?’
아이돌 시절까지 기사를 싹 다 찾아봐도 그 어디에 스캔들 기사나 염문설은 없었다.
‘고 상무한테 고백했다던 그 많은 여배우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정말 발기부전이라 차인건가?’
확인을 해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묘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동시에 치밀어 오르더니, 결국 질문이 바로 터져 나왔다.
“당신...진짜 발기부전이야? 아니면 소문처럼 게이인거야?”
고언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며 낮게 내뱉었다.
“...너, 예전에 그 일 잊었어?”
그의 눈빛이 매섭게 불타올랐다.
연두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곧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고언은 벽에 한 손을 짚으며 그녀를 가두었다.
숨결이 얼굴에 닿는 순간, 연두의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지금도, 내가 너한테 아무렇지 않아 보이냐?”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연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숨은 짧아지고, 시선은 본능적으로 그의 입술로 향했다.
‘안 돼. 우리 사이는 계약일 뿐이야. 흔들리면 절대 안 돼!’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경고했지만, 심장은 이미 세차게 뛰고 있었다.
눈동자가 그의 눈과 입술 사이를 오갈 때, 그녀는 자신이 알 수 없는 감각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코끝이 스칠 듯 가까운 거리. 피부 밑에서 짜릿한 전기가 튀어 올랐다.
고언의 눈동자는 생각보다 훨씬 어두웠다.
차갑기만 하던 그 눈에, 묵직한 갈증 같은 것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연두는 그 눈빛을 처음 보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마음, 안전해지고 싶은 결핍. 누군가에게서 버려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얽힌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아려왔다.
‘이 사람...안아 주고 싶어.’
고언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며 그녀를 사로잡았다.
벽과 숨결 사이, 좁은 틈에 둘의 호흡이 겹쳤다.
그는 더 다가오지 않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딱 입술이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멈췄다.
아슬아슬한 거리는 유혹이었다.
닿지 않음으로서, 닿은 것보다 더 많은 걸 느끼게 만드는 거리.
그의 숨이 목구멍에 걸렸다. 한 번, 두 번, 얕고 빠르게.
“서연두.”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의 음성은 낮은 베이스처럼 울렸다.
그 울림이 연두의 피부를 톡톡 두드렸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심장은 고막을 찢을 듯 요란히 요동쳤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이 순간, 눈을 감아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그에게 맞서야 할지 그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입술이 닿을 듯, 단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세상은 고요히 멈춘 듯했다.
고언은 한걸음 물러서는 대신, 허리를 숙여 연두를 내려봤다.
넓은 어깨가 통로를 틀어막고, 얼굴사이엔 주먹 하나 들어갈 틈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흘리 듯 내뱉었다.
“나, 지금 무지 참고 있는 거야.”
연두가 눈을 치켜세웠다.
“참고 있다니?”
말은 당찼지만,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거리를 좁혀 올 때마다, 연두의 호흡이 아주 조금씩 짧아졌다.
“아무리 배고픈 짐승이라도, 먹을 것과 못 먹을 걸 구분하는 법이잖아? 사자가 굶어 죽을 지경이라도 벌레 같은 건 먹지 않아. 안 그래?”
비유는 잔인했다.
“벌레? 내가 벌레라고?”
연두는 자존심이 확 상했다.
“나도 너 같은 남자, 열 트럭 갖다줘도 사양이거든!”
그는 짧게 웃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 연두에게 흘리는 조롱같았다.
“그래? 그런데 만약 너와 나 사이에 아이라도 생기면, 그땐 정말 인생 꼬이는 거잖아? 그저 이 한 몸, 조심 또 조심하는 거지.”
‘인생을 망친다니! 누가 누구 인생을 망친다고!’
연두의 속이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주먹을 쥐고서 한 마디 더 내뱉을 참에 그가 출근 준비를 하며 덧붙였다.
“어제 말했던 거 기억하지? 욕실이랑 내방, 깨끗이 해놓고. 오늘은 늦을거야. 병원 들러서 아버지 뵐 거니까. 필요한 용건 있으면 문자만 해. 부모님 계신데 전화는 하지 말고.”
“나는? 병원 같이 안 가도 돼?”
어조는 담담했지만, ‘며느리’이자 ‘아내’로서의 체면을 겨우 붙잡아 보려는 마지막 질문이기도 했다.
“그냥 집에 있어. 지난번처럼 분란 일으키지 말고. 또 불화설로 입방아에 오르고 싶어서 그래?”
그의 말은 마음의 문을 닫는 소리처럼 냉랭했다.
**
현관이 닫히고, 정적이 집을 채우자 연두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짜증 나게.”
그녀는 곧바로 그의 침실 청소로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했다.
대리석 바닥 위로 밀대가 벅벅 미끄러질 때마다 묘하게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발기부전’이라는 폭탄선언 덕분에 당분간 손주 타령은 사라질거란 얄팍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발기부전...크읍.”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책상 다리에 밀대가 걸리면서 위에 놓여 있던 유리병 하나가 쓰러졌다.
쨍그랑-
얇은 유리가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소리. 그러나 다행히도 깨지진 않았다.
대신 병 입구가 열리면서 작은 구슬들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 도망쳤다.
투명한 구슬 속에는 초승달, 별, 꽃, 눈송이, 새, 하트 등 작은 우주들이 담겨있었다.
‘이게 혜정이가 말했던 소녀팬이 준 선물?’
연두는 무릎을 꿇고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각기 다른 무늬가 손끝을 간질일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던 그의 취기 어린 고백이 떠올랐다.
‘아무도 나를 보고 웃어 주지 않아. 그때 그 소녀처럼.’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그의 가장 깊은 곳에 문신처럼 박혀있는 존재.
투명한 유리 속 문양처럼,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
구석으로 굴러 들어간 구슬 하나를 찾으려 책상 아래로 팔을 뻗는 순간, 손끝에 낮선 감촉이 느껴졌다.
슥-
먼지가 묻은 채 딸려 나온 건,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빨간치마와 색동저고리를 입은 네댓 살 여자아이. 볼살이 탐스럽게 오른 얼굴. 연두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게...왜 여기에 있지?”
놀람은 곧 불쾌함으로 바뀌었다.
‘내 사진을...훔쳐갔어? 말도 없이?’
어딘지 모르게 더러워진 기분.
그녀는 사진의 먼지를 탈탈 털어낸 뒤, 3층 다락방 창문에 보란 듯이 붙여두었다.
그 뒤로 이어진 욕실 청소.
운동장만 한 욕실은 청소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고언이 없는 오늘은 그녀만의 욕실로 만들 수 있었다.
“스트레스 좀 풀어야지.”
금색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오렌지향 입욕제를 풀었다.
뽀글뽀글-
작은 거품이 피어오르고, 핸드폰에선 하프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아...좋아.”
보들보들 맨살에 닿는 물의 촉감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고 긴장을 벗겨냈다.
바로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가 잠잠해졌다.
띠로리-
‘헛소리인가? 이제 환청이 다 들리네.’
이 집에서 숨죽여 지낸 자신의 착각인가했지만 잠시 뒤 발소리가 집 안 깊숙이 들어왔다.
저벅저벅-
툭- 딸깍-
욕실 문의 손잡이가 내려가며 아주 느린 소리로 문이 열렸다. 그리곤 연두와 고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악!”
“악!”
동시에 터진 비명.
연두는 온몸에 거품을 묻힌 채 본능적으로 샤워타월을 움켜줬다. 고언도 그 순간 눈동자를 하늘로 돌리며 재빨리 샤워 가운을 입었다.
‘허....’
실오라기 하나 없는 그의 맨몸을 보게 될 줄이야! 한 집에 산 지 3년이 다 되어서야 맞닥뜨린 충격적인 광경.
더 충격적이었던 건 모자이크 처리를 할 수 없었던 그의 소중한 부위.
연두의 눈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는 최소한 발기부전은 아니었다.
고언은 심호흡을 깊게 한번 하고는 당황스런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3층만 쓰라고 했지? 서로 부딪히지 말자고!”
목소리는 되레 차분했다. 그러나 그 차분함은 분노의 다른 얼굴이었다.
“왜 벌써 온거야? 오늘 늦는다고 안 했어? 그리고 여기, 당신만 사는 집 아니잖아. 이 집, 나한테도 소유권이 있는 거라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워가운을 입은 고언이 다그치 듯 말했다.
“이 욕조, 해외에서 어렵게 들여온 거야. 흠집이라도 나면 네가 책임질거야? 돈도 없으면서.”
가난을 들먹이는 말은 바윗돌처럼 연두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그는 이어서 낮게 따져물었다.
“그리고 내 방 유리구슬, 왜 손댄거야? 주인 없을 때 남의 물건에 손대는 버릇, 도둑질 아니야?”
억울함이 연두의 울음을 밀어올렸다.
“청소하다 흘린 것 뿐이야. 증거도, 확인도 없이 도둑취급부터 하는 거 너무한 거 아냐? 그리고 없어진 구슬은 똑같은 걸로 사다주면 되잖아.”
“똑같은 건 없어.”
눈물로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이미 슬픈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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