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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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3년 동안 계약이 깨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계약결혼이 들통 나거나 위반 사항이 생기면 재산 소유권은 전부 내 쪽. 자세한 건 방에 올라가서 살펴봐. 비밀계약서가 있으니까.”


정수리부터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굳어져왔다.


‘기분 좋았는데..’


“고시원짐은 3층에 올려놨어.”


“뭐? 3층?”


“1층은 거실 겸 서재, 2층은 주방과 욕실, 내 방이 있고. 난 거의 1, 2층만 써. 우리 서로 안 보는 게 좋잖아. 보고 싶은 얼굴도 아닌데.”


‘말투 하나하나에 어쩜 이렇게 싸가지가...’


연두는 당장 안 좋아진 기분을 쏟아내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내 방은 신혼부부 느낌으로 꾸며봤어. 같이 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대신 분위기에 취해서 계약사항 위반하는 건 나도 책임 못 져.”


고언의 능글스런 말에 연두의 미간이 일렁였다.


‘뭐야! 저 저질스러운 표정은. 밥맛 떨어지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갔다.


쿵- 쿵- 쿵- 쿵-


계단마다 발뒤꿈치에 무거운 체중이 실렸다.


**


이른 저녁, 그의 어머니가 보내 준 꽃바구니와 식재료들이 주방 아일랜드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고언은 과일 바구니 포장을 뜯어보더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보내지 말라니깐...넌 뭘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 당장 치우지 않고!”


연두는 한참을 주방 앞에 서서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때, 고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홍보팀이 사진 초안 보내올 거야. 확인하고 수정할 거 있으면 얘기해놔. 인터뷰도 잡혀 있으니까 준비하고. 답변은 홍보팀에서 써 준대로 하면 돼. 즉흥 멘트는 절대 하지마.”


“알겠어.”


“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멈춘 뒤 연두를 훑어봤다.


“하와에서 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는 무조건 잘 웃어. 그 사진처럼.”


말 끝에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여린 숨이 섞여있었다. 한숨인지, 피곤인지, 혹은 그도 모르는 다른 감정인지.


그렇게 다락방에서의 첫날밤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


연두는 짐을 정리할 새도 없이 피곤에 지쳐 그대로 쓰러졌고,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커피...마시고 싶다.”


짐을 풀기 전, 일단 카페인 충전부터 필요했다. 2층 주방으로 내려가자마자 머그컵을 들고 커피를 홀짝이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쳇...”


연두는 2층 자신의 방을 신혼방으로 꾸며놨다는 그의 말이 불쑥 떠올라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진짜...선 넘네.’


그의 옆을 빙 둘러 커피머신 앞으로 다가간 연두에게, 그가 슬쩍 한마디 던졌다.


“어이, 미니언즈. 농담도 못 받아주냐?”


본인도 어제의 농담이 마음에 걸렸는지, 가벼운 비아냥으로 아침인사를 대신했다.

연두는 눈꺼풀을 한번 크게 깜빡였다.


‘헐...왕재수.’


재수 없는 낯짝을 쳐다보지도 않고 커피를 내린 뒤, 머그컵을 들자마자 계단으로 바로 올라섰다.


쿵- 쿵- 쿵- 쿵-


대리석 계단에 괜히 발뒤꿈치로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3층 방문을 벌컥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풍경은 어제와 사뭇 달라보였다. 넓고 웅장했던 1, 2층과 달리 3층은 낮은 층고.


발뒤꿈치를 조금만 들어올리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장롱과 침대, 책상, 미니냉장고, 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창문 하나는 있었다.


‘창문 없는 3평 고시원에서 탈출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딱 3년만! 3년만 버티자. 그러면 이 호화주택의 절반이 내 몫이 된단말이지.’


그때 화장대 위의 두툼한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결혼계약서?”


그가 말했던 비밀계약서였다.


촤르륵-


3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 글씨는 빽빽했고, 문장마다 법률 전문가 특유의 냄새가 났다.


“아...이걸 언제 다 읽어...”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와 침대에 몸을 던지려던 순간, 뇌리에 다른 숫자가 번쩍거렸다.


‘그런데...이 집 시세가...’


핸드폰을 집어 든 그녀는 검색창에 짧게 타이핑했다.


‘한남동, 3층, 저택, 시세.’


“허억! 50억?”


50~60억. 화면 속 숫자들이 눈동자에 아른거렸다.


‘지금 당장 싸인해야겠다!’


그녀는 300페이지가 넘는 계약서를 붙잡고, 자신이 적어 넣은 조항들이 그대로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3년, 공동소유, 상호 예의, 간섭 금지...좋아!’


숫자를 다시 떠올렸다.


‘60억? 아니, 50억이어도 반이면 25억?’


화장대 위에 올려진 펜을 움켜쥐곤 손에 힘을 줬다. 그녀의 싸인은 시원스레 계약서 위를 지나갔다.

연두는 곧장 2층으로 내려가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계약서.”


고언은 서류를 받자마자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계약사항은 다 확인했어?”


“이번주? 아니, 내일 당장 공동명의 집문서 내놔.”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눈빛이 잠시 그녀를 스치더니, 바로 전화기가 손에 들렸다.


틱- 틱-


몇 자리 번호가 눌리고, 통화 신호음이 짧게 이어졌다.


“어, 김 변. 난데, 서류는?...그래. 그럼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 계약서 준비됐어.”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건조했다. 연두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물었다.


“내일 공동명의 집문서, 가능한 거지?”


“얼마든지.”


딱 떨어지는 대답이 돌아온 그때, 현관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띵동-


“누구지?”


“김 변호사가 벌써...”


문이 열리자, 예상과는 다른 실루엣이 먼저 들어왔다.


“아들.”


순간 연두의 몸이 굳어버렸다.


‘허걱!’


뜻밖의 시부모님의 방문.


“왜 전화를 안 받니?”


고 회장의 음성이 무겁게 떨어졌다.


“새아가,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니?”


“아...네.”


연두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궁궐 같은 집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지옥으로 변했다.


**


잠시 후, 서재 쪽에서 시작된 대화는 이내 언성이 높아졌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3자 명의라니요!”


“이놈의 자식! 하나뿐인 후계자라고 오냐오냐했더니, 이젠 애비 말을 귓등으로 들어!”


“여보, 조용히 좀 얘기해요. 밖에 새아가도 있는데...”


연두는 주방 한켠에서 서성였다. 커피를 타기 위해 커피잔을 꺼내고 먼지를 닦고 있었지만, 손이 자꾸 떨렸다.


그 사이 회장의 언성은 점점 더 커져만갔다.


“이 기사 봐라!”


그가 내민 신문이 고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어! 신혼여행 갔다 오자마자 불화설이라니!”


연두는 밖에서 들려오는 고 회장의 고함소리에 발끝까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화보 촬영장에서의 어설픈 스킨십, 말다툼, 그리고 스태프들 앞에서의 노골적인 신경전까지 머릿속을 스쳤다.


‘그게 결국...’


회장의 호통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수한다고 설치더니, 어렵사리 회사에 자리 만들어 앉혀놨는데! 또 사고야!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 사고! 사고!”


“여보, 그래도 회사 일은 열심히 하잖아요. 다들 칭찬하던데...”


“입에 발린 소리! 내 눈엔 하나도 안 차!”


“그래도 새아가 들어왔으니 언이가 원하는 대로...”


“당신도 시끄러! 너 스타트업인지 뭔지 한눈 팔지 말고, 얼른 애부터 가져라.”


“아버지!”


고함과 함께 공기가 무거워졌다. 연두는 커피잔을 받혀든 쟁반손잡이가 떨려오는 걸 느꼈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고 회장의 음성은 더 커져만갔다.


“애 낳기 전까지 주식도, 부동산도, 네 지분 한 푼도 없을 줄 알아! 이 집도 법인 명의에서 손주 명의로 곧장 돌릴 생각이다!”


쨍그랑-


연두의 손에서 쟁반이 미끄러지며 커피잔 파편이 바닥 위로 흩어졌다.


‘망했다. 내 25억...’


눈 앞이 캄캄했다.


“결혼만 하면 제 지분 넘겨주시기로 했잖아요!”


고언이 목청을 세웠다.


“네 지분? 넘겨주면 지킬 재주나 있고? 주주들이랑 이사회는? 그 사람들이 너 제 정신 아니라고 얼마나 벼르고 있는 줄 알아? 다들 자기사람들 심어서 지분만들려고 안달이 났다고!”


“아버지...”


고언의 눈가에 눈물이 돌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를 대신해 어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여보, 언이 공황장애는 치료 중이잖아요.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저번에 주치의도...”


그녀의 말을 고 회장의 고함이 다시 막아섰다.


“가수한다고 집 나갔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이상한 애들 틈에 이상한 것만 잔뜩 배워와선!”


돌아서려는 그의 등 뒤로 고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이제 성인이에요! 열아홉 철없던 어린 애가 아니라고요!”


쫘악-


서재 안에서 뺨을 때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결혼하면 철 좀 들 줄 알았는데, 점점 더 해! 다 시끄러! 당장 애나 가져!”


“그래도 이 집만은 돌려주세요!”


“그만해! 듣기 싫다!”


“아버지!”


“언아, 오늘은 그만하자.”


그의 어머니가 팔을 잡아끌었다.


“작년에 너희 아버지 수술하신 거 알잖아.”


잠시 뒤, 서재의 문이 열리고 고언이 거실로 나왔다. 그의 왼쪽 뺨에는 빨간 손자국이 번져 있었다. 떨리는 숨소리가 연두의 호흡까지 앗아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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