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계약서

5

“일 꾸미는 건 예나 지금이나 대단해. 그 덕에 팬들만 더 들쑤셔놨지만. 오늘도 극성팬들 난리쳤잖아.”


“그러게. 네가 그냥 조용히 결혼해줬으면 일이 더 쉽게 풀렸을텐데. 이런 복잡한 일도 없고.”


혜정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됐거든. 결혼은 싫어. 커리어에 도움도 안 되고. 공중파 아나운서 되려면 지금이 젤 중요한 시긴거 몰라? 난 싱글로 자유롭게 살 거야. 부모님도 내가 원하는대로 하라셨어. 이젠 미련버려, 새신랑.”


연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지 시작했다.


‘둘 다, 처음부터 알면서 나를 끼워넣었구나. 둘 사이에...’


고언이 물었다.


“그 기사, 네가 아는 기자가 써 준 거 맞지?”


“맞아. 왜? 뭐가 맘에 안 들어?”


“아니, 내 사진이 너무 굴욕적으로 나와서. 무릎 꿇고 사정하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진심으로 한 프로포즈도 아닌데.”


“그럼 진작말하지. 다른 사진으로 바꿔줄 수도 있었는데.”


“그때 파파라치 따라가 보긴 했는데 너무 빨라서. 나중에 따로 연락하기도 그렇고...근데 너, 방송국 확정 맞아?”


“별일 없으면 다음달 입사 수속. 왜? 예쁜 여자 선배라도 소개시켜줄까?”


“아니, 그건...이혼하고 나서 차차 생각해볼게. 나도 아직 싱글이 좋거든.”


그들의 말이 비수처럼 연두를 향해 날아와 꽂혔다.


**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계산적일 수 있을까?’


연두의 머릿 속은 주방에서 들었던 대화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부터 다 짜놓은 판, 서로의 이해관계를 맞춰놓은 거래.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낸 ‘적당한 먹잇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끝을 간질이던 스테이크 냄새는 어느새 매스꺼움으로 변해 있었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가슴 안쪽에서 조그만 둑이 터지듯 울음이 치밀어 올라왔다.


“흐흑...”


연두는 급히 눈가를 훔치며 표정을 고쳤다.


‘들키면 안 돼. 이걸 들었다는 사실도, 이 감정도.’


그녀는 직원의 부름에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야외 결혼식장 쪽으로 걸어 나갔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그 입술은 긴장과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 꼭 되갚아 주겠어.’


그리고 그 기간은 3년.


‘3년만 참으면 돼. 3년 뒤면 저 인간 재산의 반은 내 몫이 되고, 위자료와 보상금까지 합하면 받아낼 수 있는 돈은 상상 이상이 될 거야.’


머릿속으로 숫자를 하나씩 되새기며, 지금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겨우 달랬다.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참자.’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자, 눈가에 차오른 눈물이 겨우겨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결심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시간이 흐른 뒤 흘려야 할 눈물이 더 많아질 거란 사실을, 그때는 아직 알지 못 했다.


**


야외 예식장의 음악소리가 한층 밝아진 뒤 사회자의 상냥한 목소리가 하객들의 귀를 모았다.


“다음 순서는 신랑, 신부 맞절입니다. 신랑, 신부...맞절!”


버진로드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연두의 눈은 이미 눈물로 잔뜩 부어올라 있었고, 화장은 눈물과 콧물에 거의 다 지워진 상태였다.


멀리서 지켜보는 하객들 눈에는, 그 모든 게 그저 벅찬 감동의 눈물로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도 결혼은 큰 축복이었고,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라고.


‘그래, 모두 그렇게 믿겠지.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순간, 맞은편 신랑 쪽에서 낮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웁...”


신랑의 입꼬리가 억지로 눌린 채, 웃음이 스르르 새어나오고 있었다. 엉망이 된 연두의 얼굴이, 그에게는 웃음거리로만 보이는 듯했다.


연두는 그의 옆으로 몸을 조금 바짝 붙이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낮게 내뱉었다.


“그만 웃어. 내가 지금 뛰쳐나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 한마디에 고언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이 결혼식장의 분위기를 흔들어놨다.


“안 돼! 오빠 안 돼요!”


“프린스 오빠! 가지마요! 제발!”


얇은 펜스를 뛰어 넘어 몇몇 팬들이 결혼식장 안으로 난입해들어왔다. 낮게 깔려 흐르던 클래식 음악이 비명 소리에 잠겼고,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그들은 무자비한 소 떼들 갔았다.


“오빤 내꺼야!”


버진로드 위에서 서로를 밀치며 뒤엉킨 울음과 고성. 그때 고 회장의 목소리가 식장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하객 아니면 전부 막으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경호팀장의 다급한 대답이 뒤이어 들려왔지만 그 사이에도, 연두는 여전히 버진로드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 결혼식! 고언의 팬미팅이 아니라 나의 결혼식이라고!’


손에 들고 있던 하얀 은방울꽃 부케가 덜덜 떨렸고, 연두는 그걸 팬들을 막아내는 방패처럼 앞으로 휘둘렀다.

그 순간, 뒤엉킨 손들 중 하나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으아악! 내 결혼식이라고! 내 결혼식!허억...허억...”


신랑보다도 연두의 숨이 더 먼저 가빠졌고, 결국 먼저 풀려버린 건 다리였다. 시야가 흐려지면서 몸이 뒤집히더니 하늘과 천막 사이의 하얀 틈이 눈에 들어왔다.


“쿵!”


등허리 아래로는 차가운 바닥이 그대로 전해졌다.


“괜찮아?”


어딘가에서 신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숨이 안 쉬어져.”


허우적대는 숨 사이로, 옷이 어딘가에서 찢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욱- 북- 북-


결국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린 실크드레스. 찢어진 틈 사이로 그녀의 옆구리 살이 부끄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연두에게는 질식할 것 같은 압박과 동시에 참기 힘든 굴욕이 밀려왔다.


“그만 찍어! 그만 찍으라고!”


그녀가 절규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찰칵-찰칵- 차찰칵-


팬들의 대포렌즈들이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의 고언과, 그 옆에 쓰러져 있는 연두를. 그리고 터져버린 실크드레스의 흉측한 모습과 일그러진 얼굴, 난장판이 된 식장 풍경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고언은 황급히 턱시도 자켓을 벗어 연두의 상반신과 얼굴을 감싸줬다. 그러는 사이에도 카메라 셔터 소리는 더욱 빠르게, 그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아...망했다.’


연두는 두 눈을 꼭 감았다.


**


잊어버리고만 싶었던 결혼식은 생각보다 빨리 수습됐다.


조용히 다녀오기로 했던 신혼여행. 거의 무산될 뻔 했지만, 다행스럽게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목마저도 마치 007작전처럼 비밀스럽게 움직인 결과.


연두는 비행기 안에서 부어오른 눈을 선글라스와 안대로 번갈아 가리며 버텼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그제야 기절초풍 하듯 잠에 빠져들었고, 도착해보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만큼은 꽤 볼만했다.


와이키키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리조트의 스위트룸.


“여기 둘게.”


고언이 카드키를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무심히 말했다.


목소리는 끝까지 건조했고, 그의 말투에는 이후의 일정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겠다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내 방은 바로 앞, 1303호. 우리 가족 전용 리조트라 시끄럽게 구는 사람은 없을거야. 무슨 일 있으면 내 방문 두드리지 말고, 안내데스크에 전화해. 쉬는 데 방해받는 건 질색이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연두는 벌어진 입을 쉽게 다물지 못했다.


허울뿐인 허니문이라도, 적어도 식사 한 번은 같이 해주는 척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긴 하와이였다. 그런데 그의 태도는 늘 그렇듯, 무뚝뚝하다 못 해 까칠하기까지 했다. 그때, 고언보다 먼저 반응한 건 연두의 배였다.


꼬르륵-꼬르르르르륵-


고언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라고 그랬어?”


“아니.”


연두는 얼른 말을 돌렸다.


“밥은...어디서 먹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0번 눌러서 얘기해. 뭐든 갖다 줄거야. 지배인한테 말해놨어.”


“나가서 먹으면 안 될까? 바다도 보고 싶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귀찮음을 넘어선 짜증의 급물살.


“또 파파라치한테 사진 찍히고 싶어서 그래? 그 거지 같은 얼굴부터 잘 관리해야 할 것 아냐!”


그의 말이 칼날처럼 날아와 연두의 가슴팍에 꽂혔다.


“너 이제 평범한 여대생 아니야. 뭐...딱 3년 간이지만, 공식적으론 내 부인 아니야? 이건 나의 이미지도 그렇고 우리 그룹 전체의 이미지가 걸려있는 문제라고.”


연두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오히려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그 스캔들 기사, 당신이 뿌린거지?”


고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어디서 들었어?”


“결혼 전에 돌았던 기사. 스타트업인가 뭔가 때문에 급해서 그런거지? 그런데...그거 알아?”


연두는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이 결혼 못 하겠다고 언론에 떠벌리고 다니면, 당신도 부모님 지원 못 받아.”


고언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그 순간, 연두는 핸드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차가운 기계음 사이로,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말할게. 나 지금 부모님 지원...절실하게 필요해. 스타트업 하나 세우고 싶은데...결혼하자. 계약결혼.”]


“이게 뭐하는 짓이야!”


고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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