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드레스

4

일주일 뒤 상견례 날짜가 곧바로 잡혔고, 모든 일은 이미 계획돼 있었던 것처럼 척척 굴러가 버렸다.

강남의 한정식집 VIP룸.


연두는 문에 들어서기 전,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방 안에서 마주한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들.


고언의 부모님, 그 앞에 마주 앉은 자신의 부모님. 중학생 무렵 기억에서 그대로 멈춰 있던 아버지의 얼굴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도 회장님께서 우리 아이를 이렇게 예뻐해 주시고 아껴주셔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부족한 게 많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십 년 전 이혼으로 흩어진 가족의 잔해가, 오늘만큼은 임시로 봉합된 느낌. 연두는 자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알아채고, 얼른 상 아래로 감췄다.


‘아빠...’


고 회장은 ‘회장님’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회장님이라니. 이제 곧 사돈 될 사이 아닙니까? 호칭은 편하게 합시다.”


옆자리의 이명희 여사가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그래요. 자꾸 그렇게 부르면 저희가 오히려 불편해요.”


연두의 어머니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어디...”


말을 잇는 대신,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꼭 모아 쥐었다. 이 여사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사부인이 이대 무용과를 나오셨다고 들었어요. 제 동창 중에도 무용과 나온 친구가 있는데 혹시 아실까 해서요.”


연두의 어머니는 짧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졸업하고는 살림만 해서요. 동창회 같은 데는 나가보지도 않았어요. 이름을 말씀하셔도 아마....”


말끝이 조금 흔들렸다. 연두는 안쪽 볼을 살짝 깨물었다.


‘아슬아슬한데...내가 엄마한테 미리 말해 둔 설정은 여기까지인데...’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빈 잔을 기세 좋게 들어 올렸다.


“어쨌든 제가 작게나마 한의원을 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불편하신 데 있으면 말씀하세요. 바로 좋은 약으로 대령할 테니까.”


연두는 가슴 한가운데서 깊은 한숨을 삼켰다.


‘노인회관 돌면서 건강보조식품 파는 걸 한의원이라 포장하는 재능, 십 년이 지나도 여전하시네.’


“하하! 사돈은 당연히 무료 진료죠!”


연두는 남몰래 아버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빠, 제발 그만.”


속삭임에 힘이 잔뜩 실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씩 웃으며 딸의 손을 토닥였다.


“회장님이 널 마음에 들어 하셔서 다행이다. 잘 살아야한다.”


그 짧은 한마디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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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강남의 한 웨딩드레스 숍. 여직원이 피팅된 드레스를 손질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신부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요즘은 이 드레스가 가장 핫하긴 한데...”


“헙.”


연두는 배에 힘을 꽉 줬다.


‘핫하긴. 숨이 더 핫하게 막히겠네.’


벌써 열 번째 피팅. 단추는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벌어지고, 몸은 본능적으로 숨참기 모드에 돌입했다.

직원이 눈짓으로 신랑 쪽을 가리켰다.


“신랑분은 어떠세요?”


그때, 소파 끝에서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무거나.”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하며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고, 급히 전화를 거는 모양새였다.


“되는 대로 빨리. 난 회사로 들어가봐야 해서...”


연두는 눈을 꿈뻑거렸다.


‘아무거나? 결혼식이 당신 일정 사이에 껴 넣는 이벤트냐?’


그리고 그가 덧붙였다.


“많이 가리는 걸로 해줘요. 노출 없는 걸로. 괜히 이상한 드레스 입었다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거 질색이라.”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연두를 훑었다. 오로지 대문자 'T'의 눈, 감정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가리는 게 훨씬 낫네.”


연두의 손에 들려 있던 샘플 부케가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 부케를 고언 얼굴에 던지는 상상을 해봤다.


‘너 때문에 하는 결혼이잖아! 학교까지 찾아와서는 사람들 많은 데서 무릎 꿇고 쌩쑈했잖아! 그럼 오늘 같은 날은, 드레스 골라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어이없게도 그는 통화를 이어가며 문 밖으로 사라졌다.


“여보세요? 주주들은?...아니, 형식적 절차는 내가 맞출게.”


웨딩드레스 숍의 문이 닫히자마자 안의 공기가 더 적막해졌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비 신랑분, 꽤 보수적이시네요. 겉모습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연두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드레스 한 벌이 그의 선택을 받았다.


목까지 올라붙는 넥라인, 소매 끝까지 피부를 꽁꽁 감싼 새하얀 실크. 단추는 간당간당, 복부의 뱃살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숨 쉴 구멍은 남겨줘야 하는 거 아냐?’


고언은 옆에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출도 없고, 완전히 가렸네. 이걸로 하죠.”


연두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내 의견은...아무도 묻지 않는구나.’


밤벌레처럼 통통한 실루엣을 한 채, 그녀는 며칠 뒤 결혼식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


경기도 모처에 차려진 야외 예식장에는 클래식 연주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흰 천막이 살짝살짝 흔들렸고, 중앙에 장식된 크림색 장미가 짙은 향기를 뿜어냈다. 초대장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제한된 하객들만의 결혼식.


재벌가치고는 소박한 편에 속하는 규모였다.


그것은 최대한 결혼식 규모를 줄이고, 조용히 끝내자는 신랑측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하객석이 떠들썩한 가운데, 신랑 지인들이 다가와 고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이 자식. 소리 소문도 없이!”


“그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꽁꽁 숨겨놨으니, 스캔들이 날 리가 없지!”


식장에는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중에서도 고천석 회장의 웃음 소리가 가장 컸다.


“아하하하!”


커다란 웃음 뒤로 중간중간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 인력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행복해야 할 결혼식장에서 보이는 날 선 긴장감.


모두 하객으로 위장한 사생팬들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꺄아아!”


고 회장의 웃음소리가 커지던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터지며, 여성 몇 명이 결혼식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프린스 오빠! 결혼하지 마요!”


“왜 우릴 두고 가요? 왜!”


경호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우읍....”


그의 어머니가 서둘러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언아! 괜찮니?”


이마에는 벌서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괜...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유난 떨지 마세요, 이런 날.”


십 년 전, 산산조각 났던 무대와 어지러웠던 조명. 그때의 사고가 아직도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무대 붕괴 사고 이후, 고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성 팬들을 보면 공황 발작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실신까지했다.


고 회장은 얼굴을 굳힌 채 경호팀장에게 엄하게 일렀다.


“초대된 하객 외에는 전원 출입 금지시켜!”


“네, 알겠습니다!”


경호팀장은 고개를 깊히 숙였다.


**


그 시간, 연두는 신부대기실에 조신히 앉아 있었다.


“아...배고파 죽겠다. 뭐라도...한 입만 먹고 올까?”


그때, 문틈 사이로 흘러드는 구수한 냄새.


“킁킁...이거 스테이크 아냐?”


연두는 넓은 드레스를 양손으로 끌어올리고, 살금살금 문밖으로 나섰다. 복도는 비어 있었고, 그녀는 도둑고양이처럼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방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쪽에서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속은 어때? 물 더 줄까?”


그리고 그에 대답하는 건, 더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냐, 소화제 먹고 좀 나아졌어.”


연두는 돌아서서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둘이 여기서 왜?’


여자의 목소리가 살짝 들뜬 농담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새 신랑 된 기분은 어때? 좋겠지?”


남자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투자받으려면.”


말 끝에, 얇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럼 결혼식 끝나자마자, 회장님이 투자지원금 넘겨주시는거야?”


“아마? 어머니는 이미 결정하셨고, 아버지만 오케이 하면? 주주총회는 형식일 뿐이니까.”


‘주주총회?’


이 목소리는 분명 고언과 혜정의 목소리였다.


“언니...아니, 신부는 이 사실 알고 있어?”


“당연하지. 계약결혼이라고 이미 못 박았는데.”


‘계약...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더니.’


사전에 써 둔 비밀유지계약서. 그 위에 싸인했던 두 손으로, 연두는 드레스를 더 꽉 움켜쥐었다.

혜정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한 달 전 그 스캔들, 일부러 기사 뿌린 것도 알겠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고언은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아니, 그것까지 알면 일이 더 복잡해지지. 부모님들도 다 좋다고 하셨고. 적당한 먹잇감이 나타났을 때 바로 확실히 해두는 게 제일 안전하니까. 대중들한테 각인시키려면, 그게 제일 빠르고.”


연두는 어딘가가 베인 것처럼, 숨이 턱 막혀 버렸다.


‘먹잇감...이라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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