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봉투

2

그리고 말을 마친 그가 다른 봉투 하나를 더 꺼냈다. 이번엔 두께가 얇고, 겉면이 단단한 봉투였다.


“비밀유지계약서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예요. 혹시 사진이나 녹음 파일이 유포될 경우, 오늘 보수의 열 배를 배상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연두는 그가 꺼낸 문서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늘어선 글자들은 냉랭한 그의 얼굴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시선은 자꾸만 그 아래, 묵직한 봉투로 내려갔다.


하얀 봉투를 비집고 드러난 검은 숫자. 1 뒤에 0이 다섯 개.


묵직한 수표 다발에,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소개팅 자리만 채워주면 된다’던 부탁이, ‘봉투를 받으면 끝’인 거래로 바뀌는 데엔, 아주 짧은 시간만이 필요했다.


연두는 얼른 펜을 집어 들었다.


“싸인은...어디에 하면 되죠?”


그 순간, 연두는 고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감정의 무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눈.


어쩌면 그는, 인생이란 체스판 위에서 다음 수를 착실하게 옮기고 있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두는 그가 고른 체스판 위의 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시원스럽게 펜을 움직여 서명을 끝내고 잠시 계약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이 위로 지나가는 소리가 멎자, 고언이 무심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잡아채듯 손에 쥐었다.


“그럼 이젠 볼 일 없겠네요. 잘 가요.”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나갔고, 담담하게 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연두는 자리에서 멍하니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좋겠다. 취업 고민도, 돈 걱정도 없을테지? 세상 참 편하게 사네. 재수 없어.’


하지만 곧 그녀의 시선은 앞에 놓인 돈봉투로 옮겨갔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봉투를 열자, 반듯하게 정리된 수표 뭉치가 나타났다.


한 장씩 세어 내려가다, 연두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하나, 둘, 셋, 넷....헉! 삼십?”


돈을 세던 손길이 그대로 멈췄다.


“헉, 삼십?”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속물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두툼한 수표 사이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건 또 뭐야?”


바닥에 떨어진 건 명함 한 장. 연두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제일건설 경영전략팀 고언 상무.’


눈에 익은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연두는 명함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진짜! 재수 없어!”


그녀는 명함을 손에 꽉 쥐더니, 꼬깃꼬깃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다시 만날 일 없을 거야. 흥!”


분명 그렇게 말했지만, 가방 속에 남아 있는 묵직한 돈다발은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밀린 월세를 갚고, 얼마의 돈은 어머니께 송금했다.


오랜만에 어깨가 한결 가벼워져, 편의점에 들러 가장 비싼 와인 한 병을 골랐다. 그리곤 고시원 방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며, 연두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맛이구나. 돈이 주는 여유.”


붉은 와인이 입 안에 퍼지자, 오늘 하루의 일과 불쾌감이 잠시 희미해졌다. 하지만 잠시 뒤 술이 조금 오르자, 다시 머릿속에 ‘고언’이라는 이름 떠올랐다.


“제일건설 경영전략팀 고언 상무.”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검색창에 그 이름을 쳐 넣었다. 결과는 끝도 없이 쏟아졌다.


‘아이돌 출신의 유능한 인재, 열아홉에 밴드 어린왕자로 데뷔, 제일건설 회장의 외아들, 연예계 은퇴 후 경영 수업 이어가...후계자 구도 굳어지나?’


기사 제목들이 눈에 연달아 박혔다.


“아이돌? 그래서 그렇게 잘 차려입고, 잘난 척이었던 거야?”


연두는 중얼거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낯선 기사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그중 하나에서 눈이 멈췄다.


‘고천석 회장의 외아들, 고언 상무, 게이설과 정신 이상설에 휘말려...’


“으악! 뭐라고?”


연두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게이라고? 그럼 그렇지. 부모님이 억지로 결혼 시킬 생각이니까, 오늘 같은 일이 벌이진 거잖아!”


그녀의 눈빛이 무섭게 흔들렸다.


“젠장, 재수없게 걸린 게 나라니...”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벨렐레- 벨렐렐레-


발신자는 혜정이었다.


“야! 너!”


연두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고함을 질렀다.


“너 진짜 죽을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명랑한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 언니, 어땠어? 괜찮았어?”


“뭐? 괜찮기는 개뿔!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거든? 너 어디야?”


“그 오빠 집안 빵빵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야. 여자들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야! 그래도 게이를 소개시켜주면 어떡해!”


“뭐? 게이라니, 무슨 소리야. 아니야! 그 오빠 게이 아니야!”


“오늘 그 사람 부모님들까지 나와서, 나 엄청 곤혹스러웠다고!”


“정말? 난 몰랐어. 부모님까지 나온다는 말은 안 했는데? 오빠가 급하긴 급한가 보네.”


“야! 암튼 너 만나면 바로 니킥이야! 알았어?”


혜정은 연두의 성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언니, 나 오늘 면접 봤는데 잘 될 것 같아! JBC 아나운서 면접 있잖아. 2차 보고 왔는데, 최종 연락 받았어!”


“...뭐라고?”


“임원 면접만 남았어. 나 잘 할 수 있겠지?”


연두는 얄미움과 질투가 뒤섞인 감정이 목까지 차올랐다.


고위 공직자인 아버지와 대학 교수인 어머니. 든든한 집안과 넉넉한 환경, 촉망받는 미래. 연두는 혜정이 가진 것들을 하나도 갖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올라왔다.


혜정은 고언의 약혼자였다.


**


한 달 뒤, 연두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캠퍼스는 유난히 조용했고, 그녀는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나 고 상무예요. 시간 나면 연락줘요.’


그렇게 남겨진 문자는, 바로 수신 거부 목록으로 보내버렸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며 며칠을 버티자, 몸은 피로로 뻑쩍지근해졌다. 잠시 바람을 쐴 겸 도서관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저거 어린왕자 보컬 프린스 아니야?”


“대박! 기럭지 장난 아님. 수트빨 미쳤다!”


“꺄아, 세월이 지나도 저 얼굴이라니!”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로 붉은 스포츠카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 사람에게 꽂혔다.


연두는 그제야 그를 알아봤다.


“헉! 제일건설...고언 상무?”


차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언이었다.


그는 통화 중인 듯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곧 시선을 옮겨 군중 속에서 연두를 찾아냈다.


“어! 거기!”


연두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걱! 날 본거야?’


“서연두씨 맞죠?”


그의 눈썰미는 놀라웠다. 풀 메이크업에 원피스를 입었던 그날과 달리, 오늘은 늘어난 트레이닝복에 화장기 없는 얼굴, 떡진 머리.


연두는 삼일째 세수도 못 한 상태였다.


‘어떻게 날 알아봤지?’


“거기!”


고언이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연두는 순간 움찔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고,고언은 군중을 가르며 기꺼이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거기! 서.연.두. 씨!”


숨이 턱 막혔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맨얼굴과 초라한 차림새가, 그대로 노출되는 순간. 연두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잠깐! 아악!”


“거기! 서연두씨! 거기 서!”


그가 뒤에서 쫓아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젠장, 재수 없어!’


연두는 도서관 뒤편 쪽으로 몸을 날리듯 뛰어갔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숨은 목구멍에서 끊어질 듯 거칠어졌다. 속도가 살짝 느려지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긴 팔이 후드티를 낚아채며 몸이 휘청였다.


“잡았다!”


고언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전화는 왜 안 받아요?”


‘너 같으면 받겠냐고!’


연두가 속으로 소리쳤지만,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모르는 번호라서...”


“문자는? 봤어요?”


“시험 때문에...무음으로 해놔서...”


말을 얼버무리는 사이, 고언이 순식간에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수신 거부 전화, 스무 통...안 읽은 메시지도 열 개? 도대체 날 왜 차단한 거예요?”


연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핸드폰 돌려줘요! 얼른요!”


간신히 휴대폰을 되찾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며칠 동안 기다린 줄 알아? 삼일 내내 도서관 앞에서 당신만 기다렸다고!”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몰려들었다. 연두는 창피함과 분노가 뒤섞여 고개를 푹 숙였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방해될까 봐.”


고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낮게 내뱉었다.


“거짓말하는 사람, 난 딱 질색인데.”


연두의 속이 뒤집어졌다.


‘뭐? 거짓말? 질색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하지만 그때, 고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우리...결혼해야 될 것 같은데...”


“...네?”


연두는 숨이 멎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 너무도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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