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여행 온지 14일 차다.
저기 그림에 보이는 잔에는 오렌지 술이 담겨 있다. 카우치서핑 호스트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는데 처음 맛은 그냥 독한 술인데 끝에 오렌지 향이 난다. 오렌지향이 자꾸 나를 유혹하고 유혹에 넘어갔더니 숨결에서 오렌지 향이 난다.
와이파이를 이용해서 야구 기사를 보고 있는데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오더니 자꾸 나를 쳐다보길래 그림을 그리는 걸 눈치챘지만 말을 걸면 산통 깨는 것 같아서 모르는 척했다. 거의 다 그렸을 때 아는 체를 하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처럼 영어나 중국어를 하면 좋겠지만 내 이런 마음을 고마운 상대에겐
"Thank you very much", "谢谢"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은 내 마음을 차분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해준 것은 네 이름 옆에 한국 이름을 써넣는 것은 어떠냐고 하면서 어떻게 쓰는지 알려준 것뿐이다. "이 사 영"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부끄럽다. 21살이 돼서야 알게 된 것이 너무 부끄러운 것 같다. 이제야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20살 이전에 간 여행들은 부모님이나 고모, 어른들이 도와주셔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터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도 내가 돈을 모아서 간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역시 나 혼자 해낸 것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사람들과 유대관계로 이루어진 사회 안에서 단절된 혼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도움을 청하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듯이 도움을 받았다. 이 그림 또한 그렇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 대가 없이 받는다는 것이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내 마음을 떼어주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성도라는 도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시켜준 Jade, 내가 가져온 김과 소주를 맛있게 먹어주면서 파티를 열어준 여러 친구들, '네가 원하면 여기서 계속 지내도 돼. 내가 하이킹 갔다 온 후에도 이 집에서 너를 봤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준 두 번째 카우치서핑 호스트 piao piao, 나를 식구로 대해준 piao piao의 룸메이트, 구채구 가는 버스 안, 나 혼자 한국인이라고 이해할 때까지 우리가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말해준 가이드, 그에 대해 동의해준 관광객들(이것 때문에 나는 버스 앞에 서서 한국 노래를 불러야 했다), 내 주변 옆에서 내가 이해를 할 때까지 천천히 말해준 친구들 (그것마저도 안되면 핸드폰을 꺼내 번역기를 돌려줬다) 그리고 맛있는 저녁과 맥주를 사주며 번역기를 돌려서 'My treat'이라고 서툴게 말하던 yiyi.
그렇게 많이 받은 후에야 내가 베풀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내 떼어진 마음을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 카우치서핑 호스트 sying li를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해준 게 오직 그녀의 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발음하는 것을 알려준 것뿐이었는데 아침을 준비해주고 저녁을 사주고 잠자리를 제공해줬다. 오늘은 300원 우리나라 돈으로 54000원짜리 저녁을 호스트 엄마, sying li,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먹는데 사려고 하길래 안 받는다는 걸 무시하고 억지로 주머니에 100원을 넣어줬다.
여행자, 즉 고생을 하더라도 그 고생마저 즐거운 이기적인 여행자를 상대로 일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도와줬다. 마치 '넌 그럴 권리가 있어'라고 하듯이. 지금 나는 그들에게 내가 가진 것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밖에 할 수 없다. 한국 이름을 말해주고 한국 음악을 같이 듣고 내 가치관을 공유하고 서로를 웃기는 것. 이럴 때마다 내 마음을 떼어주는 기분이다. 내 마음을 자꾸만 주게 되는데 자꾸 주기만 하고 채우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 마음은 텅텅 비어 버려 메마른 사람이 돼버릴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만 감사하는 것 같지만 나는 나에게 무언가를 준 모든 사람들을 얘기하고 싶다. 엄마 뱃속에서 1년, 그리고 태어나서 20년을 살면서 부모님과, 같이 태어난 동생들에게 가장 많은 것을 받았고 내 마음을 그들에게 떼어줬다. 계속 내 마음을 떼어주기만 했다. 이제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은 9일이고 나는 14일 날 한국에 도착한다. 우리나라에 도착하면 나는 내 떼어진 마음을 다시 채워나갈 것이다. 우리 가족을 정말 많이 사랑할 것이다. 우리 가족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채울 것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베풀 것이다. 고마움을 느끼는 그들의 마음으로, 내 떼어진 마음을 채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오기 전에 솔직히 설레는 마음은 없었다. '여태까지 내가 한 여행처럼 잘 갔다 오겠지'라고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카우치서핑을 이용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 건지, 맥도날드에서 노숙하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서 감사함을 느껴서 인지, 2주일 만에 침대에서 자서인지, 전 여행들과 달리 좀 더 감사함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이번 해는 나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휴학을 했다. 내 뜻을 이해한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남들의 관점에서 보면 '전공 공부도 안 하고 1년 놀았네'라고 생각하겠지만 혼자 많이 성숙한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보고 동생이 장난스럽게 변태, 저질이라고 놀렸는데 괜찮다. 변태로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퍼즐처럼 엉켜있는데 그중에 '감사함', '베풂'이라는 퍼즐을 맞춘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