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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화 Feb 05. 2020

작가 김유정이 사랑한 두 여인

          -- 김유정 & 박녹주 & 박봉자

           

                                 

  ★ 불운의 벗,  작가 김유정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 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 점순네 수탉(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작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 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 김유정(金裕貞: 1908, 1, 11∼1937, 3, 29)의 작품 일부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어리숙한 소년인 '나'와 시쳇말로 '발랑 까진' 동갑내기 지주 딸 '점순'의 기싸움에 내내 지루한 줄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렇게 명랑하고도 리얼하게 일제시대의 농촌 현실을 고발한 천재 작가 김유정. 하지만 대부분의 예술가가 병마와 가난과 사투를 벌였듯 그 또한 병마와 가난의 그림자를 비켜가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29년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그는 가난과 병마, 외로움, 실연의 고통 등 인간사 모든 불행을 어깨 위에 짊어져야 했던, 철저히 소외된 불운의 사내였다.


★천석꾼의 아들에서 가난한 말더듬이 멱서리가 되기까지.'


작가 김유정은 1908년 강원도 춘성군 실레(오늘날의 남춘천)에서 2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천석꾼 지주 집안이었고 서울에도 백 칸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어서 때때로 서울과 본가를 오가며 살림을 할 만큼 부유했다. 친가는 물론 외가까지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문 세도가였다. 장남을 낳은 후에 내리 여섯을 딸만 낳은 터라 귀염둥이 막내아들이었던 유정은. 외가는 물론 이웃 사람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는, '멱서리'라는 아명으로도 불리었는데, 그의 부모님이 막내아들을 얻은 기쁨으로, 재산을 모으고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로 붙여줬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부를 누려보지도, 불혹을 넘겨보지도 못했으니 '멱서리' 란 그의 아명이 오히려 반어적인 의미로 들려 씁쓸하다.

어린 시절, 그는 붙임성도 좋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아주 쾌활하고 밝은 아이였다. 어린 김유정에게 인자하고 따뜻한 어머니는, 즉 강건하고 굳건히 기댈 수 있는 수호천사와도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리만큼 초년 운세가 좋아서 신의 시기라도 받은 것일까? 그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 엄마가 필요한 나이인 7살에 제 수호천사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설상가상으로 9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그 뒤를 이었다. 돈을 물 쓰듯 쓰는 방탕한 큰형 탓에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 많던 누이들도 모두 일찍 시집을 갔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사랑만 받았던 부잣집 도련님은 이제 떠돌이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눈칫밥을 얻어먹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불우한 성장기를 거쳤기 때문에 가난한 농촌 소작농들의 삶의 애환을 토속적이면서 해학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흔히들 김유정의 문학을 '들병이 문학'이라고도 한다. '들병이'란 소위 집시, 즉 남편이 있는 여자가 시골 주막을 돌아다니며 술을 팔고 매춘을 하는 것으로써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들병이의 남편이 아내를 매음시켜 생계를 꾸리는 것도 부족해 그것을 되려 즐기기까지 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김유정도 젖먹이가 딸린 들병이 여자에게 구애를 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여성에 대한 집착.


 당시 지식인에 속했던 그가 한낱 들병이 여자한테 마음을 줄만큼 유독 여성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오늘날로 치면, 스토커라 불러도 좋을 만큼 자기 마음에 한번 든 여자한테는 물불을 안 가리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의 내면에 품은 '그리움' 은 모두 일찍 여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내지는 환상'이었다고 스스로도 인정했다.

한창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할 나이에 방임된 채로 자란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점차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그 후유증으로 말더듬이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유년시절 풍요로운 가정환경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어린 김유정에게 어머니란 존재의 상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연이은 아버지의 죽음과 가세의 몰락은 어린 김유정을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결핵에 걸려 병마와 가난의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싫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게 좀 더 적절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주위의 인물을 경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버릇이 결국에는 말없는 우울을 낳습니다.>(김유정,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에서)


★작가 김유정의 마음을 앗아간 두 여인.


 김유정은 늘 어머니의 사진을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그것이 결국 연상녀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서 목욕탕에서 나오는 한 여인의 청초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그녀의 화장기 없이 창백한 얼굴과 반듯한 윤곽이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바로 두 살 연상(네 살 연상이었다는 설도 있음)의 판소리 명창 박녹주(朴綠珠: 1906∼1979)였다. 당대 최고의 명창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박녹주는 당시에도 콜롬비아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하는 등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즉, 가난뱅이 작가 지망생이 감히 언감생심 들이댈 상대가 아니었다. 김유정은 당시만 해도 그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첫눈에 반한 그는 그 날 이후부터 가슴앓이를 했다. 당시에는 전화도, 이메일도 없었으니, 밤이면 밤마다 그는 박녹주에게 연애편지를 쓰며 자신의 사랑을 전했다.


<저는 연희 전문에 다니는 김유정이라 합니다. 당신을 연모합니다. 이렇게 당돌하게 편지를 쓰는 걸 용서해 주옵소서. 제 연모의 정을 부디 받아주옵소서.>


편지를 읽은 박녹주는 당황했다.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생년한테 편지질이나 하다니……. 생각 끝에 그녀는 편지를 다시 봉해 되돌려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그녀의 사진을 레코드판에서 오려 붙여서 다시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계속되었고, 어느 날엔가는 그녀의 집 마당에 앉아서 목놓아 통곡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녀의 아우까지 친구로 삼아 그녀의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나중에는 혈서로, <녹주, 내 너를 사랑하노라.>라고 쓴 편지를 매일같이 보냈다. 그러나 박녹주는 스토커처럼 질긴 그의 애정공세에 흔들리지 않았다. 김유정보다 두 살이나 연상인 데다가 기생이었던 박녹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하였다.


 '난 기생이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질을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주시오.' (박녹주,「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박녹주에 대한 짝사랑은 그렇게 제 풀에 지쳐 흐지부지 끝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인 1936년 여름, 그는 다시 짝사랑의 상대를 찾았다. 바로 여류작가 박봉자. 그녀는 '떠나가는 배'로 유명한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이었다.


 결혼 상대자를 변호사에서 문학가로 바꿨다는 그녀의 글을 보고 나서 용기를 얻은 김유정은 오로지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박봉자에게 무작정 연애편지를 날마다 보냈다. 그러나 박녹주처럼 그녀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수개월에 걸쳐 서른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와 구인회 동지인 문학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했다. 김유정은 또다시 그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살고 싶다……그러나 가난에 꺼져간 한 예술가의 영혼 


 그는 가슴에 실연의 상처를 안고 낙향해 농촌 계몽 운동과 작품 집필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결핵과 늑막염이 악화되었고, 세상을 뜨기 열 하루 전인 3월 18일,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편지를 안회남(본명: 필승)에게 보냈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이토록 살고 싶어 했던 한 예술가의 생명을 모진 가난의 굴레가 갉아먹은 듯해 절로 숙연해진다. 

러시아에는 톨스토이 역이 있듯 우리나라 경춘선에는 '김유정역'이 있다. 김유정역에서 5분 거리인 남춘천 실레마을에는 '김유정 문학촌'이 그가 말년을 보낸 생가와 함께 잘 보존돼 있다. 기념관에는 김유정의 생애와 작품, 그가 짝사랑했던 두 박 씨 여인의 사진 등 유물이 전시돼 있다.


 소설가 김유정, 그는 고통으로  얼룩진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농민문학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한국 문학사의 리얼리즘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서 그의 문학사적 평가는 남북 양진영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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