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 장군님은 현재 현충원이 있는 아산에서 자라신 것으로 압니다만, 서애 유성룡 대감님에 의해 처음 장수로 발탁이 되었다지요. 7년 전쟁 임진왜란(1592년~1598) 을 극복하게 한 양측이 된 두 분이신데요. 유성룡 대감님과는 어떤 인연이셨어요?
이순신 : 껄껄. 세 살 위 동네 형아였어요. 그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사대부가(家)의 뼈대 굵은 관찰사 대감님댁 도련님이셨어요. 온 고을에 총명함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서책벌레 모범생이셨는데, 스물 다섯에 과거에 급제하셨지요. 사실 집안 신분이 서로 다르다 보니까 어릴 적에 그 분과 친하게 어울린 건 아니었는데, 마을을 지나다니면서 활쏘기며 개구지게 노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신 것 같소.
인터뷰어 : 유성룡대감님이 남기신 임진왜란의 기록서, 즉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어린 시절의 장군님을 인상 깊게 회고하셨는데요.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다. 성품 역시 영특하고 활달하였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라고요. 장군님이 어려서부터 명장의 기질을 타고나신 듯합니다.
이순신 그런 모양이오. 그런데 사실 좀 위험하게 놀았던 것 같아서 살짝 부끄럽기도 하오. 자기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고, 특히 나뭇가지를 깍아 만든 활로 그의 눈을 겨누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행위임을 후대 분들도 잘 기억해두길 바라오. 그리하면 안되는 일이오. 아무튼 내가 유성룡 대감한테 많은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오. 무능한 임금 선조와 시기심이 하늘을 찌르는 조정 대신들의 모함을 받아 내가 위기에 처하고 모진 고초를 겪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걸 내걸고 기꺼이 내 편에 서서 나를 지지해주었소. (중략)
인터뷰어 : 그해 6월, 한양과 평양마저 왜군에 함 락당하고, 선조는 평안북도 의주까지 쫓겨 피란을 갔지요? 장군님은 선조임금을 개인적으로 어찌 평가하십니까?
이순신 : 신하된 도리로 임금을 감히 평가하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나, 지금은 나도 그도 이승에서의 신분이 사라졌으므로 이 한마디는 정말 하고 싶소. 선조는 정말 더럽게 무능하고 덕이 없는 임금이었소. 그는 유성룡으로, 이이로, 나로 이름만 대면 후대 사람들이 다 알만한 유능한 신하들을 많이 거느렸을 정도로 타고난 인복이 매우 좋았으나, 그 인재들을 제대로 이용할 줄을 몰랐소. 무엇보다 신하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의심과 시기로 그들의 진을 뺐소. 간신과 충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두운 눈을 가진 임금이었기에, 나라가 왜 에 짓밟히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불행했소.(중략) 한 달 넘도록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고, 백의종군하며 남해안으로 가던 직후에 나는 어머니 부고를 받았소. 나라를 지키고자 했지만, 결국 나는 내 어머니 임종마저 지키지 못했소. 흔히 임금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지 않소? 하지만 선조는 임금의 자리에 걸맞는 리더십을 갖추지 못한 못난 양반이었소. 한마디로, 임금 자리에 어울리는 그릇이 아니었소. (중략)
-<한국의 역사 인물 가상인터부집 (홍지화 저/ nobook/ 2021)> 안, 이순신 편 중에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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