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란 것은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이다.
경험은 통상 생각하기에, 과거에 행한 행동을 통해 얻게 된다지만
현재시점에서 볼 땐 지금 현재와, 이미 지나버린 찰나의 과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경험을 얻는다.
또한 미래시점으로 볼 땐, 이미지트레이닝을 통해 미리 경험을 하기도 하고, 책이나 이미 경험한 자의 강연 또는 영상 등을 통해 경험을 체득할 수도 있다.
어느 예능프로에서는 오은영 박사(이하 오)께서 패널(이하 패)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수학점수를 적어보세요"
패: "그게 질문인가요? 그게 기억이 날 리가 있나요?"
그러자, 오은영 박사는 다시 질문한다.
오: "학생시절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졸음과 싸우며 열심히 공부하려 노력하던 때가 단 한 번이라도 있나요"
패: 모두 손 번쩍
이렇듯 우리 사회(특히 한국에서!) 대부분 삶은 점수, 즉 결과를 중요시하여 본인 스스로와 부모 자식 간, 회사 및 사회 나아가 국가끼리도 이를 중시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경험(과정)이 나를 지탱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 과거와 현재, 미래에 있는 그 점수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필자는 어릴 때, 예-체능을 참으로 좋아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고, 노래 부르기도 즐겨했고, 빠르게 달리는 것을 좋아해서 달리기도 곧잘 하고 자전거 타기 등 바퀴 달린 것을 매우 좋아했었다.
이를 눈여겨본, 피아노 선생님을 업으로 삼았던, 그리고 가곡 부르기를 참 좋아했던 어머니 덕에, 4살 차이 나는 형은 피아노를, 나는 바이올린을 전공할 수 있었고 우리 형제는 전교에서 꽤나 유명했던 “음악하는 형제”로 알려졌다.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부모님이 투자해 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배울 수 있게 보장을 해주셨다. 덕분에 인생의 다른 부분에서의 철은 결코 들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힘들게 지원해 주셨으니 포기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해보자” 하는 해당 부분의 감각기관을 만들고 다듬을 수 있었다.
한편, 앞선 예체능 지원을 위해 맞벌이하던 부모님 덕에
아무래도 나에겐 자율이라 불리는 방치시간이 생겨, 사실 공부보다는 또래 아이들과 정말 많이도 놀았다. 매일같이 방과 후 바이올린 레슨이 끝나면 스트레스를 전부 해소하겠다는 양 매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비비탄총을 사서 친구들과 군인놀이도 하며 살았다. 남산 근처에 살던 터라 남산꼭대기에서부터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활강하다가 크게 다쳐보기도 하고 차에 부딪혀 차주에게 크게 혼나기도 하고 배상을 위해 눈물 젖은 소중한 돼지저금통을 깨는 등 별별일을 다 겪었다.
방황스런 초중학교 시절을 거쳐서는, 용산에 부유촌에 해당하는 지역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정말 다양한 유형과 집안에서 자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이 학교는 내가 선호하는 지망고교에는 아예 없는 학교였으나, 그 시절 뺑뺑이라고 불리는 랜덤 배정을 통해 아쉽게 당첨되고 진학하게 되었다.(공부를 못한 건 아니었는데... 운명이었을까?)
처음에는 많은 친구들과 같이 진학하는 특정 고교에 가지 못함에 17세 인생이 여기서 망하는 줄 알고, 어머니와 선생님 앞에서 이럴 거면 고등학교는 다니지 않겠다느니, 차라리 검정고시를 보고 얼른 대학에 가겠다느니 되지도 않는 서러움을 토로하며 슬퍼했지만, 혼자 며칠 밤낮을 고민하고 그리고 남녀공학이라는 물음표와 내면에 설득에 또 이끌려 한번 입교를 스스로 결정했다.
그렇게 외톨이처럼 시작한 고교시절이지만, 또 나름 잘 적응해 보려 애썼다. 친구가 아무도 없던 나였지만 남자는 축구하나로 친해진다는 크나큰 장점과 체육시간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교과과정으로 지정해 준 학교덕에 초중시절 경험했던 나의 취미가 빛을 발했다. 그 와중에 또 여자사람도 사귈 수 있도록 연극동아리 가입해서 연극판에 주연으로도 활동했다. 명동에서 전국 연극대회에 나가 우리의 희극연기를 선보였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는 대학에 입학했고, 이후에는 또 초등학교 때 총 들고 군인놀이를 했던 기억 때문인지, 그놈의 탑건의 톰 크루즈 때문인지 군 간부가 해보고 싶어 간부모집에 응했다. 그렇게 한바탕 또 국방을 지키며 인생을 즐기다 지금은 2~30년째 매년 미래에 유망한 직종이라는 IT계열에 몸담고 있는 내가 되어있다.
음악을 들을 때는 그 음악이 만들어질 때의 시대적 감성, 작곡자와 연주가의 마음을 되네이며 음악을 오감으로 느끼며 들을 줄도 알게 되었고 집에서는 그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며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하고,
인라인을 미친 듯이 타던 경험으로 인라인 선수선발에 추천을 받아보기도 하고, 이와 비슷한 운동인 스피드스케이트도 할 수있어 상무팀 선수들과 비슷한 실력을 겨뤄보며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얻은 다양한 인맥은 아직도 나에게 종종 도움이 되고 또 도움을 주기도하는 대상들이고, 군에서의 혈기왕성한 동년배 대한민국 군인청년들을 교육하고 지휘하고, 밤을 새며 나라를 지켜본 경험은 남들 앞에서 자신있게 설 수 있는 경험과 포기하지 않는 것, 임무를(목표를) 완수하는 것을 취할 수 있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나는 현재와 미래를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늘 그렇게 내가 하고 싶었던 것. 그 당시에 해야만 할 것을 해왔다. 남들 대부분이 하는 모양새 좋은 K-학생이나 K-사회인으로서는 살지 못했으나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매번 다양하고 하고 싶은 걸 해보던 그간의 경험으로 나는 꽤나 다채로운 인간이 되었고, 나 자신에게 신뢰감이 쌓여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고 뭐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을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10가지 크레파스 모음처럼 자란 나는 그렇게 남들에 뒤쳐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대단하지도 않지만 건강히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사회에 나갈 성인이 되기 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인으로서 사람간에 해야 할 것(지향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지양할 것)을 충분히 배워놓아야 둥글둥글해야 하는 사회에서 모나지 않게 나로서 건강히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은 반드시 그 나이 때 경험해야만 하는 그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들어 그제야 그 경험을 해보려 한다 한들 완성도나 행복도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부모포함)가 시키거나 남들다하는 그런 의미 없고 재미없는 경험이 아닌, "내가" 꼭 해보고 싶고 진취적으로 경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매번 본인의 자양분이 되어 나에게 다양한 색을 발휘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골고루 갖게 된 이는 E와 I, S와 N, T와 F, J와 P의 구분이 결코 두드러지지 않더라.
최근 연애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비슷한 외모와 비슷한 재력의 사람들이 여럿 나오는 공통점이 있지만, 매번 인기 있는 그 누구는 무엇인가가 남들과 다르다. 도전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매력이 있거나 남들과는 달랐던 그들의 경험치로 인해 자신감이 넘쳐 상대의 말을 잘 들을 줄도 알고, 분위기가 안 좋으면 말을 줄이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어필이 말과 행동, 눈빛, 향기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은 공부와 직업만으로 표현할 순 없고 경험을 토대로 매력과 카리스마가 존재해야만 하며, 그게 곧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된다. 남들과 똑같은 얼굴과 마음, 외모, 직업으로는 그 사람은 할머니집 콩나물시루에 있는 대가리만 노랗고 길쭉하게 자란 멋없는 콩나물로만 자랄 뿐이다. 부디 그대가 유니크하게 자라나 민들레 홀씨처럼 훨훨 날아 산에서도 자라고 바위틈새에서도 예쁘게 잘 자라길 바라본다.
그렇게 살아도 실패한 인생은 없을 거라 단언한다. 사실 인생이 실패한다는 범주라는 것조차 없으니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주인공 라일리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내면이 성장해 나간다. 기쁨과 슬픔, 부끄러움, 화남을 적절히 겪으며 "라일리"라는 인간으로 성장해 사회에 나오게 되고, 가족과 사회는 내면과 외면이 건강한 라일리를 두 팔로 받아들여 더욱 잘 자랄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는 저 영화를 깊게 공감하고 디즈니 애니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에 대한 증명으로 이번에 “인사이드 아웃 2”가 개봉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