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일곱. 헝가리, 부다페스트 (1)
은혜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였다. 석 달 동안의 터키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은혜가 있었다. 당시 은혜는 승연이라는 자신의 동갑내기 친구와 여행 중이었고 역시 이스탄불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우연히 같은 숙소에 묵게 된 나와 그녀들은 우연찮게도 우리의 귀국 날짜가 같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함께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섯 달쯤 지난 후, 서울에서 재회한 은혜와 승연에게
"더블린에 놀러 와. 그럼 기네스 두 잔 사줄게."
라는 말을 남긴 후 나는 더블린으로 떠나온 터였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일 년 하고도 여덟 달쯤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갑자기 은혜에게서 '언니를 보러, 더블린에 가겠어요!'라는 연락이 왔다.
내가 놀랐던 것은 은혜가 나를 보러 오기로 한 날부터 딱 이틀 후에 나 역시 한 달 반의 여행을 떠날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단 한 마디의 상의도 하지 않았건만 정확히 같은 시기에 각자의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은혜는 더블린에 8월 말에 도착해서 9월 2일 영국으로 떠날 계획이라 했고, 나 역시 9월 2일에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떠날 예정이었다. 만약 은혜가 단 며칠이라도 늦게 더블린에 들를 계획이었다면 나는 그때 그 도시에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은혜는 정확하게, 내가 일을 그만두고 그래서 그 지옥 같던 스케줄에서 벗어나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나를 찾아왔다. 덕분에 우리는 더블린에서의 여유로운 이틀을 함께 보낸 후, 9월 2일 또 한 번 각자의 짐을 싸서 더블린 공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헤어졌던 우리가 재회한 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서로의 일정을 확인하다가 계속해서 미묘하게 어긋나던 우리의 일정이 결국 부다페스트에서 겹치게 된다는 걸 확인한 후 기쁨의 탄성을 지른 참이었다. 물론 혼자 하는 여행은 즐겁지만, 그 여행이 길어지면 틈틈이 동행도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그 동행이 내가 좋아하는 동생이라면 당연히 그 기쁨이 커질 수밖에 없다.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로 넘어가는 데는 무려 일곱 시간 사십 분이 걸렸다. 일찌감치 프라하를 떠나는 버스를 탔음에도 저녁 늦게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나는 잔뜩 지친 얼굴로 숙소를 찾아갔다. 다행히 숙소는 도하니 거리에 있는 유대교 회당 바로 앞에 있어 찾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제 좀 짐을 풀고 쉴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내 앞에 짠- 하고 은혜가 나타났다.
은혜는 그 날 아침 일찍 부다페스트에 도착해서 나보다 조금 먼저 여행을 시작한 터였다. 저녁쯤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나는 '도착하면 연락할게. 저녁이나 같이 먹자!'라고 얘기해 두었다. 그런데 은혜는 내 숙소 이름을 듣고 그곳을 찾아내 나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해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반가움이 두 배로 커진 나는, 얼른 체크인을 끝낸 후 은혜와 함께 다시 부다페스트의 거리로 나섰다. 둘 다 저녁을 먹지 않은 터라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맥주도 한 잔씩 시켰다. 부담 없이 라거를 주문하니 헝가리의 대표 맥주 중 하나인 '소프로니'가 나왔다. 그렇게 맛있는 맥주가 아니었건만. 곁에 은혜가 있어서 그랬을까? 나는 이 맥주를 너무 맛있게 마셨다.
부다페스트는 도나우(Donau) 강 서쪽의 부다(Buda)와 '옛 부다'인 오부다(Obuda), 그리고 동쪽의 페스트(Pest) 지역이 합쳐져 만들어진 도시이다. 이 도시의 역사는 무려 서기 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판노니아(Pannonia) 지방에 로마군의 주둔지였던 아쿠인쿰(Aquincum) 성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부다페스트의 출발점이다. 900년 경, 이 지역에 오늘날 헝가리인들의 조상인 마자르(Magyar)인들이 들어와 판노니아와 도시를 점령했고, 그로부터 1세기 후에 헝가리 왕국을 세웠다.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아 페스트 성은 파괴되었다. 이후 재건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몽골군이 물러난 후 당시 국왕이었던 벨라 4세는 페스트가 아닌 부다를 헝가리의 수도로 삼았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부다와 페스트는 수도의 자리를 잃어버렸고 자연스럽게 그 성장 또한 지체되었다. 1526년에는 페스트가, 1541년에는 부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후 부다는 오스만 제국 총독의 주류지가 되었다. 그 시기에 페스트는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686년, 오스트리아에 점령당했다.
18세기에 접어들어서야 페스트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빠른 속도로 성장을 시작했다. 그러다 1848년 빈 체제 반동으로 혁명의 소용돌이가 헝가리 왕국을 덮쳤다. 1849년에 들어선 혁명 정부는 부다와 오부다, 페스트의 행정 통합을 추진했으나 얼마 안 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다가 1867년, 합스부르크와 헝가리의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의 자치 정부가 들어섰고 드디어 세 지역은 ‘부다페스트’ 지역으로 합쳐졌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동맹국에 가담해 패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헝가리는 독립을 이루었고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1940년대에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던 20만이나 되는 유대인이 대학살을 당했다. 게다가 1944년 겨울에는 부다페스트 공방전(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독일에게서 벗어나려던 헝가리와 이를 막은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투)으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부다페스트에는 헝가리 공산 정부가 들어섰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부다페스트는 재건되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1987년에는 '부다페스트, 도나우강안과 부다성'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부다' 지역과 동쪽의 '페스트' 지역이 각자의 고유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이 도시는 지금까지도 '도나우 강의 진주' 또는 '동유럽의 장미'라고 불리며 그 아름다운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저녁, 간단한 식사와 맥주를 한 잔씩을 나눠 마신 나와 은혜는 다음 날 아침 다시 유대인 회당 앞에서 만났다. 안타까웠던 것은 숙소를 나서자 은혜보다도 빗방울이 먼저 나를 맞이한 사실이었다. 프라하에서는 내내 날이 좋았는데, 그 행운이 부다페스트로까지 이어지진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단 여행을 시작한 우리는 각자 우산을 받쳐 들고 도나우 강 쪽으로 향했다. 먼저 페스트 지역을 둘러본 후, 부다 성(Budai Vár)으로 올라가 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건 '성 이슈반트 대성당(Szent István-bazilika)'이었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의 초대 국왕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인 성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성당으로, 부다페스트 내 최대 규모의 성당이다. 이곳에는 성 이슈트반의 오른쪽 손이 오늘날까지도 미라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대성당은 1848년에 기공식을 가졌으나 헝가리 독립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1851년 다시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1868년, 폭풍이 불어닥치면서 대성당의 돔이 날아가버렸다. 이후, 1906년에야 공사가 끝이 났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을 나와서 길을 따라 쭈욱 걸어내려가면, 도나우 강이 나타난다. 독일어로는 도나우 강, 영어로는 다뉴브 강이라 부르는 이 강은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독일 남부에서 발원하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평원을 지나 부다페스트에 이르는 강이다. 하류에 이르면 저지대인 루마니아 남부의 왈라키아 평원을 지나 결국 흑해로 유입된다고 한다.
페스트 지역에서 부다 지역으로 넘어가려면 도나우 강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강을 세체니 다리(Szecheny Lanchid)를 걸어 건너기로 했다.
세체니 다리는 도나우 강을 가로질러 놓인 최초의 다리로 1849년에 개통되었다. 다리 이름은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이자 이 다리 건설의 주요 후원자였던 ‘세체니 이슈트반’에서 따온 것이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거의 교류가 없던 부다와 페스트가 하나로 통합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다리이다. 또한 380m의 케이블로 이어진 수천 개의 전등이 밤이 되면 도나우 강을 밝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밤을 밝히는 수천 개의 전등이 마치 사슬을 엮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Chain Bridge'라고도 불린다. 이 다리는 카를 교처럼 보행자 전용 다리는 아니지만, 양 옆으로 인도가 마련되어 있어 걸어서 건너는 데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다리 건너, 저 멀리 언덕 위로 보이는 건축물이 바로 부다 성이다. 부다 성은 성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바르 헤지(Var-hegy)'에 자리 잡고 있다. 세체니 다리를 건너면 아담 클라크(Adam Clarke) 광장이 나오고 이 광장에서 케이블 카를 타고 바르 헤지로 올라갈 수 있다. 걸어서 올라가는 길도 있고, 그리 먼 거리가 아니기도 하지만 (내려올 때는 잠시 비가 그쳐 있어 걸어서 내려왔다) 비 속에서 그 길을 걸어 올라가고 싶지는 않아 그냥 케이블 카를 타기로 했다.
그렇게 바르 헤지에 오르면 이번에는 세체니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먹구름 가득한 회색빛 하늘 아래서도, 부다페스트는 아름답다.
바르 헤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부다성은 도나우 강가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1242년, 헝가리 중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벨라 4세는 몽골의 내습을 피해 도나우 강변으로 피신해 왔다. 그때 그는 이곳에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성과 겸하여 요새를 건설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부다성이다. 이후, 여러 번 증개축되었고 19세기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왕궁의 대부분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대개축을 했으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다시 큰 타격을 입었고 1956년에는 헝가리 혁명 때 소련군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다 성은 1980년대 재건한 것이다.
이렇게 고난의 역사를 거쳐온 부다성은 현재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비와 바람과 추위에 지친 우리는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원래는 계획에 없던 이 국립미술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헝가리의 국립미술관에는 11세기부터 현재까지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서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 2층에서는 19세기, 3층에서는 20세기 그리고 4층에서는 현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외부만큼이나 내부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사실 전시 내용이 그렇게 특별하진 않으므로 헝가리 또는 헝가리 미술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들어가길 권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부다성을 나온 우리는 다시 걸어서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를 찾아갔다. 마차시 성당의 정식 이름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13세기, 벨라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고 1479년에 마차시 1세에 의해 증축되었다. 마차시 1세 왕가의 문장과 그의 머리카락이 이 성당의 남쪽 탑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이곳은 '마차시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차시 성당은 제 조국 헝가리처럼 많은 수난을 겪은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1541년, 부다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이 마차시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고 벽면도 이슬람 고유의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한 식민 지배가 끝난 후에야 마차시 성당은 다시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축되었고 19세기 말에는 성당 본래의 자태를 갖출 수 있도록 당초의 고딕 양식 대부분을 되찾았다.
마차시 성당이 위치한 언덕으로 올라오면 그 주변 모두가 볼거리이다. 여전히 역사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거리를 괜스레 둘이서 오르락내리락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비에 젖어 반질반질한 거리 위에 마차시 성당이 희미하게 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웬일인지, 비 내리는 부다페스트가 좋아졌다. 손에 든 우산은 너무나 귀찮고, 카메라 안으로 빗방울이 스며들까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신발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속에서 젖어가고 있는데도, 나는 비 내리는 부다페스트에서 기분이 좋아진다.
마차시 성당보다 내가 더 마음에 들어한 것은 바로 '어부의 요새(Fisherman’s Bastion)'였다. 이 어부의 요새는 마차시 성당 앞에 세워진 전망대인데, 이 곳에 서면 도나우 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신 고딕 양식과 신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이 건축물은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국회의사당과 함께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주인공이다.
1905년에 완공된 '어부의 요새'는 실제 요새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며, 요새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다만 도나우강의 어부들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이곳을 보호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일곱 개의 돌로 된 탑과 여러 개의 통로로 이루어진 이 건축물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자고 성채가 이토록 아름답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의 가파른 계단과 테라스, 그리고 원뿔 모양의 탑은 모두 새하얀 석회암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눈이 쌓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부의 요새는 거닐고, 성터에 걸터앉아 쉬고, 그 앞으로 흐르는 도나우 강의 경치를 감상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다. 일찌감치 이곳에 올라온 사람들은 성벽 이곳저곳에 걸터앉아 부다페스트에 해가 지기를 기다렸고, 나와 은혜 역시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 한참이나 도나우 강을 바라보았다.
사실 부다페스트에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이곳을 '유럽의 3대 야경'이라거나 농담 삼아 '야경 깡패'라고들 했지만, 나는 그런 말들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면 자자할수록, 그 도시가 어쩌면 내 기대감을 무참히 짓밟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바로 얼마 전에 내가, 프라하에서 그토록 불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다페스트는 내 눈에도 아름다웠다. 추웠고, 비가 내렸고, 그래서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부다페스트를 '충분히 아름다웠던 도시'로 기억한다.
한참을 어부의 요새 성벽에 걸터앉아 있다가 날이 캄캄해지기 직전 그곳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세체니 다리를 건너다가 다리 위의 사자를 만났다. 사실 헝가리라는 나라가 사자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헝가리는 그보다 약하고 그래서 그보다 더 자주 상처 입은 나라였다. 그래도 그런 헝가리를 이 사자가 지켜줄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도시가 더 오랫동안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말이다.
1. 아담 클라크 - 헝가리로 귀화한 영국 건축가로 세체니 다리를 설계했다. 세체니 다리 앞의 광장은 그의 이름을 따 '아담 클라크 광장'이라 부른다. 광장 뒤쪽에는 백여 년 된 터널이 있는데 이 터널 또한 아담 클라크가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