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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29. 2017

Budapest. 반짝반짝 빛나는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일곱. 헝가리, 부다페스트 (2) 



그런 도시가 있다. 그곳까지 애써 찾아간 내 정성을 모른 체하고, 만날 때부터 헤어질 때까지 맑은 하늘 한 번을 안 보여주는 도시. 당연히 그런 도시에서는 멋진 여행을 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여행의 하루하루가 즐거웠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날씨이니까. 물론 스페인 정도를 제외하고는 유럽의 날씨라는 것이 대부분 거기서 거기인지라, 내내 화창한 날씨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다 해도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하루 정도는 맑은 날을 보여주어도 괜찮을 텐데. 모스크바와 바르샤바, 그리고 부다페스트는 그 조그마한 친절을 베풀어주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셋째 날, 도나우 강변의 신발을 보러 왔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셋째 날, 역시 또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만난 나와 은혜는 도나우 강가에 놓여 있는 신발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 그 신발들이 보고 싶어.'라는 내 말에 다행히도 은혜는 '그럼 거기로 가봐요.'라고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폴란드에서 시작해 독일과 체코를 지나온 이번 여행은 의도치 않게 유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이 되고 있었다.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의 피해가 워낙 극심했고 또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이 폴란드에 있다 보니 '홀로코스트'하면 폴란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나치 독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유태인들은 유럽 전역에 존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유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은 폴란드, 소련, 헝가리 및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유럽 지역이었다. 특히 헝가리는 전체 인구 대비 유태인의 비율이 높은 나라였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이 약 900만 명이었는데, 그중 600만 명의 유태인이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한다. 헝가리에 살던 유태인들도 당연히 그 끔찍한 일을 피하지는 못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던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이들이 헝가리에서부터 끌려갔다. 


그런 피해를 입은 국가인 만큼, 헝가리에는 유태인 학살과 관련 있는 건축물이나 그 비극적 사건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많이 남아있다. 유태인 학살과 관련된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내가 머물던 숙소 앞에 있던 '도하니 거리의 유대인 회당'이다. 이 회당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 회당)이다. 부다페스트에 살던 유대인들의 생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이 시나고그가 나치 독일 하에서 하필이면 유태인 수용소로 탈바꿈한 것은 참으로 슬픈 역사이다. 1944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2,000여 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이 회당에 갇혀 배고픔과 추위로 죽어갔고 그들은 이 회당 뜰에 가매장당했다고 한다. 




도나우 산책로의 신발 - 출처: visitbudapets.travel. 사진: Phil Watkins



그 도하니 거리의 유대인 회당을 지나, 도나우 강가로 나오면 또 다른 유태인 관련 조형물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도나우 산책로의 신발’이다. 도나우 강변의 산책로에 뿌려진 약 60여 쌍의 낡은 신발은 1944년~1945년에 걸쳐, 헝가리 파시스트들에 의해 살해되어 강에 버려진 유태인들을 기리는 것이다. 당시 헝가리 파시스트들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신발을 벗게 하고 사살한 뒤 강으로 시체를 집어던지는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헝가리의 영화감독 캔 토가이(Can Togay)와 조각가 둘라 파우에라(Gyula Pauer)가 이 작품을 만들었다.


사실 벗어놓은 신발이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실질적인 죽음이든, 상징적인 죽음이든 누군가가 벗어놓은 신발에서 죽음을 읽게 되는 것도 우리네 문화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 도나우 강변에 놓인 낡은 신발들을 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하나같이 다 도나우 강 쪽을 바라보며 놓여 있는 이 신발의 주인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헝가리의 국회의사당


이 신발들 뒤편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부다페스트 야경을 책임지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건축물,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서있다. 유럽에는 볼만한 국회의사당 건물이 많은 편이지만, 헝가리의 국회의사당만큼 아름다운 국회의사당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이 국회의사당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회의사당이라고 불린다. 1884년에 건설을 시작해 1904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우뚝 솟아있는 중앙 돔을 중심으로 양옆의 수많은 첨탑과 아치들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다. 건물의 길이는 무려 268m, 폭은 123m, 내부에는 10개의 마당과 691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헝가리 국회의사당의 전경 - 출처: www.parlament.hu

  

여행자들도 내부를 둘러볼 수 있지만 가이드 투어를 통해야만 한다. 분명히 둘러볼 만한 곳이었을 텐데, 어째서 이 투어를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당일 표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나와 은혜는 이 건물 안으로 잠시 들어가 입구만 빙빙 둘러보다가, 우리나라 국회의사당도 한 번 구경해봐야겠다는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의 남자. 어째서 이 남자가 이곳에 앉아있는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밖으로 나왔을 땐 비가 좀 그쳐 있길 바랐건만, 여전히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왠지 모를 의무감으로 영웅 광장(Heroes' Square)을 둘러보러 갔지만, 둘 다 별다른 의욕 없이 그곳에 세워진 동상들은 휘휘 둘러보았다. 부다페스트가 마음에 들었지만, 계속되는 비와 바람 속에서 기운을 내기가 힘들었다. 결국 우리는 마침 우리 앞에 나타난 카페에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기로 했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헝가리안 커피


그래서 들어온 국회의사당 앞 카페. 메뉴를 둘러보다가 헝가리안 커피를 주문했다. 헝가리에 왔으니까 헝가리안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다. 맥주가 여행을 더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커피 또한 여행에 소소한 재미를 불어넣어 준다. 특히 이웃해 있는 나라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커피 문화가 발전한 것을 지켜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그래서 내 앞에 놓이게 된 헝가리안 커피는 조금 독특한 모습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고 카페인의 진한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셈이다. 이 커피를 각자의 입맛에 맞게 마시라고 물과 함께 내놓은 모양이다.  





도나우 강변에서 만난 ROSKOVICS, Ignác의 동상


그렇게 카페에 앉아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있자니 몸이 조금 녹았다. 그제야 지난 이십여 일간의 각자가 거쳐온 도시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사진도 구경하고, 그 카페 내부가 예뻐서 카페 사진도 좀 찍다가, 빗방울이 조금 약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도나우 강변을 걷다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동상을 만났다. 물론 사진을 찍을 때까지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화가인가 보다 싶었다. 나중에 그 이름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남자는 1854년에 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1915년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한 헝가리 화가라고 한다. 주로 역사화나 풍속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동상 속의 그 역시 세체니 다리를 그리고 있다. 




부다페스트에는 이상하게도 동상이 참 많다. 이것은 Kiskiralylany(어린 공주)의 동상.


그리고 ROSKOVICS, Ignác의 동상 바로 옆에, 또 하나의 동상이 트램의 레일에 걸터앉아 있다. 이 동상의 이름은 Kiskiralylany. 누군가의 이름은 아니고 Little Princess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뜻을 찾아보기 전까지 나는 이것이 어떤 소년의 동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쓰고 있는 모자의 모양새 때문에 피터팬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 어린 공주가 어째서 이런 모양으로, 어째서 이 강변에 앉아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부다페스트에는 유난히 동상이 많구나, 생각을 하며 우리는 '겔레르트 언덕(Gellert Hill)'을 향해 걸었다. 

 




원래 우리가 가고 싶었던 곳은 바로 저 겔레르트 언덕이었다.


겔레르트 언덕은 부다 성과 함께 부다페스트를 내려다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했다. 지난 저녁에는 부다 성 쪽에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겔레르트 언덕에서 이 도시에 밤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성 겔레르트의 석상(Szent Gellert)'이 자꾸 이곳까지 올라와 보라고 나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래서 


"언니, 저기 꽤 멀어 보여요."


라는 은혜의 말에도 나는 고집스레 겔레르트 언덕 쪽으로 한 발 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겔레르트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는 1.5km 정도의 급경사 계단과 숲길을 걸어야 했다. 그 사이 빗방울은 굵어졌고 바람은 더 거세졌다.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맨발에 샌들을 신은 채 걷고 있던 나는 한참을 걸어 겔레르트 언덕 앞에 도착한 후에야 문득 '저 언덕을 올라서 대체 무엇을 보겠다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 순간부터 말없이 내 뒤를 따라 걷고 있던 은혜의 얼굴에도 똑같은 회의감이 실려 있었다. 


"버스를 타고 저 근처까지 가는 방법도 있다고 하던데."


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 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날씨에 부다페스트 시내가 잘 내려다보일 리도 없는데, 처음부터 겔레르트 언덕을 가자고 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깟 자유의 여신상이 뭐라고. 헝가리 입장에서는 식민 시대의 치욕스러운 기억일 뿐일 텐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겔레르트 언덕을 바로 앞에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건 그런 이유였다. 은혜가 나 때문에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건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고, 그러니 이것은 우리의 점심 겸 저녁이 될 터였다. 은혜는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나왔다 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 헤어지면, 이 동생을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겔레르트 언덕을 올라가는 게 뭐가 그리 의미가 있겠는가 싶었다. 그보다는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는 것이 훨씬 더 의미가 있을 듯했다. 




또 하나의 헝가리를 대표하는 맥주, 드레허(Dreher)


그래서 적당한 식당을 골라 점심 같기도 하고 저녁 같기도 한 식사를 한 후, 바치(Vaci Street) 거리를 걸어 내려왔다. 그 거리를 눈으로 휘릭 휘릭 훑으며 우리는 그나마 사람이 덜 붐비는 펍을 찾아 들어갔다. 이번에는 첫날 마신 소포로니와는 다른 드레허를 골랐다. 소포로니, 보르소디(Borsodi)와 함께 헝가를 대표하는 맥주라는 드레허는 다행히도 깔끔한 맛이 꽤 마음에 드는 맥주였다.  




내가 좋아하는, 벽화가 있는 풍경


은혜의 여행도 나의 여행도 40일이 넘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어깨에 무거운 짐을 가득 짊어진 채 유럽의 나라 나라들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떠돌기 시작한 지 20일쯤이 지났을 때 부다페스트에서 만났으니, 여행의 한가운데서 잠시 쉼표를 찍은 셈이었다. 춥고 바람이 불고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데도 부다페스트를 마음에 들어 한 건, 이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사실 나에게 '쉬는 시간'을 선사한 은혜의 존재가 그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여행을 하는 도중 나는 종종 그 여행을 지겨워할 때가 있다. 여행을 그만두지도 못하면서 종종 여행하기를 싫어하는 나를 보면, 과연 내가 정말로 여행을 좋아하긴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런 내 변덕스러운 기질 때문에 때때로 어떤 도시들은 이유 없이 나에게서 냉대를 당하기도 한다. 힘들고 외롭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이 여행이 지겨워지는 순간, 때마침 내가 도착한 도시가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도 도는 양 심술을 부리곤 하는 것이다. 




이 도시는 밤이 되면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난다


하지만 은혜를 만난 이 부다페스트에서 나는 그 지친 마음을 한 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시작할 참이니 앞으로의 여행은 또 그럭저럭 괜찮을 터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혜는 내 옆에서 재잘재잘 흥겨운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냥 어린아이 같아서 다음날 아침에는 또 새벽차를 타고 자그레브로 이동한다는 은혜를 이번에는 내가 숙소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2년 여 년 전 이스탄불에서, 1년 6개월 여 전 서울에서, 20일 전 더블린에서 만났던 은혜와 이제 부다페스트에서 헤어질 참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 동생을 또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언제 어디서든 이 아이가 또 내 인생에 운명처럼 휙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은혜와 가볍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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