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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31. 2017

Wien. I Love Your Kiss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여덟. 오스트리아, 빈 (1)



오스트리아에는 가고 싶은 도시가 많았다. 빈(Wine), 잘츠부르크(Salzburg), 인스부르크(Innsbruck) 그리고 할슈타트(Hallstatt). 처음에는 그 모든 도시들이 내 여행루트에 속해 있었다. 그 도시들 중 무려 세 도시를 포기한 건,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자금 속에 그럭저럭 효율적인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참아가며 세 도시를 포기하는 동안에도 마지막까지 빈은 내 여행루트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 도시를 다녀오지 않으면, 마치 이 여행이 결코 완성되지 않기라도 할 것 같은 간절함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1년 전, 빈을 다녀오면서 그는 내게 두 가지 선물을 내밀었다. 첫 번째 것은 특이한 재질로 만들어진 동그란 팔찌였다. 그는 그것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팔찌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책의 하드커버로, 그 자리에서 직접 만든 팔찌라는 것이었다. 물론 난 그 팔찌가 마음에 들었다. 별로 예쁘지도 않고, 그래서 직접 차고 나간 적도 없지만, 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결코 사 오지 않았을 선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선물은 클림트의 그림이 그려진 책갈피였다. 그는 그 책갈피를 건네며 클림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그가 해준 이야기들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그를 좋아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도 끝까지 모르는 척하며 흥미롭게 들어줄 만큼 말이다.




그런 그와 첫 번째 이별을 한 지, 넉 달 반쯤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괜찮았지만, 가끔은 그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여행을 시작할 때 빈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건넨 클림트의 책갈피가 여전히 내 책 속에 끼워져 있었으니까. 그 책갈피를 볼 때마다 나도 클림트의 도시에 가보고 싶었으니까.





구스타프 클림트 작 <베토벤프라이스>를 소장하고 있는 '빈 분리파 전시관'


부다페스트에서 빈까지는 꼭 세 시간이 걸렸다. 버스를 타고 열심히 달려 국경을 넘었는데, 빈에 도착하니 이곳에도 여전히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었다. 유럽이 서로 역사를 공유하고, 산과 강과 바다를 공유한다는 것이 새삼스레 실감 났다. 그렇게 유럽 전체가 한 나라 같으면서도 국경을 넘을 때마다 제각각 다른 풍경과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신기해서 유럽 여행을 멈추기가 힘들다는 것도 말이다. 


빈에 도착한 후 새로운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슈테판 광장(Stephansplatz)으로 향했다. 빈 여행은 이 광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슈테판 광장에는 빈 대교구의 대성당인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이 우뚝 솟아 있어 찾아가기 어렵지 않다. 이 성당은 빈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 건물로 그 역사적 의미와 함께 다양한 색상으로 꾸며진 지붕 타일 덕분에 빈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빈에서만은 성당을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보통은 그 도시에 도착한 후에야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고민하는 편인데 빈에는 도착하기 전부터 가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래서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 나는 슈테판 대성당을 휘익 둘러본 후, 계속 도시의 남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슈테판 광장에서 나오던 길에 만난 빈 국립 오페라 극장(Wien Staatsoper)

 

빈은 도나우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빈이라고도 하고, 비엔나라고도 부른다. ‘빈’은 독일식 명칭이며, 비엔나는 영어식 명칭이니 어느 쪽으로 불러도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오스트리아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만큼, 나는 이 도시를 빈이라고 부르는 걸 더 좋아한다.


빈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원시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15년에 로마군이 이곳에 전선 기지를 세우고 ‘빈도보나(Vindobona)’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빈의 기원으로 본다.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800년대 후반에는 마자르족(보통 헝가리 민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이 빈을 통치했으며, 900년대 후반에는 독일 황제 군이 빈을 정복하였다. 1273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점이 되었지만, 막시밀리언 1세가 수도를 인스부르크로 옮기면서 잠시 수도의 위치를 상실하기도 했다.


1529년과 168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지만 가까스로 도시를 지켜냈다. 이것이 바로 동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차 빈 포위와 2차 빈 포위이다. 그러다 1805년과 1809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나폴레옹에게 굴복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한 뒤인 1920년대에는 좌파 사회민주당의 거점 도시가 되어 ‘붉은 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38년~1945년에는 나치 독일에 합병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인 ‘빈 공세’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1945~1955년에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승전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군정의 공동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55년에 들어 영세중립국임을 선언하면서 겨우 외국의 통치에서 해방되었고, 빈은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의 수도가 되어 지금까지 그 역할을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의 빈은 인구 200만 명이 안 되는 도시지만, 한때는 제국의 영화로운 수도였다. 때문에 이곳에는 역사적 유물과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위에서 이야기 한 슈테판 대성당과 국립 오페라 극장을 위시하여 호프부르크 궁전, 쇤브룬 궁전, 자연사 박물관과 예술사 박물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인 빈 악우협회의 대강당 그리고 벨베데레 궁전까지 넘쳐나는 문화유산 때문에 빈의 중심지인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하는 이곳에서 내가 가장 먼저 보기로 한 것은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이었다. 사실 이 궁전에 들르기 위해 굳이 빈까지 온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부다페스트를 떠나 빈으로 달려오는 동안, 이 궁전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뛴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더는 그 만남을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


   



상부 벨베데레 궁전의 모습. 이 궁전과의 만남을 더는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


벨베데레 궁전은 유럽 역사에서 가장 탁월하며 성공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인 사보이 가의 왕자 오이겐(Eugen von Savoyen)의 여름궁전이었다. 당시 왕가는 1697년, 부지를 사들인 후 거대한 공원을 조성하였고 1714년 건축을 시작하여 1716년 완공하였다. 이 건물이 현재의 '하부 벨베데레 궁전(Lower Belveder)'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상부 벨베데레 궁전(Upper Belveder)'이 완성되었는데, 중앙 정원이 궁전의 축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현재의 벨베데레 궁전은 중앙 정원을 가운데 두고 그 이름처럼 위쪽에는 상부 벨베데레 궁전이, 아래쪽에는 하부 벨베데레 궁전이 위치해 있다.


원래 '벨베데레'란 이탈리아어로 '좋은 전망의 옥상 테라스'를 뜻하는 건축 용어로 바티칸이나 유럽의 여러 궁원에도 벨베데레가 존재한다. 하지만 빈의 벨베데레 궁전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별다른 수식 없이 그냥 벨베데레라고 하면 빈의 벨베데레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상부 벨베데레 궁전에서 바라본 중앙 정원과 하부 벨베데레 궁전


빈의 벨베데레 궁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긴 하지만, 매해 넘쳐나는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라는 존재 때문일 것이다. 이 궁전은 클림트의 회화 컬렉션에 충실하기로 유명하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빈의 다양한 미술관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클림트를 좋아하는 여행객으로서는 그 다양한 미술관을 다 둘러봐야 하는 고충을 겪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클림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키스(The Kiss)>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벨베데레 궁전이다.

 



벨베데레 궁전에 들어서자, 대표적인 그림의 위치가 표시된 궁전의 약도를 건네주었다. 슬쩍 펴보았더니 클림트의 <The Kiss>는  상부 궁전의 2층, 서쪽 전람실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약도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후,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보았다. 빈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곧바로 <The Kiss>를 향해 달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애써 그 존재를 모른 체하고, 마음을 꾹꾹 누르며 괜스레 다른 곳들부터 둘러보았다. 그렇게 1층 전체와 2층의 동쪽 전시실부터 둘러본 후에야, 천천히 서쪽 전시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몇 장의 클림트의 그림들을 만났고, 클림트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작품도 만났다. 나는 에곤 쉴레의 그림들이 좋았고, 그래서 천천히 그곳을 거닐며 그림 한 장 한 장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마음은 계속, 널뛰듯 두근두근거렸다. 저쪽 어디선가 사람들의 낮은 감탄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내 마음도 계속해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벨베데레에서 만날 수 있는 클림트의 또 다른 대표작 <유디트(Judith)> - 출처: 구스타프 클림트의 온라인 전시회

  

그러니까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전부터 그곳에, 바로 그 자리에 그 그림이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림을 둘러싸고 선 사람들의 무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방은 다른 방들보다 조금 더 조도가 낮았고, 그 속에서 <The Kiss>는 반짝반짝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저 빛이,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바로 그 그림의 빛이라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그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괜히 다른 쪽 벽에 걸린 다른 그림들 앞을 서성였다. 눈 앞에 유디트(Judith)와 프리차 리틀러(Fritza von Riedler)가 걸려 있었다. 분명 그 그림들은 아름다웠건만,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 두근거림을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그림들도 볼 수 없을 거란 걸 인정하고, <The Kiss> 앞으로 다가갔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일  <The Kiss> - 출처: 벨베데레 공식 사이트 www.belvedere.at


물론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클림트의 <The Kiss>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사된 그림이라고 하니까 그만큼 다양한 곳에,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다. 나 역시 이 그림을 수도 없이 보았고 이 그림에서 쏟아져 내리는 금빛 가루에 시선을 빼앗긴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눈 앞에서 직접 본 <The Kiss>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키스'와도 같지 않았다.   


예전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그림을 눈 앞에 둔 채 마주 보고 서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는 여자가 남자의 키스를 거부하고 있는 건지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남자의 목을 감싸고 있는 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목을 저렇게 감싸 안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저것은 오히려 남자가 떠날까 봐 애절하게 붙잡는 듯한 손짓 아니던가.


물론 사람들은 하나의 그림에서 수백 가지 다른 것들을 본다. 하지만 내가 이 그림에서 본 건, 다른 어떤 그림도 내게 보여주지 못한 '사랑'이었다.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아무런 해석도 내놓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보통 그림 속 남자는 클림트 본인이고 여자는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ege)'라고 해석한다. 에밀리는 클림트의 평생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클림트의 동생이 결혼할 때 그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났다는 설도 있고(두 사람은 사돈지간이었다), 클림트가 에밀리의 그림 선생님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열일곱 살의 나이 차는 있었으나,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림트의 여성 편력은 그 당시에도 굉장히 유명했다. 그는 많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가졌으나 그들 중 누구와도 오랜 기간 연인으로 지내지 않았다. 하지만 에밀리는 오랫동안 클림트의 곁에 머물렀으나, 한 번도 육체적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에밀리가 클림트에게 특별한 존재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클림트가 그린 에밀리 플리게


클림트는 총 네 번, 에밀리를 그림으로 남겼다. 하지만 클림트가 그린 에밀리는, 그가 그렸던 다른 여인들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유명한 그가, 에밀리만은 평범하고 정숙해 보이는 여인으로 나타냈다. 그가 보는 에밀리가 그런 여인이었기 때문인지, 또는 에밀리가 그런 여인이기를 그가 바랐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에밀리는 클림트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평생 동안 클림트 곁에 머물렀다. 죽음을 앞두었을 때, 클림트가 부른 이름 역시 바로 에밀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클림트가 죽은 후, 열네 명이나 되는 이들이 클림트의 친자임을 주장하고 나섰을 때 이를 해결하고 그들에게 유산을 분배해준 이도 에밀리였다. 결국 에밀리는 마지막까지 독신으로 지냈음에도 사후에 플리게 가족 무덤이 아닌 클림의 묘 옆에 묻혔다. 



   


이런 사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그들이 서로를 사랑한 연인 사이였는지, 아니면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 사이였는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어떤 사이였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관계가 우리가 아는 특정한 단어들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때, 꼭 한 가지 마음으로 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내가 궁금한 것은 그저 그림 속의 남자가 그림 속의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그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을까? 사랑하고 있다면 어째서 두 사람은 지금 저 순간이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절해 보일까? 남자는 어째서, 절벽 앞에 여자를 세워둔 채 키스하고 있을까? 저 키스가 끝난 후에 남자는 여자를 절벽에서부터 구해주었을까, 아니면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을까?





 벨베데레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


그렇게 한참을 그림 앞에 서 있다가, 그 방을 나와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찬찬히 3층 전체를 둘러본 후, 상부 벨베데레를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The Kiss>를 보러 갔다. 그런데 그 사이 사람들이 사라지고, <The Kiss>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오롯이 혼자가 되어, 그림을 마주하고 서 있자니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림에 대해서라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 평생을 '언어'와 '문자'로 이루어진 것들에 천착하여 살았는데. 어째서 이 그림 앞에선 이토록 마음이 아플까. 한참을 생각했지만, 결국 그 답은 찾지 못한 채 그곳을 나왔다. 

 





벨베데레 궁전은 그 컬렉션도 훌륭하지만, 중앙정원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곳이다.


그렇게 상부 벨베데레를 나와 하부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했다. 상부 벨베데레만큼의 인지도가 없을 뿐, 그곳도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조금 열의를 잃었다. 무엇을 더 보더라도 그것이 내 뇌리 속에 오래 남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결국 휴식이라도 가지듯 느릿느릿 하부 벨베데레를 둘러본 후 궁전을 빠져나왔다. 빈에 도착해 한 일이라곤 벨베데레 궁전을 둘러본 것뿐인데, 어느새 도시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 클림트의 도시에 와 있으니까. 그를 만나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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