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여덟. 오스트리아, 빈 (2)
빈에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잠에서 깼다. 그래서 이 이른 아침에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일단 커피를 한 잔 마시러 가기로 했다. 비엔나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메뉴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가벼운 라떼로 모닝커피를 대신한 후 빈에서의 둘째 날을 시작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빈에서 클림트의 작품을 다 보려면 적잖은 시간과 돈이 든다. 클림트의 그림이 오스트리아의 미술관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많은 미술관과 건물들 중 어느 곳을 갈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때문에 한참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에 가기로 결정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체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자이자 조각가였던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이 되던 해인 1876년, 빈 응용 미술학교에 입학한 이후 정식으로 회화 교육을 받았다. 1883년, 학교를 졸업한 이후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Ernst Klimt), 동료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세웠는데 이 당시만 하더라도 지극히 전통적인 사실적 화풍을 보여주었다.
클림트의 초기 작품을 보고 싶다면 왕궁 극장(Burgtheater)이나 미술사 박물관을 들르는 것이 좋다. 1883년, 클림트는 고작 21세였지만 정부에서는 이 젊은 화가에게 자신들의 역사적인 건물인 왕궁 극장의 벽화를 의뢰했다. 이곳에 클림트가 그린 벽화는 그 예술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이후에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느낌을 준다.
미술사 박물관의 벽화에서는 이보다 한층 더 독특해진 기법을 엿볼 수 있다. 클림트는 이 미술관의 중앙 벽 꼭대기에 벽화를 그렸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클림트는 그리스 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사를 표현하기 위해, 각각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을 이 벽화에 그려 넣었다.
1892년, 클림트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바로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이었다. 이에 충격받은 클림트는 한 동안 거의 붓을 들지 않았다. 이 시간이 클림트의 예술 세계에 어떤 변화를 주었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었을 때 그는 이전과 달리 상징으로 가득 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교육부가 클림트에게 빈 대학 강당의 천장 벽화를 의뢰했던 사건은 꽤 유명한 일화이다. 이때 클림트는 한동안 교류를 단절했던 프란츠 마치와 다시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마치는 강당 천장의 중앙 부분과 신학 부분을 작업했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빈 대학 강당에 걸리지 못했다. 여성의 나체들로 가득 채워진 클림트의 작품을 보고 분노한 교수들이 위원회를 소집한 후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후, 이 그림을 현대미술관에 전시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클림트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미리 받았던 돈을 돌려준 후 작품을 거두어갔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그림들은 전쟁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
1896년,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분리파(Secession)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그다음 해에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분리파는 세상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고전적인 예술만을 고수하는 아카데미 학파를 반대하는 진보적인 화가들의 모임이었다.
1898년 3월에 개최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났고 이후 클림트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그 해 분리파는 자신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빈 분리파 전시관이다.
클림트의 상징주의 작품 중 최고라고 손꼽히는 '베토벤 프리즈'를 보고 싶다면 빈 분리파 건물을 찾아야 한다. 이 그림은 베토벤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에 대한 해석이라고 한다. 제체시온(Secession)이라 불리는 이 분리파 건물은 굳이 찾아가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찾아가게 되는데, 건물 위에 올려진 황금색 월계수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동그란 황금색 월계수를 보는 순간, 그것이 빈 분리파 건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자연스레 클림트를 떠올랐다.
하지만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를 떠난다. 분리파 이념을 버렸다기보다는 권력화 된 분리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클림트는 자신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1903년,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를 두 차례 방문하는데 이때 황금 모자이크를 접한 후 금색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시기적으로는 <유디트 I>을 그린 때부터 <유디트 II>를 완성한 1909년까지를 클림트의 황금기로 본다.
클림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또 하나의 미술관으로는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을 꼽을 수 있다. 이 미술관은 클림트의 작품뿐 아니라 대규모의 에곤 실레 컬렉션을 갖추고 있으니, 에곤 실레의 작품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쪽으로 발길을 돌려보는 것이 좋겠다.
56세가 되던 해인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때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고 하는데, 미디는 바로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이때 급하게 달려온 에밀리는 다음 달 클림트가 숨질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다른 이름 있는 화가들과 달리, 클림트는 생전에는 인기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50여 년 동안에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의 작품이 다시 급부상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재발견된 클림트의 존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 이전에도 클림트 이후에도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린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들 중 대체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빈 미술사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 서 있는 이 미술관은 파리의 루브르, 마드리드의 프라도에 견줄 만한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관으로 클림트의 작품 외에도 뛰어난 회화 컬렉션을 갖추고 있다.
이곳은 자세히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5유로를 추가로 더 내고 오디오 가이드를 받았다. 영어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할 때, 추가 요금 없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함께 받을 수 있다. 다만 한국어 설명은 없는 작품이 더 많으므로 두 가지를 함께 이용해야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헝가리 화가 문카치가 그린 천장화이다.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 비를 피해 들어갔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만난 적이 있는 화가의 그림을 빈에 와서 다시 보니 괜스레 반갑다.
이 박물관의 1층은 고대 그리스 로마, 고대 이집트의 조각과 응용 미술을 전시하고 있다. 뛰어난 회화 작품들은 2층에서 만날 수 있는데,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한쪽은 네덜란드와 독일 회화관으로 루벤스와 렘브란트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고 나머지 한쪽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회화관으로 라파엘로와 카라바조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유명한 카페가 하나 있다. 작품을 둘러보느라 지친 다리를 쉬어가기도 좋고, 아름다운 돔 천장 아래에서 한껏 기분을 내며 커피 한 잔 마시기에도 좋다.
사실 이 미술사 박물관을 둘러본 후엔, 시간이 괜찮다면 자연사 박물관도 들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한 층을 둘러보는 데만도 세 시간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 결국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걸음을 빨리 급히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2층까지 모두 둘러본 다음에는 폐관 시간이 가까워서야 겨우 이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쯤 되니,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멍해졌다. 살면서 그림을 보느라고 이렇게 진이 빠져본 적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커피가 한 잔 필요할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찾아낸 카페에서 드디어 비엔나커피를 주문했다.
이 비엔나커피의 본래 이름은 아인슈패너 커피(Einspanner Coffee)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위에 차가운 휘핑크림을 듬뿍 얹은 커피인데, 이 대조적인 조합 때문에 진한 커피의 쓴맛과 크림의 단맛을 둘 다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비엔나커피까지 마신 후에는 전날부터 내 머리를 아프게 했던 문제를 처리하러 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빈에서 사흘을 머문 후 류블랴나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버스표를 미리 예매해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버스 운행이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메일이 날아왔다. 결국 부랴부랴 다른 교통편을 알아보아야 했는데, 그 교통편이 그리 다양하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유럽에서는 난민 문제로 국경을 봉쇄한다느니 어느 역으로 가는 기차는 모두 취소되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왕이면 저렴한 비용으로 류블랴나까지 이동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비용을 따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열차를 타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웬일인지 웹 사이트에서 예약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성가시더라도 빈 역에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빈 서역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기차표를 구하려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엄청나게 긴 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과연 이 줄이 줄어드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하는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한 역무원이 내게 다가오더니 바로 기차표를 살 수 있게끔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마도 줄을 서 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원하는 곳으로 자신들을 안내해줄 기차표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지, 언제쯤이면 그곳으로 갈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류블랴나행 기차의 좌석은 남아 있었다. 그 표를 원래 예매해두었던 버스표보다 세 배나 비싼 값을 주고 사야 했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류블랴나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안도했다.
사실 빈에서 하루 이틀 더 머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클림트의 그림들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서 빨리 류블랴나를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쩐지, 아무도 찾아가는 이 없을 것 같은 그 숨겨진 도시를 나 혼자 몰래 보고 오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계속해서 유럽을 떠돈다면, 언젠가 다시 클림트를 만날 일이 있으리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믿음이 나를 다시 이 도시로 데리고 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빈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