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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Apr 24. 2017

Ljubljana. 류블랴나, 그 사랑스러움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아홉.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2)



류블랴나에서의 둘째 날에는 우체국에 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도시들을 지나오면서 틈틈이 지인들에게 엽서를 써두었다. 그 엽서를 한데 모아 부칠 생각이었는데, 다름 아닌 바로 이 류블랴나에서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착한 우체국. 친절한 직원분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엽서를 보냈다.


낯선 도시에 가면 누군가에게 엽서를 쓰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엽서를 한두 장씩 사둔 건 그런 이유였다. 사실 엽서라는 것이 워낙 그 크기가 작다 보니, 받는 이와 보내는 이의 주소까지 적고 나면 별다른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그러니 그동안 누군가에게 보냈던 엽서에도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왠지 낯선 곳에 가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고 싶어 진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도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내 마음을 전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노란색 리본이 아닌, 핑크색 리본



그렇게 무사히 엽서를 보내고 우체국을 나서는데,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백화점 앞 거리에 핑크색 리본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행사를 준비 중인 듯했는데, 나로서는 그 의도나 목적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괜히 이 리본이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고 있자니, 한 아가씨가 붓을 든 채로 웃으며 다가왔다.


  "너도 그려볼래?"

  "내가?"

  "응."

  "그래도 돼?"

  "그럼. 우린 도움이 필요하다고."


손으로 하는 건 뭐든 다 못하는 내가, 그들에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생긋 웃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어 내게로 내민 붓을 받아 들었다. 다행히 리본 무늬가 패인 하얀 판을 따라 페인트를 칠하면 되어서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리본 하나를 겨우 완성한 다음 괜스레 뿌듯해서 혼자 웃었다. 저 리본은 얼마 안 가 곧 지워졌겠지만, 그래도 왠지 류블랴나에 내 흔적 하나를 남겨 놓고 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랑스러운 도시, 류블랴나에 신발을 걸어놓는 대신 리본 하나를 그려놓고 왔다. 


그렇게 류블랴나에서의 둘째 날도 기분 좋게 시작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닮은 것인지, 도시가 사람들을 닮아간 것인지, 류블랴나도 류블랴나 사람들도 소란스럽지 않게 쾌활했고 부담스럽지 않게 친절했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괜스레 거리를 방황하다가 이내 곧 전날 둘러보지 못한 류블랴나 성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류블랴나 성은 Castle Hill이라 불리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방어를 목적으로 하여 11세기에 처음 지어졌다. 이후, 15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거의 새로운 모습으로 증축되었으며 성 내의 예배당도 이 시기에 지어졌다. 당시 류블랴나 성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류블랴나 성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접어들어서이다.  




류블랴나 성으로 오르는 길


류블랴나 성으로 오르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류블랴나에서 가장 큰 노천 시장이 열린다는 보든코브 광장(Vodnikov Trg)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성으로 오르는 길(Ulica na Grad)'을 찾을 수 있다. 이 한적한 숲길을 따라 20분쯤 걸으면 류블랴나 성이 나타난다. 가는 길에 류블랴나 시내도 틈틈이 내려다볼 수 있어서, 등산이라기보다는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쉬엄쉬엄 언덕 위를 올랐다. 


그렇게 해서 만난 류블랴나 성은, 그동안 거쳐온 다른 도시들에서 만난 ‘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초라했다. 그런데도 그 초라함에 마음이 가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성'이라 부르기도 뭣한 조그마한 규모의 건물을 바라보고 섰다가, 문득 이 작은 도시에, 이 한적한 언덕 위에,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 또한 실망스러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이 도시에 기대했던 건 화려함 같은 것은 아니었다. 




류블랴나 성에서 바라본 류블랴나의 전경


성 건물을 둘러보기도 전에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전망대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류블랴나 전경이었다. 그 전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새삼 이 도시가 참으로 정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닥에 주저앉아 아기자기한 주황색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청승맞게도 찔끔 눈물이 났다. 슬펐던 건 아니었다. 그저 류블랴나가 너무 마음에 든 것뿐이었다. 


사실 여행이 좋긴 했지만. 혼자서 오래 떠도는 여행은 가끔 힘이 들었고, 종종 외로웠으며, 때로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마음이 사무쳤다. 그런데 이 낡은 성터에 앉아, 이 정갈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하나씩 하나씩 풀리는 듯했다. 그 기분 때문이었다. 이 작고, 조용한, 숨겨져 있는 도시가 내 마음을 그토록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말이다.  



 

류블랴나, 어느 상점의 화려한 벽면


물론 류블랴나에는 조금 더 볼 것이 남아 있었다. 독특한 두 개의 청동문으로 유명한 '성 니콜라스 성당(Stolnica Sv. Nikolaja)'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류블랴나 시청사(Mestna Hiša)'도 둘러볼 계획이었다. 다음날에는 '알프스의 눈'이라 불리는 '블레드 호수'에도 다녀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둘러보기 전에도, 이미 류블랴나가 충분히 좋았다. 어쩌면 이토록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내가 '사랑(LOVE)'이라는 단어를 제 나라의 이름 안에 장난스럽게 숨겨둔 나라(Slovenia)의 수도를 좋아하지 않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류블랴나 거리에서는 어렵지 않게 그래피티를 만날 수 있다


알고 거리를 헤맨 것은 아닌데, 걷다 보니 류블랴나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만든 대안문화공간인 메텔코바 (Metelkova)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류블랴나는 깨끗하고 정갈한 도시지만, 그 도시 곳곳에서 그래피티(Graffiti)를 만날 수 있다.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이 미묘한 조화가 류블랴나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메텔코바 예술촌은 류블랴나 중심에 위치한 자율적인 사회단체이다. 현재는 갤러리, 바, 스튜디오, 문화 단체들의 사무실과 라이브 뮤직을 선보이는 공간 등으로 꾸며져 있지만 유고 연방 시절에는 이곳에 군부대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연방이 해체된 후 예술가들이 하나둘 이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메텔코바가 생겨났다. 메텔코바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는 '메텔코바 거리'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때 류블랴나 정부는 이 공간을 철거하기 위해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리는 등의 탄압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현재 메텔코바는 합법적으로 수도와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래피티를 따라가다 보면 메텔코바를 만날 수 있다

 

류블랴나에는 어딘가 모르게, 이곳에 정착하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정말이다. 이곳은 '언어, 경제 수준, 일자리, 문화 시설'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이 도시에 눌러앉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한 일 년 반쯤, 이 도시에 눌러앉아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상상 속에서, 신발을 벗고 이 도시에 정착한 여자를 만들어낸 건 그런 내 소망의 표출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 상상 속의 그녀처럼,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이 도시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발을 신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대신, 신발을 고치는 수선공이 된다거나 수프를 만드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문맹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다 이 도시가 너무 좋아지면 그대로 영영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류블랴나에서 55km 떨어진 곳에 있는 알프스의 진주, '블레드 호'


하지만 나는, 류블랴나에 정착하지 않았다. 신발 수선공이 되지도 않았고 맛있는 수프를 끓이는 방법을 배우지도 않았다. 대신 이 도시에 도착한 지 꼭 사흘째 되던 날, 이곳에서 풀었던 짐가방을 다시 챙겨 다음 도시로 떠나는 버스를 탔다. 다행히도 슬로베니아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에도 그다지 아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묘한 안도감이 갑작스레 나를 찾아왔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도시를 만났으니 이 여행은 여기에서 끝이 나도 좋다는 안도감. 그러니 앞으로 만나게 될 마지막 나라에서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안도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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