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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Apr 15. 2017

Ljubljana. 류블랴나, 그 사랑스러움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아홉.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1) 



오후 2시, 빈을 출발한 지 여섯 시간 만에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기차역에 내리니 그 소박한 규모 때문에 조금 휑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번화한 대도시를 기대하며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침 일찍, 달랑 커피 한 잔으로 아침식사로 때우며 류블랴나로 향하는 중이다.


원래 류블랴나에 올 생각은 없었다. 그냥 동유럽의 어디쯤인가를 한 달 반쯤 헤매기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짜다가, 우연히 이 도시를 발견했다. 그렇다고 이 도시에서 특별히 기념비적인 건물이나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던 장소를 찾아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쩐 이유인지 '이 도시에 한번 가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알프스 남쪽 끝에 숨어 있는 조용한 이 도시에 말이다.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의 한 중앙에 작은 도시, 류블랴나가 있다


류블랴나는 류블랴니차(Ljubljanica) 강 하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강에서 도시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기원전 1세기쯤 처음으로 도시가 생겨났다. 당시 로마인들이 이곳에 전략 도시 에모나(Emona)를 건설했는데, 에모나는 약 5세기경 훈족(Huns)에게 파괴당했다. 이후 슬라브족이 이 도시를 '루비나가'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였으나 이 도시 또한 10세기에 마자르족에게 파괴당했다. 그러다 13세기 후반부터, 류블랴나는 '라이바흐(류블랴나의 독일식 이름)'라는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809년에는 프랑스에 점령당했으나 1814년 합스부르크 왕조가 돌아왔다. 1848년에는 슬로베니아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자라났고, 류블랴나는 그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외국에 의한 통치는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종식되었다. 이때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와 합병되었고,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 지역의 비공식적인 수도가 되었다. 1941년에는 이탈리아에, 1943년에는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류블랴나는 공식적인 수도가 되었고 현재까지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슬로베니아는 1945년 유고슬라비아 사회 연방 공화국에 참여한 이후, 45년 동안 공산주의 체제 하에 있었다. 그러다 1990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가운데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실시하면서 공산주의에서 벗어났다. 1991년 6월 25일,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떨어져 나왔다.  



   

사실 이 도시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지, 슬로베니아에 대해서도 류블랴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그동안 내가 가보고 싶어 했던 수많은 도시들을 제치고, 류블랴나에 먼저 발을 딛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류블랴나로 이끈 것은 사실 '신발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하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신발들 말이다. 


류블랴나의 신발들. 이 신발들 때문에 이 도시까지 오게 되었다.


류블랴나에는 ‘트루바리예바(Trubarjeva)’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 거리에는 낡고, 멋없고, 먼지 쌓인 신발들이 주렁주렁 공중에 매달려 있다. 사실 그리 아름다울 건 없는 풍경인데, 이 신발들이 찍힌 사진을 보았을 때 저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신발들을 누가, 그리고 왜, 공중에 매달아놓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이유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 그 날 마신 술에 취해 엉뚱한 장난을 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리고는 제 신발을 어디 둔지 잊어버려 그대로 공중에 매달아 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 풍경이 이상하리만큼 인상 깊었던 건 사실이다. 어딘가 제 신발을 벗어둔다는 건 왠지 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니까. 우리는 좋은 의미로든 그렇지 않은 의미로든, 방황을 끝내기로 했을 때 신발을 벗어두니까.




류블랴나의 ‘트루바리예바' 거리


하릴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 낡은 신발들은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니까 이 신발들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던 누군가가 어쩌다 이 자그마한 도시까지 흘러오게 되었을 거라고. 처음엔 지나치게 평화로운 이 도시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오히려 그 평화로움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거라고. 때문에 그녀는 세상 곳곳을 헤집고 다녔던 제 신발을 이곳에서 잠시 벗어두기로 했을 거라고. 그리고 6개월이나 1년쯤 후에는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죽을 때까지 이 도시를 떠나지 못했을 거라고. 그래서 그녀의 신발은 주인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이 도시의 하늘에 매달려 있었을 거라고.      


혼자 이런 상상을 하다가 잠시 웃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왠지 스스로 만든 이 이야기가 조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프레세렌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세 개의 다리 '트로모스토브예'와 '성 프란체스코 성당'


나는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트루바리예바 거리로 먼저 달려갔지만 사실 류블랴나 여행은 '프레세렌 광장(Preseren Square)'에서 시작하면 좋다. 이 광장의 이름은 슬로베니아 국가를 작시한 시인, 프란츠 프레세렌(France Preseren)에게서 따왔다. 그리 크거나 그리 아름다운 광장은 아니지만, 당연히 이 광장에도 특별히 봐 둘 만한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트로모스토브예(tromostovje)', 영어명은 'Triple Bridge',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삼중교'이다. 류블랴나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세 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그 독특한 구조 때문에 유명세를 얻었다. 1280년, 처음 축조되었던 이 다리는 류블랴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원래 나무다리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전소되었고 1842년 재건축될 때 석회함으로 지어졌다. 트로모스토브예가 처음부터 삼중교로 지어졌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가운데에 있는 다리만 존재했는데, 이곳에 병목 현상이 심하게 나타나자 1932년 그 양옆으로 다리를 추가했다. 가운데 다리는 차도로 이용하고 나머지 양쪽의 다리는 인도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세 다리 모두 보행자 전용이다. 


 


프레세렌 광장에 서 있는 프란츠 프레세렌의 동상


프레세렌 광장인 만큼, 당연히 광장 중앙에는 프레세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프레세렌 동상 위의 여인은 월계수관을 쓰고 있는 시의 여신 '뮤즈(Muze)'이다. 


프란츠 프레세렌은 1800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태어나 빈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의 작품은 슬로베니아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슬로베니아가 독립한 이후 그의 시 <축배>가 슬로베니아 애국가의 가사가 되었다.  


사실 프레세렌의 시는 우리에게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꽤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프레세렌은 30대 청년 시절, 자신보다 열여섯 살이나 연하이던 율리아 프리미쯔라는 여성에게 첫눈에 반해 오랫동안 짝사랑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광장에 서 있는 프레세렌 동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 보면 그곳에 바로 율리아의 조각상이 있다. 


 


프레세렌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율리아의 조각상. 이 노란 집은 율리아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프레세렌 광장에서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분홍색의 어여쁜 건물인 '성 프란체스코 성당(Franciscan Church of the Annunciation)'이다. 이 아담한 성당은 류블랴나의 수태고지 교구 성당으로, 건물의 선명한 분홍색은 프란치스코 회의 수도적 지침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성당은 2008년, 슬로베니아의 문화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나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준 '성 프란체스코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화려한 장식과 벽화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규모 때문일까. 광장 한편에 서 있음에도, 이 성당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다. 덕분에 쉬고 싶을 때마다, 또 혼자 있고 싶을 때마다 이 성당에 들어가 앉아 있고는 했다.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좋은 휴식처가 되어 주는 것은 언제나 '카페'와 '작고 조용한 성당'이다.  




 류블랴나의 상징은 '용'이다

  

류블랴나를 걷다 보면, 종종 '용'을 마주치게 된다. 슬로베니아에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아손(Iason)이 황금 양털을 구해서 돌아올 때 류블랴니차 강으로 들어왔고, 그때 큰 용을 물리친 후 그 자리에 류블랴나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 이유로 용은 일종의 류블랴나의 상징이 되었다.   




'용의 다리'에 서서 류블랴나를 지키고 있는 듯한 용


가장 볼만한 용의 동상을 보고 싶다면 '즈마이스키 모스트(Zmajski Most), 즉 '용의 다리'로 가야 한다. 1910년에 건설된 이 다리의 양끝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네 마리의 거대한 용이 서 있다. 날개를 펼쳐 세운 채 사납게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이 용의 모습은, 사랑스러운 도시 류블랴나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다. 

 



류블랴나에 도착한 순간,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류블랴나는 작은 도시이고, 특별한 볼거리가 많은 도시도 아니다. 류블랴나의 면적은 약 163.8 km²으로 서울의 약 4분의 1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인구는 약 27만 명이라고 하니,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해도 이 도시가 얼마나 한적할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런데도 무거운 짐을 잔뜩 이끌고 기차역에 내려, 새로이 묵게 될 숙소를 찾아가던 순간부터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류블랴나에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전혀 없다. 무슨 이유인지, 이곳의 사람들은 대부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또한 슬로베니아는 2007년, 통화를 유로로 전환하면서 열여섯 번째 유로 사용국가가 되었다. 때문에 물가는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환전에 따른 번거로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적당히 친절하고, 음식은 적당히 맛있으며, 동양 여자가 혼자 지나간다고 해서 특별히 더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길도 없다. 당연히 괜스레 내게로 다가와 ‘니하오’ 라거나 ‘곤니찌와’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조용하고 경쾌한 류블랴나의 거리.

       

여행자들은 걸어서 류블랴나 성을 오르고, 삼중교와 용의 다리를 건너고, 프레세렌 광장과 류블랴나 강변을 거닌다. 활기차고도 고요한 이 도시에는 웬일인지 호객꾼도 없고, 빵빵거리며 클랙슨을 눌러대는 차들도 없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도시를 심심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심심한 생활이 간절해서 여행을 떠나는 나는, 제 이름값을 하느라 관광객들로 인해 몸살을 앓는 다른 도시들에서보다 류블랴나에서 조금 더 행복해졌다.      







1. 유고슬라비아 - 유고슬라비아는 '남 슬라브 인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8년, 세르비아 왕국에 의해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남 슬라브인들 지역들을 합쳐서 만들어진 연합 왕국에서 시작되었다. 이 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주축국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잇는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이라는 공산국가가 수립되었다. 약 45년 간 지속되었던 이 국가는 1991년, 연방을 구성하던 공화국 중 네 개 국가가 분리 독립하면서 해체되었다. 오늘날 유고슬라비아는 7개국으로 분리되었다. 슬로베니아(1991-), 크로아티아(1991-),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992-), 마케도니아 공화국(1991-), 몬테네그로(2006-), 세르비아(2006-), 코소보(2006-)가 그 국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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