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열두 도시 이야기 - 열.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1)
류블랴나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반, 버스는 크로아티아(Croatia)의 국경선에 다다랐다. 폴란드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체코로, 체코에서 헝가리로, 다시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로 이동해 오는 동안 한 번도 여권을 검사한 적이 없었는데.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려는 순간, 버스는 검문소 앞에 섰다. 그도 그럴 것이 크로아티아는 2013년 유럽연합에 가입하던 당시 솅겐 조약에도 서명하였으나 그 실시가 아직까지도 보류되고 있다.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국경을 넘을 때 간단한 검문을 받아야만 한다.
다소 귀찮은 일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여권에 새로운 스탬프가 찍히는 건 좋았다. 그래서 혼자 들떠 찰칵찰칵 여권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함께 버스에서 내렸던 한 명의 남자가 검문소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금방 끝날 줄 알았던 검문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우리가 탄 버스는 그 검문소 앞에서 무려 한 시간이나 더 머물러 있어야 했다. 결국 그 남자는 버스로 돌아오지 못한 채 경찰차에 태워진 채 떠났고, 버스만 다시 자그레브(Zagreb)를 향해 출발했다.
국경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더 달리면 자그레브에 도착할 수 있다. 크로아티아는 세로로 아주 긴 해안선을 가진 동시에, 국토의 윗부분은 내륙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독특한 모습을 가진 나라이다. 얼핏 보면 마치 부메랑처럼 생긴 이 나라의 북서쪽 내륙에 수도 자그레브가 위치해 있다.
사실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사랑받는 도시는 아니다. 크로아티아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그레브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이 있는 중부 지역, 풀라(Pula)와 로빈(Rovinj) 등이 있는 이스트리아(Istra) 반도, 그리고 가장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는 달마티아(Dalmatia) 지역이 그것이다. 자다르(Zadar), 스플리트(Split), 두브로브니크(Dubrovnik) 등 크로아티아 유명한 관광지는 대부분이 이 달마티아 지역에 있다.
그러니까 이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자그레브에 들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나름의 고민거리였다. 이 도시에 대한 별다른 악평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꼭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실 다들, 자그레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만약 내가 자그레브에 다녀왔다고 말하면, 크로아티아를 다녀온 사람들조차도 도대체 세상 어디에 그런 도시가 있느냐고 물어볼 것 같은 무심함만 느껴졌다.
그런데도 결국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자다르, 스플리트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꽤 여러 곳의 도시를 둘러보면서 이 나라의 수도만 쏙 빼놓고 싶지는 않았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도시일 수 있지만, 그 사실마저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관광지로서의 자그레브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해도, 이 도시의 역사에 대해서라면 나름 할 이야기가 많다. 크로아티아가 우리에게 '유럽의 화약고'로 알려진 발칸반도에 위치해 있고 자그레브는 오랫동안 이 나라의 수도였으니 말이다.
자그레브는 1세기에서 5세기 사이, 로마인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인데 그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094년, 이곳이 로마 가톨릭 주교관구가 되면서이다. 이 도시는 그라데츠(Gradec)와 캅돌(Kaptol)이라는 두 개의 언덕 부근에 세워졌는데, 그중 그라데츠 지역은 몽골이 침략을 했을 때 헝가리 왕 벨라(Bela) 4세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1242년, 벨라 4세는 그라데츠를 자유로운 왕권 도시로 선포하였고 이후 이 지역은 왕의 보호를 받는 요새 도시로 성장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오랫동안 외세에 시달렸던 나라 중 하나이다. 중세 시대에는 헝가리 국왕이 크로아티아 왕위를 강탈하여 오랜 시간 헝가리 왕국의 통치를 받았고, 헝가리 왕권이 무너진 이후 14세기에는 세르비아(Serbia) 제국의 압박을 받았다. 15세기, 헝가리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 이후부터 19세기 초까지는 헝가리 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야 했다. 19세기 이후 크로아티아는 자신들의 자치를 인정받으려는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는데, 이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자그레브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이었던 1918년,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와의 군주제와 관계를 끊고 세르비아, 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왕국을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크로아티아인들은 1941년 나치 독일이 침략하였을 때 병력 소집을 거부하였고 이는 유고슬라비아가 무너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은 1941년,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괴뢰 파시스트 정권을 크로아티아에 세웠는데 이때 크로아티아는 나치의 후원 아래 세르비아인에 대한 무자비한 인종 청소를 벌였다. 이 시기에 약 35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태인, 그리고 집시가 학살당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가 아직도 나치와 관련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바로 이때의 사건 때문이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크로아티아는 유고 연방 내 하나의 공화국으로 남았다. 하지만 1980년 유고 연방을 이끌던 공산주의자 티토 원수가 죽자 공화국은 또 한 번 큰 혼란을 겪었고, 결국 1990년 크로아티아 내에서는 민주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이렇게 공산주의와 작별한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함께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유고 연방의 붕괴를 거부한 세르비아계 연방군이 무력으로 맞섰고, 결국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생하였다.
1991년, 유고 연방군은 두브로브니크로 진격하는 한편 자그레브의 대통령궁을 폭격하였다. 이후 여섯 달 동안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십만 명이 피난을 가고 수 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몇 차례의 휴전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92년 UN은 세르비아가 점령한 크로아티아 지역에 보호군을 배치하였다. 결국 유고 연방군은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하였고, 1992년 크로아티아는 UN에 가입하였다. 다만 크로아티아 동부에 있는 크라이나 지방은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설립을 선포하여 1995년 여름까지 전쟁을 지속했다.
이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겪는 동안, 다행히도 자그레브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덕분에 이 도시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엿보지 않아도 된다.
자그레브 여행을 시작할 곳은 바로 반 옐라치치 광장(Ban Jelacic Square)이다. 그라데츠 지역과 캅톨 지역을 이어주는 지역에 위치한 이 광장은 단연 자그레브의 중심이 되는 광장이라 할 만하다. 1641년 만들어진 이 광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래의 이름이었던 반 옐라치치 광장 대신 ‘공화국 광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당시,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반 요셉 옐라치치의 동상 또한 제거되었다. 반 옐라치치는 184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입을 물리친 크로아티아의 전쟁 영웅이다.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이후, 이 광장은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던 반 옐라치치의 동상 또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광장을 쓰윽 둘러본 다음 반드시 찾아가 봐야 할 곳은 또 하나의 유명한 광장인 성 마르카 광장(St. Mark's Square)이다. 반 옐라치치 광장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광장이라면, 성 마르카 광장은 자그레브의 구 도심이라 할 수 있는 그라데츠 지역의 중심부이다. 두 광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도보로도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 성 마르카 광장은 반 옐라치치 광장만큼 그 규모가 크진 않지만 크로아티아의 국회의사당, 정부 청사, 법원 그리고 자그레브의 시의회 의사당 등 주요 기관들이 모두 모여 있어 그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크로아티아 대통령 취임식 또한 이 광장에서 열린다고 한다.
많은 중요한 기관들이 모여 있지만, 그래도 성 마르카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성 마르카 교회이다. 알록달록한 이 교회의 지붕이 우리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성 마르카 광장으로 이끌어준다. 14세기 지어진 성 마르카 교회는 자그레브 그라데츠 사목구의 본당이다. 이 교회의 지붕에 그려진 두 문장 중 왼쪽은 크로아티아, 오른쪽은 자그레브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어여쁜 교회를 찾아가기 위해 굽이진 골목길을 얼마쯤 헤매다 보면 어느 순간 그라데츠의 언덕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주 아름다운 전망을 뽐내는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더욱 정겹게 느껴지는 자그레브를 한눈에 내려다보기에 안성맞춤인 언덕이다.
이렇게 날이 흐린 자그레브를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이 도시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을 찾아 나섰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실연에 관한 박물관' 정도 될 것이다. 지난해, 제주에서도 '실연에 관한 박물관'이 열렸다고 하니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특별한 박물관이 꽤 유명할 듯하다. 하지만 내가 자그레브를 여행하던 당시만 해도 이 박물관의 존재를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여행자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난 오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에 갈 거야.'라고 말했을 때 다들 'What?'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이 박물관에 도착했지만 말이다.
그 제목에 걸맞게, 모든, 다양한 종류의 깨어진 관계에 관한 기록들이 이곳에 있다. 누군가는 아버지나 딸이나 연인의 죽음으로 고통을 겪었고, 누군가는 한순간의 실수로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졌으며, 누군가는 행복하지 못했던 연애를 시원하게 끝내버렸다. 마음 아픈 사연도 있고, 유쾌한 사연도 있고, 가볍게 코웃음 치게 되는 사연도 있다. 크지 않은 규모지만, 하나하나의 사연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두어 시간쯤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여름에는 오후 10시 30분까지, 겨울에는 오후 8시 30분까지 문을 여니 방문 시간을 잡기도 꽤 편하다. 그러니, 누군가 나처럼 이 도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른 사람이 있다면 이 박물관에도 꼭 한 번 들러보길 권한다. 이곳은, 사랑할 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이별해야 할 때 그 대상을 보내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일깨워주는 곳이니까 말이다.
1. 솅겐 조약. Schengen Agreement. 유럽 각국이 공통의 출입국 관리 정책을 사용하여 국가 간의 통행에 제한이 없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조약이다. 1985년 6월 14일, 룩셈부르크의 작은 마을 솅겐 근처 모젤 강에서 조인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이 조약이 실시되고 있으나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루마니아는 현재 실시가 보류 중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은 국경 통제의 폐지에는 합의하지 않고 솅겐 정보 시스템만 실시하고 있다.
2.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1년 6월 25일 발발하여 1999년 6월 10일 종전하였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이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전쟁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없어진 이상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