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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Jan 27. 2018

Zagreb. 서울로부터 8,648km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열.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2)




그렇게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을 둘러본 후, 굽이지는 골목들 사이를 얼마쯤 헤매고 나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길어지는 여행에 점점 체력은 바닥이 나고 있었고, 당연히 해가 지고 나면 휴식이 절실해졌다. 다행히 자그레브에서의 숙소는 아늑하고 편안했고, 덕분에 개운한 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대충 옷을 차려입은 후 밖으로 나가자 어느 새 상쾌한 아침에 자그레브에 도착해 있다. 


이 아침에는 반드시 가야할 곳이 있다.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보기 힘든, 자그레브의 돌락 시장(Dolac Market)이 바로 그 곳이다. 2013년, 나름대로 꽤 인기를 끌었던 TV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에도 이 시장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 관광객들도 꽤 즐겨찾고 있는 이 재래 시장은, 1926년 문을 연 이후 자그레브 시민들과 함께 하루의 시작을 함께 열어왔다. 새벽 일찍 문을 열어 오후 두세시면 문을 닫는 이곳의 활기를 제대로 즐기려면 가능한 한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는 것이 좋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이른 시간에 숙소를 나서면, 다행히도 돌락 시장을 찾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돌락 시장의 입구를 지키고 선 크로아티아 여인의 동상


반 옐라치치 광장의 좌측에 꽃파는 골목이 있는데, 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돌락 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 커다란 바구니를 머리에 인 한 여인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크로아티아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이 여인은 돌락시장을 지키기라도 하듯, 단호한 표정과 자세로 시장 입구에 서 있다. 




자그레브 시민들의 아침을 여는 돌락 시장


돌락 시장의 상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모두 빨간 파라솔을 펼쳐놓고 있다. 나름 돌락 시장만의 전통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파란 하늘 밑을 붉게 물들인 저 커다란 우산들은 이 재래시장에서 더욱 활기를 느끼게 해준다. 별달리 살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 가판대 사이사이를 거닐어 본다. 다행히 나와 같은 여행객을 귀찮아 하는 상인들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천천히 구경을 하다보니 싱그러운 포도와 샛노란바나나가 자꾸 내 시선을 붙잡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한동안 과일을 제대로 못 먹긴 한 터였다. 그래서 둘 다 사갈까 고민을 하다가 다음날 또 플리트비체로 국립공원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걸 기억해내고는 결국 먹기에 더 간편한 바나나만 사기로 했다.   




돌락 시장에서 구매한 바나나


그렇게 해서 내 아침이 된 바나나. 두 개는 먹고, 두 개는 나와 함께 플리트비체로 향했다.





 

돌락시장은 농산물을 취급하던 시장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이렇게 싱싱한 과일, 야채들과 함께 수산물도 팔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 탐스러운 포도알들이었는데, 결국 맛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일이다.   




그렇게 돌락 시장을 한 바퀴 쭉 둘러본 후, 바나나 한 봉지를 손에 들고 근처의 카페를 찾아나섰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그레브에는 노천카페가 무척 많다.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노천카페이긴 하지만, 자그레브의 노천카페는 그 수만으로 정말로 압도적이다. 어느 쪽을 향해서 걸어가도 길 양옆으로, 또는 길 한가운데,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노천카페를 만나게 된다.   



자그레브의 골목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노천카페들


이 도시의 사람들이 어째서 이렇게 길가에 테이블을 내놓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햇볕이 좋아서 햇빛을 즐기기 시작한 건지, 햇빛이 귀해서 햇빛을 즐기고 싶어하게 된 건지, 아니면 그저 커피를 유난스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그레브에 살고 있는 건지 그 이유는 알기 힘들지만 어쨌든 온 거리가 카페로 뒤덮여 있기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넓다. 




그 중에서 내가 선택한 카페


그 중에서 이 아침에 내가 선택한 카페는 돌락 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앉기 편해 보이는 의자가 눈길을 끌어, 조용히 이곳으로 들어서니 눈인사를 해오는 종업원도 정겹다. 그래서 커피 한 잔을 시킨 후 돌락 시장에서 사온 바나나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있는데, 문득 카페 앞에 세워진 이정표가 눈에 띈다.



내 시선을 붙잡은 카페 안의 이정표


그러니까 이곳에서부터 세계의 여러 대도시들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이곳은 자그레브. 뉴욕으로부터 6,903km, Tokyo로부터 9,403km 그리고 서울로부터 8,468km. 


내 나라를 떠나 이국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 이 이정표를 보는 순간 생각이 났다. 내가 서울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지 말이다. 




자그레브 대성당 앞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기념탑(Virgin Mary with Angels)


그렇게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후, 자그레브 대성당(Zagreb Cathedral)을 보러 나섰다. 이곳은 자그레브 성모승천대성당 또는 성모마리아 승천 성당(Cathedral of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이라고도 부른다. 


자그레브 어디에서든 우뚝 솟은 두 개의 첨탑을 발견한다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바로 자그레브 대성당을 만날 수 있다.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이 대성당은 1094년, 자그레브 교구가 처음 설립한 직후에 건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880년, 대지진으로 인해 성당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이를 보수하기 위해 재건축이 이루어졌을 때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네오고딕 양식이 더해졌다. 두 개의 첨탑 높이가 105m, 104m로 차이가 나는데 이 역시 지진의 여파로 그리 되었다 한다. 성당 앞에는 성모 마리아의 석주와 분수대가 있어 대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옛 방어벽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시계


여기서 놓치지 말고 보고 가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성당을 마주보고 좌측으로 몇 걸음만 걸으면 발견할 수 있는 옛 방어벽의 시계이다. 이 시계는 1880년 대지진이 일어난 그 시각 그대로 멈춰 있다. 이 시계는 자그레브에 큰 지진이 닥쳤던 1880년 11월 9일, 오전 7시 3분 3초에 아직도 그 시계초가 멈춰져 있다. 자그레브 대성당을 다시 지을 때, 그 비극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이 시계만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트칼치체바 거리에 서 있는 '마리아 유리치 자고르카'의 동상


자그레브 대성당 앞을 떠나, 이번에는 이 도시를 걸어서 둘러보기로 했다. 별다른 목적지는 없다. 그냥 도시를 혼자 걷는 그 시간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걷다보니 여기저기서 이름 모를 동상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로아티아인의 이름이 워낙 적으니, 단번에 동상의 주인공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 동상 밑에는 늘 그 주인공의 이름이 있으므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동상 중 하나는 트칼치체바 거리에 서 있는 '마리아 유리치 자고르카(Marija Juric Zagorka)'의 동상이다. 마리아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여성 저널리스트로서 열아홉 편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이자 여성운동의 선각자이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동상이 있다면 바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의 것이다. 에디슨에 버금가는 전기와 발명의 천재로 불린 니콜라 테슬라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84년, 라디오를 통한 무선통신을 최초로 실현시켰으며 에디슨과의 전류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가장 대단한 전기 공학자 중 한 명으로 존경받았으나 어쩐 일인지 그의 이름은 에디슨의 것처럼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마사리코바와 테슬리나 거리의 교차로에 세워진 이 동상은 그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꼭 여러 동상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도 자그레브의 거리를 걷는 것은 꽤 재미있다. 특히 캅톨과 그라데치의 거주 지역을 나누는 경계선인 메드베슈차크 강을 따라 만들어진 트칼치체바 거리는 꼭 한 번 걸어볼만한 곳이다. 18세기에는 이 강을 따라 옷, 비누, 종이, 술 등을 만드는 작업장이 형성되었으나 19세기에는 이 강이 포장도로로 바뀌면서 상업활동과 밤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지금은 바로 이 거리에서 수많은 노천카페와 음식점을 만날 수 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트칼치체바 거리의 노천카페들




그래서 그 중 한 곳에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으니, 오후에는 맥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아일랜드에서는 흑맥주인 기네스를 마셔봐야 하고, 체코에서는 쌉싸름한 맛이 일품인 필스너를 마셔봐야 하고, 독일에서는 파울라너로 대표되는 밀맥주를 마셔봐야 한다면, 크로아티아에서는 레몬 맥주를 마셔봐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크로아티아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 레몬 맥주를 한 번쯤은 마셔보았을 것이다. 


알코올 도수가 2% 정도로 매우 낮아서, 사실 탄산 음료 정도로 느껴진다. 그런데도 탄산 음료 만큼 달지는 않고 청량감이 뛰어나서 여행 중에 혼자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런 레몬 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자그레브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또 무엇을 할까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남은 시간'이라는 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까지, 나는 늘 지독할 만큼 바쁜 일상에 쫓기면서 살아왔으니까. 그 일상을 견딜 수 없다고 느낄 때쯤, 늘 이렇게 결국 여행을 떠나오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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