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여섯. 체코, 프라하 (2)
둘째 날에는 프라하 성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프라하 성은 9세기에 건설된 유서 깊은 성으로 체코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처음 건설되었을 때부터 체코의 왕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현재도 체코 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로 이용되고 있다. 기네스 북에 따르면 이 성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성 중, 세계에서 가장 큰 성이라고 한다.
올드타운에서는 블타바 강을 지나 서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프라하 성에 도착할 수 있다. 메트로나 트램을 타면 성 바로 앞에서 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걸어서 가는 쪽을 택했다. 걸으면서 겸사겸사 도시의 거리들을 구경하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카를교를 지나 한 십 분쯤 더 걸으면 프라하 성 앞에 도착하게 된다. 정문 양쪽에는 거대한 거인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위협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동상들은 거인 타이탄의 전투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곤봉과 단검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쪽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를 상징하고, 그 아래 무릎 꿇은 석상은 체코를 상징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체코는 후스 전쟁과 30년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졌을 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프라하 성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커다란 성채이다. 그 안에 구 왕궁과 화약탑, 왕실 정원, 황금 소로 등 다양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히 '성 비투스 대성당'일 것이다. 이 성당은 프라하의 대주교좌로, 9세기 바츨라프 1세(Václav I)가 지은 것을 원형으로 보고 있다. 이후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14세기, 카를 4세가 고딕 양식으로 새로이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후 후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건축은 중단되었고, 이후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성 비투스 대성당은 완성되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은 일단 그 크기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고딕 양식의 건물답게 그 첫 느낌은 '어마어마하다'였다. 당연히 가까이 서서는 이 대성당의 모습을 한 눈에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그 밖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디를 가나 인파에 시달려야 하는 프라하의, 가장 대표적 관광지인 프라하 성 안의, 가장 인기 많은 건축물인 성 비투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인내심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건물을 빙빙 휘감아가며 줄을 서 있었고, 그 줄 속에 끼고 싶지 않았던 나는 괜스레 다른 건물쪽으로 휘휘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줄이 줄어들 리도 없을 터, 결국 그 인파에 다시 한 번 휩쓸릴 각오를 하고 성당 앞에 줄을 섰다.
다행히 줄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줄어들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성 비투스 대성당 안으로 들어섰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또 한 번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내부를 만났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을 가보았고, 그래서 또 그만큼 많은 성당들을 구경했지만 성 비투스 대성당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성당은 흔치 않았다. 그 사실이, 내가 이 성당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살면서 내가 가본 성당 중, 가장 좋아했던 성당은 폴란드의 크라쿠프에 있는 '성모 승천 교회'이다.) 어쨌든 이곳이 수많은 인파에 휩쓸릴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꼭 들러봐야 할 곳임은 분명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의 중앙에 묘가 하나 있는데, 이것은 합스부르크 가의 페르디난트 1세와 그의 가족들의 묘이다. 하지만 그 묘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제단의 오른쪽에 있는 은색 관과 그를 운반하고 있는 듯한 천사들이다. 이것은 성 얀 네포무츠키(Svatý Jan Nepomucký)의 묘인데, 그 관과 동상들은 실제로 2톤의 은을 녹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장식과 천사들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성 얀 네포무츠키(영어:요한 네포무크 Saint John pf Nepomul)는 체코의 국민적인 성인이다. 그는 1393년, 프라하 대주교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3월 20일, 보헤미아 국왕이자 로마왕이었던 바츨라프 4세에 의해 블타바 강으로 내던져져 익사를 당하였다. 1459년에 작성된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바츨라프 4세는 자기 왕비의 고해신부인 성 얀 네포무츠키를 불러서 왕비가 그에게 무슨 고해를 했는지 말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 얀 네포무츠키는 가톨릭 교회법에 따라 고해의 비밀을 누설할 것을 거부하였고, 이에 격노한 왕에게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카를교에서 거꾸로 던져졌다고 한다. 이후, 성 얀 네포무츠키는 고해성사의 비밀을 준수하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최초의 순교자이자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방을 받은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나오면 바로 맞은편에 구 왕궁(Old Royal Palace)이 서 있다. 이 구 왕궁은 1135년에 지어져 16세기까지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이 왕궁 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블라디슬라브 홀(Vladislav Hall)이라는 굉장히 넓은 홀인데, 이는 중세 유럽에서 교회를 제외하고 기둥없는 방으로서는 가장 큰 것이었다고 한다. 프라하 성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축제와 행사는 바로 이 홀에서 진행되었다.
사실 성 비투스 대성당이 너무나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 안의 다른 곳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 성채 내에서 동쪽으로 쭉 내려오면 성 비투스 대성당과는 전혀 다른, 하지만 그만큼 또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는 황금소로(Golden land in Prague)를 만날 수 있다. 황금소로는 원래, 성 안에서 일하던 하위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그런데 루돌프 2세(Rudolf II) 때, 연금술사들이 이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그 이름이 황금소로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이름의 기원이 무엇이든, 아직까지 이 거리에 남아있는 작은 집들을 통해 이 곳에 살던 옛사람들의 삶을 얼마쯤 엿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기념품 샵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집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 황금소로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는 집이 한 채 있는데, 바로 N0.22라고 적혀 있는 푸른색의 자그마한 집이다. 이 집은 바로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머물면서 집필을 했던 곳이다. 실제로 그의 소설 <성>에 묘사된 거리들이 바로 이 황금소로와 닮아있기도 하다.
프라하 성을 빠져나오면 그 아래 다섯 개의 정원이 있다. 이 도시의 귀족들이 지은 정원이라고 하는데, 다섯 개의 정원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일반인들에게도 모두 공개되어 있지만, 표를 구매해야 한다. 잠깐 들어가 볼까 망설이다가 유럽에 널린 것이 공원이고 정원인데 굳이 귀족들의 정원을 돈 내고 볼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냥 발길을 돌렸다.
대신 프라하에 오면 꼭 직접 보고 싶었던 '존 레논 벽(John Lennon Wall)'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 벽은 프라하의 캄파(Kampa) 섬에 있는데, 카를교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찾아가기 어렵지 않다.
이 곳은 원래 몰타 공화국 대사관의 담이었다고 한다. 공산 정권 시절, 체코인들이 반정부적인 구호 등을 이 벽에 적어놓고 평화를 외쳤는데, 몰타 공화국은 이 낙서를 표현의 자유로 인정해 지우지 않았다. 체코의 공산 정권은 당연히 이 낙서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이 벽이 치외법권에 해당했기 때문에 낙서를 지우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이 벽은 '평화의 벽'으로 상징되었다. 프라하에 위치한 이 벽의 이름이 '존 레논 벽'이 된 것은 처음 체코의 청년들이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며 이 벽에 적어놓은 것이 바로 비틀즈 노래의 가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프라하에서는 꼭 닷새를 머물렀는데,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 도시의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내내 어디론가 숨어 다녔을 것이다. 카를교에서 뜻하지 않게 한국 노래를 듣고, 툭하면 블타바 강을 지나는 유람선을 타고, 달짝지근한 뜨르들로(Trdlo)를 하루에 하나씩 사먹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마지막까지도 프라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흘을 보내고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한 번 카를교를 건널 때였다. 어쩐 일인지 늘 사람들로 북적대던 카를교가 처음으로 조금은 한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여지껏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예수 수난 십자가 상과 성 얀 네포무츠키 동판을 볼 수 있었다.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판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동판은 혼자 반질반질한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마침 사람도 없겠다 그에게 손을 대고 소원을 빌어볼까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프라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이곳에서 소원을 빈다는 게 어쩐지 미안하게 느껴진 이유였다.
사람들이 그토록 아름답다고 말했던 프라하에서, 마지막까지도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것이 얼마쯤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도시를 사랑하니까 나 하나쯤은 프라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마도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다음 날 아침, 미련 없이 프라하를 떠났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는 곳에서도 불행한 누군가는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말이다.
1. 바츨라프 1세 - 보헤미아의 공작이자 체코의 로마 가톨릭 교회 성인. 바츨라프 광장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면, 광장 안에는 그의 기마 동상이 세워져 있다. 13세기 중반, 보헤미아 국왕을 지냈던 바츨라프 1세와는 다른 인물이다.
2. 루돌프 2세 - 1576년부터 1612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나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 예술이나 천문학, 점성술 그리고 연금술 등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보석, 골동품, 미술품 등을 사들이는 데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고,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점성술과 연금술 실험에 매달렸기 때문에 백성들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말년에는 허울뿐인 황제로 프라하의 궁정에 유폐된 채 지냈다.
3. 프란츠 카프카 - 1883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출생한 유대계 소설가이다. 생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발표하기를 꺼렸고, 발표된 작품들도 대부분 거의 팔리지 않았다. 1924년, 41세의 젊은 나이에 오스트리아의 빈 근교에서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글을 모두 태워달라고 부탁했지만, 브로트는 그의 유언을 어기고 그 원고를 모두 보존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출판하였다. <변신>, <심판>, <성>, <시골의사> 등의 작품을 남겼다. 특히 가장 잘 알려진 작품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리'는 카프카 그 자신과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