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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23. 2017

Prague. 프라하에서 불행하기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여섯. 체코, 프라하 (1)


 

뮌헨에서 버스를 타고 프라하에 도착했다. 프라하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아, 드디어 프라하에 왔구나.’라는 묘한 감격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프라하라는 이름은 아주 오랫동안 ‘멀고, 아름답고, 부서지기 쉬운’ 무언가로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엔, 어른이 된다 해도 프라하라는 곳에 가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역사책 속에서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을 읽을 때마다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던 것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힘없는 자가 더 강한 자에게 무참하게 짓밟혔을 거라는 슬픈 감정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고,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프라하가 현실 속의 도시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제 그 도시에 직접 가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나에게 사람들이 들려준 말은 한결같았다. 


안나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바로 프라하라고 했다. 자신의 배낭에 전 세계에서 구해온 배지를 매달고 다니던 리카르도도 ‘그동안 다녀온 나라 중 최고는 체코’라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드레스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나에게 은경 언니는 ‘아름답기로 치자면 프라하가 한 수 위예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모두 프라하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곳이 마냥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도시라고 추억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버스가 프라하로 들어섰을 때 기분이 묘했다. 나도 드디어 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할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즐거워졌다. 이 세상에 모두가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면 나도 기꺼이 그 도시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프라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채, 그곳에 도착했다.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프라하에서의 시작은 순조롭지 못했다. 밤늦게 도착한 숙소는 기대 이하를 넘어서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다음 날 프라하 시내로 나가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지만, 짐을 풀다가 핸드폰 배터리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핸드폰의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기 시작해 여분의 배터리가 꼭 필요했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렸다니.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 밤에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프라하의 중앙역(HIavni Nadrazi. 흘라브니 나드리지)으로 가보기로 한 후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배터리를 결국 찾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중앙역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그곳에선 분실물 센터 자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고객센터로 가 분실물 때문에 왔다고 하니 저곳으로 가면 된다고 해서 가보았지만, 막상 그곳으로 가면 그건 자신들의 업무가 아니니 다른 곳으로 가라 했고, 그래서 그 다른 곳으로 가보면 또 그건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처음 찾아갔던 곳으로 나를 돌려보내는 식이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나는 DB(Deutsche Bahn. 독일 철도 주식회사) 사이트에 접속해 분실물 신고를 했다. 다행히도 아주 신속한 답메일이 오긴 했지만, 분실물을 신고하는 그 과정이 너무나 복잡했다.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라면 모를까, 배터리 하나를 찾기 위해 그 모든 과정을 밟고 싶지도 않았고 그 모든 과정을 밟는다 해도 내가 더블린으로 돌아간 후에야 배터리를 돌려받을 수 있을 듯했다. 결국 그 배터리를 포기했고 그렇게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에야 프라하 구시가 광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체코는 앞서 이야기했던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독일 등과 달리 유럽에서 강국의 위치에 올라서 본 적이 없는 나라이다. 국가의 기원은 고대 말기 동유럽에서 중앙유럽으로 이주해 온 슬라브족의 한 분파로 보고 있다. 9세기, 프쉐미슬 왕조가 이 지역에서 성립하여 14세기까지 체코를 지배했다. 그때부터 국가의 중심지는 프라하였다. 


프라하가 도시의 모습을 갖춘 것은 9세기, 프라하 성이 축조되면서였다. 1085년에는 보헤미아 왕국(중동부 유럽에 위치했던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카를 4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왕)가 왕위에 오르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346년엔 카를 4세의 통치 아래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378년, 얀 후스(Jan Hus)의 종교 개혁으로 프라하는 후스 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이후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문(Haus Habsburg.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으로 넘어가면서 빈(Vienna), 부다페스트(Budapest)와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의 주요 세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583년에는 루돌프 2세의 통치 아래 잠시나마 두 번째로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어 유럽의 문화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말부터 다시 등이 일어나 경제가 성장했고, 그 후에도 꾸준히 인구가 증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대의 공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과 함께 다시 수도의 자리를 차지했다. 1968년의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유명하며, 1993년 슬로바키아의 분리에 따라 체코 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체코 공화국의 수도로서 오늘에 이르렀다.  




프라하의 신 시가지에 위치한 바츨라프 광장


내가 머물던 숙소는 프라하의 신 시가지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Wenceslas Square) 근처에 있었다. 이 광장에서 카를교 쪽으로 쭉 내려가면 구 시가 광장을 만날 수 있다. 프라하 여행의 시작은 바로 이 구시가 광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 광장은 구시청사(Old Town Hall), 성 니콜라스 성당(St. Nicholas' Church), 골즈 킨스키 궁전(Kinsky Palace) 그리고 틴 성당(Church of Our Lady before Tyn)으로 둘러싸여 있고 광장 중앙에는 얀 후스의 군상이 서 있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로 불리기 때문에 늘 많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프라하의 구 시가지 광장 한가운데는 얀 후스의 군상이 서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붐벼도 너무 붐빈다는 것이었다. 뮌헨에서 프라하로 넘어왔으니, 그리 한적한 도시에서 옮겨온 것도 아닌데. 프라하의 구 시가 광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여행지'가 아니라 '관광지'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나마 광장은 넓은 공간이니 발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올드타운 골목들로 접어드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의 행렬에 섞여 들어갔고 결국 그들과 걸음을 맞춰 줄을 서듯 걸어가야만 했다.    




프라하의 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나는 행복해지지 못했다.


그 인파를 피해, 잠시 성 니콜라스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 성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꼽히며, 모차르트가 자주 찾아가 오르간 연주를 한 곳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성당을 조금 더 좋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성당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 순간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 들어왔고 결국 나는 이 성당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늘 그런 식이었다. 어느 곳에서도 단체 관광객의 무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물론 여행지에서, 여행하는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무리가 너무 많을 때는 그 여행이, 고통스럽게도 여행이 아니게 된다는 걸 프라하에서 깨달았다. 때문에 나는 그 아름답다는 프라하의 골목에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라하가 어째서 그렇게 아름다운지도 느낄 수가 없었다. 




결국 프라하의 올드 타운을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둘러본 후, 블타바(Vltava) 강가로 빠져나갔다. 이 강은 체코에서 가장 긴 강으로 독일에서는 몰다우 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프라하를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들이 이 강가로 나오는 이유는 블타바 강 때문이라기보다도 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카를교(Charles Bridge)’ 때문일 것이다. 


블타바 강에 처음 세워진 다리는 10세기경에 만들어진 목조 다리였다. 하지만 12세기, 프라하에 대홍수가 나면서 이 다리는 쓸려가 버렸다. 12세기 중반, 유디트교를 다시 만들었지만 이 다리 역시 1342년에 무너졌다. 이후, 카를 4세가 성 비투스 대성당(St. Vitus Cathedral)을 건축한 건축가에게 이 다리의 건축을 맡겼고 1402년, 카를교가 탄생했다. 카를교는 현존하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다리이다.  


하지만 카를교가 수많은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이 다리가 가장 오래된 석조 다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다리의 독특한 형상과 이 다리 위를 가득 메운 예술적 분위기 때문이다. 카를교의 양 끝에는 고딕 양식의 교탑이 서 있고 다리 위에는 서른 개의 성상들이 좌우 난간에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이 다리 위에는 화가, 음악가 등의 예술가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념품들을 파는 상인들이 있어 여행자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게다가 이 카를교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의 야경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있으니 이 카를교가 여행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란 사실 상 불가능에 가깝다. 




카를교의 전경. 다리 난간에 좌우로 서 있는 성상의 모습이 독특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다리 위의 인파가 아닌가 싶다. 출처: 위키백과.


그러니까 카를교는 그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인파를 피해 블타바 강가로 도망 나온 나는 카를교 위에서도 당연히 행복할 수 없었다. 나를 밀치고 가는 누군가의 어깨 때문에, 잠깐 풍경을 감상하느라 서 있으면 불쑥 내 시선을 가로막는 누군가의 카메라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들의 목소리 때문에, 결국 카를교를 건너는 일도 포기해버렸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가장 낭만적인 도시'에 있는 '가장 낭만적인 다리'인 양 이야기했지만, 내가 프라하의 카를교에서 본 것은 '사람들' 뿐이었고 그곳에서 한 일도 그저 사람들에 떠밀리는 일뿐이었다. 


결국 카를교에서 내려온 나는, 겨우 비어 있는 벤치를 하나 찾아내 잠시 그곳에 주저앉았다. 여행지에서, 수많은 여행자를 만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프라하에서는 유난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디든 인파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다른 도시로 떠나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도시에선 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적어도 유람선 안에서는 사람들에 떠밀려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한 이유였다. 블타바 강은 그 길이에 비해 그 폭은 별로 넓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강 위로는 수많은 크루즈가 오가고 있었다. 카를교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관광객이 블타바 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세 시간 정도까지 다양한 형태의 크루즈가 운행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가장 한적해 보이는 아주 평범한 크루즈를 골라 그 위에 올랐다. 





크루즈를 타며 바라본 카를교.


다행히, 내가 탄 크루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온 사람들도 꽤 여럿 보였다. 간단한 음료도 서비스하고 있어 필스너(Pilsner. 체코의 대표적인 맥주) 한 잔을 시켰다.  





그렇게 작은 필스너 한 잔을 마시면서 겨우 평화를 찾았다. 이때 유람선으로 숨어 들어가 사람들을 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짐을 싸서 '체스키 크롬로프'로 떠나버렸을지도 몰랐다. 




카를교를 다시 찾은 건, 해가 지고 난 이후였다. 아무리 카를교가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해도, 그토록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프라하의 야경을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성가신 마음을 이겨내고 다시 올드 타운 광장으로 나갔지만, 밤에 보는 그곳도 낮에 본 그곳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유명한 프라하의 야경 때문에 광장을 메운 사람들은 더 늘어나 있었고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어 프라하의 거리를 걸었다. 





프라하 구 시가 광장에 위치한 천문시계. 밤이 되어도 이 곳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그래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카를교로 발길을 옮긴 것은 내가 프라하를 여행하는 동안 가장 잘한 (어쩌면 유일하게 잘한) 일일 것이다. 물론 그곳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많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람이 많아서 어두운 밤에 혼자 다녀도 무서울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줄을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을 따라서 걷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길을 잃을 염려 또한 없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카를교에 도착했다. 그리고 카를교 탑을 지나 다리로 올라서는 순간, 어디선가 노래가 들렸다. 아는 노래가 아니었는데도, 어쩐지 귀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한국 노래였다.   


별생각 없이 그 노랫소리를 지나치려던 나는, 정말로 누가 나를 끌어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노래가 들리는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몇몇 사람들이 노래하는 이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서 있었다. 그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누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보았다. 그러니까 그곳에는, 한국에서 온 것이 분명한 한 젊은 청년이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가 노래를 잘했는지 잘하지 못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꽤 듣기 좋았던 것으로 보아 잘했던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의 노래 솜씨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카를교에서 한국 노래를 듣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냥 한국 가요 한 곡일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쨍할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밤의 블타바 강을 바라보면서 그 노래를 들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어쩐지 하루 내내 쌓여있던 답답함과 짜증스러운 기분이 가라앉았다. 알지도 못하는 이가 부르는, 알지도 못하는 노래가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때문에 나는 그에게 노래를 한 곡 더 청하고 싶어 졌고 그래서 지갑 속에서 50 코루나짜리 지폐를 한 장을 꺼내 그의 기타 박스 속에 넣었다.  




'보고 싶소'라는 가사 하나를 알아듣고 이 노래를 한참 찾았다. '바람, 그리고 연가'라는 곡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때 경찰로 보이는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사실 카를교에서 노래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반드시 허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경찰은 그에게 허가증을 보여달라고 한 모양이고 당연히 그는 허가증이 없는 듯했다.   

  

"여기서 노래하면 안 된대요?"


라고 물으니, 그렇다는 말이 돌아왔다. 제복을 입고 나타난 그녀가 그에게 너무나 정중히 이야기했기에 마음이 상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국 노래를 한 곡 더 듣고 싶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노래 너무 잘 들었어요. 한 곡 더 불러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아쉬움을 토로하자,


"그러게요. 저도 카를교에서 그냥 노래해보고 싶었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카를교에서 한국 노래를 들은 것이 나에게 특별했던 만큼, 그곳에서 한국 노래를 부른 것이 또 그에게 특별했을 거란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는 다시 기타를 들고 구 시가 광장으로 가 노래를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까지 따라가 노래를 듣진 않았다. 대신 프라하에서 머무는 동안 마음이 지칠 때면, 가끔 내 카메라 속에 담긴 그 노래를 다시 들었다. 그러니까 프라하가 나를 한 번은 행복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1. DB - Deutsche Bahn. 흔히 짧게 DB라고 줄여 부르는 독일 철도 주식회사이다.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독일과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철도 및 관련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뮌헨에서 프라하까지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시설이 매우 우수할 뿐 아니라 그 가격도 합리적이어서 추천할 만하다. 


2. 신성로마제국 - 962년부터 1806년까지 이어진 기독교 성향이 강한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연방체를 말한다.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여, 11세기 무렵에는 '로마 제국(Römisches Reich)', 12세기 무렵에는 '신성 제국(Heiliges Reich)', 13세기 이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이라고 칭하였다. 1806년, 프란츠 2세가 제국의 해체를 선언했다. 


3. 얀 후스 -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파문당했고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 당했다. 이후, 그의 교시를 받던 보헤미아인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박해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후스 전쟁이다. 프라하의 구 시가지 광장 중앙에는 후스의 군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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