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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19. 2017

Berlin. 내게는 너무 완벽한 베를린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다섯. 독일, 베를린 (2)



독일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하지만 이 하루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 나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그런 나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 은경 언니는 '오늘은 뭐할 거예요?'라고 두 번을 연달아 물어 왔다. 딱히 갈 곳이 없으면 오늘 같이 다니자는 뜻이다. 별다른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던 나는 그냥 언니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찾아간 곳은 '유대인 박물관(Jewish Museum Berlin)'이었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린덴 거리에 있다. 1933년, 바로 이 자리에 유대인 박물관이 설립되었지만 1938년 나치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었다. 분단 시대에 이 지역은 구 동독에 속했기 때문에 구 동독에서 새로운 유대인 박물관을 복구하였다. 하지만 통일 후, 베를린 시의회에서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로 했고 디자인 공모를 거친 후, 2001년 지금의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인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했는데, 유대인들이 사라져 간 흔적과 그들의 감성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설계된 디자인의 독특함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이 유대인 박물관은 1999년, 전시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건물만 개방을 하였는데 그때 이미 엄청난 관람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위에서 보면 지그재그 모양을 띤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유대인 상징인 다윗의 별을 형상화한 것이다. 



유대인 박물관 조감도 (출처: 위키피디아)


 사실 난 문학이나 역사에는 관심이 많아도 미술이나 건축 등에는 문외한인데, 은경 언니는 오히려 그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까 내가 유대인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유대인 박물관에 가보고 싶었던 것과 달리, 언니는 이 박물관의 디자인을 직접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박물관에 도착한 이후에도, 내가 전시자료마다 쓰여있는 설명을 읽느라 바쁘다면 언니는 이 박물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덕분에 나도 이 건축물의 설계자인 '다니엘 리베스킨트'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 모양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관심이 있는 것만 보이는 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연속의 계단'


이 박물관은 크게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연속의 계단'이다. 두 번째는 베를린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는 '호프만 가든'이고, 마지막이 '홀로코스트 보이드'이다. 




유대인의 얼굴을 상징하는 철판들. 공백의 기억(Memory of Void)


리베스킨트는 이 건물의 기본 개념을 공백(void)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유대인이 사라진 자리,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인간성 등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공백의 개념을 이 박물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이 '공백의 기억' 공간이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듯한 이 철판 위의 표정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유대인들의 고통이 느껴진다. 


이 박물관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시 자료도 많고 그 규모도 큰 편이라 박물관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린다. 유대인 학살에 관한 자료만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민족 자체에 관한 박물관이므로 유대인의 역사, 생활, 풍습 등을 모두 다 볼 수 있다. 마침 폴란드 여행을 하고 베를린으로 넘어온 터라 나에게는 이 유대인 박물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탄압받은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의 모습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서너 시간쯤 같이 또 따로 이 박물관 안을 함께 거닐다가 오후 네 시쯤 우리는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와 은경 언니는 별로 닮은 점이 없었지만 독일에 대해 꽤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같았다. 나는 독일이 처음이었지만, 언니는 17년 전에 이곳에 있었다 했다. 


“그러니까 17년 전에, 그 해 마지막 날에 내가 여기 있었거든요. 그때 호스텔에서 애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폭죽놀이하는 거 보러 가자고 해서 막 몰려 나갔어요. 가는 길에 엄청 헤매고 또 가니까 거기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브란덴부르크 문 앞까지는 가지도 못했어요. 그래도 사람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위로 폭죽을 엄청 터트리는 건 봤죠. 그런데 여기를 내가 17년 만에 다시 왔네요."


그렇게 말하는 언니는 감회에 젖어 보였다. 당연히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만약 스페인이나 터키를 한 10년쯤 후에 다시 찾으면 나 역시 지금의 언니처럼 옛 추억에 한참이나 빠져 있을 터였다.  


그런데 정작 그 브란덴부르크 문을 직접 앞에서 본 적이 없다는 은경 언니의 말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나는 언니를 데리고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찾아갔다. 사실 은경 언니는 그 날 오후 오후 여덟 시에 오페라를 한 편 보기로 되어 있었고, 나에게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 박물관을 나왔을 때 언니는 숙소로 돌아가 잠깐 쉬었다고 나올 생각이었고, 나는 전날 미처 구경하지 못한 도심의 거리들을 좀 더 걸어 다닐 생각이었는데, 이번에는 은경 언니가 자신의 계획을 바꿔서 나를 따라 시내 중심가로 나갔다. 


그래서 함께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도착해 서로 사진도 찰칵찰칵 좀 찍어주고, 갑자기 쏟아진 비에 버스를 타고 비를 좀 피했다가, 결국은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베를린 시내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전승기념탑


그리고 언니가 오페라를 보러 간 뒤, 나는 혼자 전승 기념탑 쪽으로 향했다. '베를린 전승기념탑'은 베를린의 티어가르텐(Tiergarten) 중앙부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이 67미터의 석조 탑이다. 엄청난 높이를 자랑하는 탑이므로 베를린 시내를 지나가다 보면 어떻게든 마주치게 된다. 프로이센 왕국 시절,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독일어:Schleswig-Holsteinischer Krieg) 승리를 기념하여 지은 탑인데, 기적적으로 세계대전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제 모습을 지켰다고 한다. 탑 내부에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정상의 전망대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탑의 꼭대기에는 승리의 여신인 빅토리아가 서 있는데, 이 전승기념탑을 꼭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여신상 때문이었다. 승리의 여신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래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속에서 이 여신상을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빅토리아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주인공 다니엘


1987년 개봉한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는 살면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 중 하나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베를린 하늘의 천사 다니엘인데(영화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이다), 다니엘은 장벽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 베를린을 내려다보며, 이 도시 사람들의 외면과 내면을 보고 모으고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다니엘이 가끔 도시를 내려다보며 앉아있는 곳이 바로 전승기념탑 위에 서 있는 빅토리아 여신의 어깨이다. 

  

어릴 적엔, 저 여신상이 실제로 베를린에 존재하는 줄 몰랐다. 나중에 저 여신상이 정말로 베를린 시내 한가운데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랫동안 베를린에 와보고 싶었다. 물론 나는 다니엘처럼 여신의 어깨에 앉을 수 없지만, 그래도 버스를 타고 여신상 바로 곁을 지나갈 때면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영화를 처음 본 날로부터 십오 년쯤 시간이 지난 후에 드디어 다니엘의 도시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승기념탑을 지나 '카이저 빌헬름 교회(Kaiser Wilhelm Gedachtnskirche)'까지 다녀왔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1890년, 지은 교회인데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첨탑의 일부와 중앙현관만 남긴 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이 교회를, 그런데 독일 정부는 일부러 복원하지 않고 폭격당한 모습 그대로 남겨 놓았다. 그토록 화려했던 이 교회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후손들에게 전쟁의 위험성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의미로 꼭 한번 들러볼 만한 카이저 빌헬름 교회를 다녀오는 것으로 둘째 날의 여정은 끝이 났다.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은경 언니는 먼저 드레스덴(Dresden)으로 떠났다. 마침 나 역시 하루 늦게 드레스덴으로 향할 계획이어서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이 마지막 날,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와 테러의 토포 그래피 박물관(Topographies des Terrors), 그리고 도이처 분데슈타크(Deustscher Bundestag. 독일 국회 의사당)를 보러 가기로 했다. 


체크 포인트 찰리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경계에 있던 연합군과 소련군의 검문소로, 미군 관할에 있었다. 어째서 ‘찰리’라는 이름이 붙은 걸까 궁금했는데 특별히 다른 의미는 없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금은 검문소의 흔적만 남아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정도의 장소로 남아 있다. 때문에 굳이 이곳을 찾아갈 생각은 없었는데 테러의 토포 그래피 박물관을 가려면 어차피 이곳을 지나가야 했기에, 겸사겸사 이곳에도 들러보기로 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그려진 벽화 속 체크포인트 찰리.


카페 안에서 바라본 '체크 포인트 찰리' 


이 체크포인트 찰리를 등지고 서서, 왼쪽으로 난 길로 10~15분쯤 걸으면 테러의 토포 그래피 박물관이 나온다. 이 박물관은 나치가 집권했을 당시 벌어진 수많은 공포(Terrors)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나치 독일 시절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Gestapo)의 본부 자리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스트 사이드와 함께 아직까지 남아 있는 베를린 장벽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수많은 사진, 비디오, 기사 등을 충실하게 전시해 놓았음에도 입장료는 받지 않고 있다. 곧 찾아갈 도이처 분데슈타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베를린은 가난한 여행자가 여행하기에 참 좋은 도시이다. 이 도시에서는 배우는 데 많은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박물관을 한참 집중해서 둘러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내가 여권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 날은 독일 국회 의사당에 가기로 되어 있는 날이고, 이곳에 가려면 회신받은 예약 메일과 (출력을 해 갈 필요는 없다) 여권을 가지고 가야 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아침부터 국회의사당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으면서, 여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결국 난, 테러의 토포 그래피 박물관을 끝까지 다 둘러보지는 못한 채 숙소로 돌아가야만 했고, 이번엔 꼭꼭 챙겨 들고 나와 독일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베를린에서 가장 가볼만한 곳 중 하나인, 독일 국회의사당


독일 국회의사당은 1871년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이후 건설이 계획되어, 1894년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1933년 발생한 화재로 본회의장이 불탔고, 이 때문에 돔을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 국회의사당은 더 크게 파손되었다. 


전쟁 후, 폐허에 가깝게 내버려져 있던 국회의사당이 다시 이용된 것은 1990년, 독일이 통일을 이룩하던 해였다. 이때 역사적인 첫 연방의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이 독일 국회 의사당은 재건축되었다. 


이 건축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바로 지붕에 위치한 돔(cupola)이다. 보통 돔은 교회나 왕권과 같은 종교적 혹은 정치적 권력을 상징하기 위한 건축 양식인데 독일은 자신들의 국회의사당에 이 돔을 세웠다. 통일 후, 이곳을 재건할 때 노먼 포스터는 돔 부분을 유리로 만들어 전망대와 의사당 안쪽을 언제나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국민이 의원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의회는 늘 투명하게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독일 국가 의회 의사당은 회의가 열리지 않을 때는 하루에 여덟 번씩 가이드 투어를 하고 있다. 이곳에 올라가면 이 건물의 독특한 돔 부분을 직접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베를린 시내를 360도로 내려다볼 수 있기에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사실 우리나라 국회에도 아직 들어가 본 적 없는 나로서는, 국회의사당을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이곳을 개방하고 있다는 사실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단, 예약은 반드시 해야 한다. 예약은 국가 의회 의사당 홈페이지(www.bundestag.de)에서 하면 되는데,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해두는 것이 좋다. 


나는 일부러 해가 질쯤의 시간을 선택했다. 노을이 지는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6시 45분에 입장하겠다고 예약을 했고, 6시 30분쯤 간단한 검사를 받은 후 국회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바라본 노을


입장은 다 함께 하지만, 돔으로 올라가면 자유롭게 개별 관람을 하면 된다. 또한 입장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내려오는 시간은 자유이니 폐관 시간 전까지는 마음껏 그곳에 머물러도 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돔 바로 입구에서 가이드 역할을 해줄 라디오를 받을 수 있다. 돔에서 보이는 베를린 시내의 대표적인 건물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니, 챙겨 가도록 하자. 그걸 귀에 꽂고 돔을 오르기 시작하면 '자, 오른쪽으로 보세요. 이 건물은 무엇이며...' 하는 식의 설명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꽤 흥미롭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곳에 6시 45분에 입장하겠다고 예약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돔을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국회의사당의 옥상에 섰을 때 갓 노을이 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곳에서 정말 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사진들만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그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몇 장뿐이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 본다. 





베를린은 도시 자체가 마치 하나의 박물관 같다. 그리고 나는 그런 베를린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베를린은 아주 흥미롭거나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인 도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베를린에 넘치는 그 역사적인 느낌이 좋았다. 이 도시는 쾰른이 아름다운 대성당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고, 밤베르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간직되고, 뮌헨이 활기찬 젊은이들의 도시로 나아가는 동안 독일이 걸어온 역사를 하나하나 잘 품어서 간직해가고 있는 어머니처럼 느껴졌다. 비록 그 어머니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그런 어머니는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베를린에서 독일의 역사적인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역사를 숨기거나 부정하면서, 그 모든 부끄러운 과거를 크레인으로 밀어버린 후 완전히 새로운 얼굴을 만드는 대신, 지난 일들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나라의 얼굴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베를린이 좋았다. 무거운 역사를 품고 있지만, 그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했으니까. 


게다가 베를린은, 어쩐 일인지 대도시가 가지기 쉬운 혼잡함 같은 걸 보이는 법이 없었다. 이곳은 그 큰 규모에 비해 너무나 조용하고, 점잖아서 이방인인 나에게도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교통은 편리했고, 치안은 훌륭했다. 내로라하는 경제 대국의 수도임에도 믿을 수 없는 물가로 나를 괴롭히지도 않았고, 관광객이 많이 모여드는 도시 특유의 상업적인 느낌도 별로 없었다. 거리 이곳저곳에서도 저렴한 가격으로도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언제 어디서든 갈증을 가시게 해주는 다양한 풍미의 맥주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본적인 영어 회화 정도는 할 줄 알았고, 간혹 영어를 전혀 못한다고 해도 


“난 영어 못해!”


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나를 외면하는 대신, 뻔할 뻔자인 여행객의 문제를 빨리 알아채고 독일어로나마 대답을 해주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바빠 보였지만, 공원에서 조깅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간혹 거리에서 맥주병을 들고 술을 마시고 있는 이들이 보였지만 그들은 취해 있지도, 그래서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베를린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이 베를린과의 마지막 순간을 이 특별한 국회의사당에서 보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그래서 한참을 이곳에서 머물며,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날이 어두워지고, 공기가 쌀쌀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을 했다. 만약에 나에게 다음에 살 도시를 정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바로 이 베를린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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