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다섯. 독일, 베를린 (1)
바르샤바에서부터 야간 버스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하니 아침 8시였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버스에서 내리니 휘청-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바르샤바에서는 계속 비가 내렸는데 베를린은 하늘이 맑았다. 그 맑은 하늘 아래,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서 있는 게 괜스레 부끄러워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리고 주위를 빙- 한 번 둘러보다가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는 것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터미널에서부터 숙소까지는 멀다는 것. 즉,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뭐든 타긴 타야 하는데. 베를린의 교통 체계는 이곳에 처음 도착한 사람에게는 너무 복잡해 보여, 지하철 노선도 앞에 서 있자니 무슨 미로 도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우선 물이나 한 잔 마시고 생각하자 싶어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생수를 골라 드는데 마침 내 옆으로 직원으로 보이는 한 아가씨가 지나가기에 별 생각 없이 물었다.
“혹시 여기서 S반을 어떻게 타야 하는지 알아?”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사실 친절한 대답 같은 건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터미널에는 뭔가를 살만한 곳이 그곳뿐이라, 편의점 안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것저것 알아내야 할 것 많은 여행객들은 매일매일 그곳으로 몰려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똑같은 질문들을 해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여행객들을 지긋지긋해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내 질문 앞에서 화아아아알-짝! 미소를 짓더니
“네 목적지가 어디인데?”
라고 물었고,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아, 미소라니. 그러니까 폴란드에서는 결코 쉬이 볼 수 없던 너무나 밝은 미소였다.
베를린은 그렇게 내게 미소의 도시로 다가왔다. 그것은 결코, 베를린으로 오면서 내가 기대한 것 중 하나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독일인은 이성적이고 그래서 좀 차갑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나는 독일에 도착한 그 아침에만도 세 명의 친절한 독일인을 만났다. 그 편의점에서 일하던 여직원은 주섬주섬 지하철 노선도를 꺼내는 나에게 아주 친절하게 S반을 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환승을 하려는 나에게 역사에서 일하던 또 다른 여직원은 혹시 내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먼저 나에게 다가와 가는 길을 한 번 더 알려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 친절한 독일인은 그렇게 무사히 숙소에 도착한 후 나를 찾아왔다.
그러니까 사건은 더블린 공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더블린 공항에서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떠날 참이었다. 분명 비행기 시간보다 한참이나 빨리 도착했건만, 막상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다가 잡고 있던 캐리어를 놓쳐버렸고, 그러자 내 캐리어는 에스컬레이터의 가장 위칸에서부터 우르르 쾅쾅!!! 소리를 내며 저 1층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아서 얼마쯤 창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캐리어가 망가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짐을 부치려고 보니, 손잡이가 고장이 나서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때문에 oversize luggage를 부치는 곳까지 찾아가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 캐리어를 들고 크라쿠프까지 잘 도착했는데.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줄 알았던 내 캐리어가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죽어버린 것이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맡기려고 하는데, 갑자기 퍼져버린 내 캐리어 때문에 정작 더 당황한 건 내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던 남자 직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내 캐리어를 보관함 속에 넣으려고 하는 찰나 바퀴가 쑤욱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에게
“괜찮아. 괜찮아. 네가 부순 것 아니야. 얘는 원래 죽어가고 있었어.”
라고 진정을 시켜준 후, 혹시 이 근처 어디에서 싸고 괜찮은 캐리어를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또 다른 여직원이,
“음, 아주 좋은 게 필요한 게 아니라면 우리가 여분의 것을 가지고 있어.”
라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이 곳을 찾았던 손님들이, 떠날 때 그냥 두고 간 캐리어가 여러 개 있는데 자기가 봤을 땐 그중에서 쓸 만한 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원한다면 한 번 찾아볼게.'라고 이 정도 일은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 한 그녀는 나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더니 그곳에 있는 모든 캐리어를 하나하나 점검한 후 그중 가장 괜찮은 녀석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아, 그러니까 베를린의 첫인상은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었다.
그렇게 베를린과 기분 좋게 첫인사를 한 후, 다시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100번 버스를 탔다. 이 100번 버스는, 200번 버스와 함께 베를린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부러라도 한 번쯤 타게 되는 버스이다. 이 두 버스가 베를린의 유명한 장소를 거의 모두 거쳐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행자들 사이에서 ‘100번 버스 투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무리는 아닐 터. 나 역시 1일 교통권도 끊었겠다, 호스텔 체크인 시간까지는 여유도 많겠다, 이 100번 버스를 타고 우선 베를린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버스를 타고 얼마쯤 달리자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이 나타났고 '독일 국가 의회 의사당(Reichstags)'과 '전승기념탑', 그리고 '베를린 동물원'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버스를 타고 그대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더 좋았으련만. 그런 시스템은 아니어서, 결국 '카이저 빌헬름 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 앞에서 내려 다시 브란덴부르크 쪽으로 돌아오는 걸 택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에 있는 개선문으로 1791년 완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되었지만, 1957년부터 1958년까지 복원 공사를 거쳤다. 독일이 분단 상태에 있던 당시, 베를린 장벽의 상징적인 문이기도 했다. 베를린 여행은 바로 이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는 파리저 광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이 있다. 이곳은 내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와 함께 베를린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 이름이 한국식으로는 ‘공원’이라고 번역되긴 했지만, 이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에서 나무나 꽃이나 벤치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기록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는 단지 2,711개의 비석이 줄을 지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이 비석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학살된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서 2001년에 세워진 것으로, 우리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많은 비석들 사이를 걸어보는 일뿐이다. 그런데도 이곳을 걷다 보면, 그 어떤 유대인을 추모하는 공간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와 비극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유대인 학살에 관한 기록은 이 공원으로부터 남동 측에 있는 정보 센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보센터를 찾는 대신, 그 비석들 사이에 서서 도시의 중심부 한가운데, 이 도시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보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규모로, 유대인을 향한 추모 공원을 만들어 놓은 독일인들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피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과거일 거라고 생각했다. 잊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굳이 그 과거를 매번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과거를, 현재의 한가운데 커다란 형상으로 만들어놓고, 매일매일 마주치게끔 하는, 그래서 절대로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한 이 독일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 건지. 죄책감이나 사과를 넘어서, 역사를 좀 더 진지하게 반추하는 모습을 본 것 같아서, 나는 이곳에서 조금 슬프기도 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베를린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약 1,5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당시 현재의 베를린 지역에는 슬라브 민족이 살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1100년대이며, 1307년에 베를린과 쾰른(Koln)이 그들의 공동 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하여 공통의 시청사를 지었다. 15세기에 들어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 주의 중요한 도시로 자리 잡았다.
1701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베를린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71년에는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수도의 역할을 담당했다. 베를린이 수도의 역할을 잠시 뮌헨(Munchen)에 넘겨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분단되면서였다. 서베를린은 당연히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에 속했지만 그 위치가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때문에 동독이 계속해서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은 데 반해, 서독은 베를린 대신 뮌헨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면서 독일은 통일이 되었고 1991년, 베를린은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로 확정되었다.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을 둘러본 후, 나는 근처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나 박물관 섬 등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향했다. 당시 내가 머물던 숙소가 약간 외곽에 있었는데 체크인을 할 겸 들어가서 씻고 옷도 좀 갈아입은 후, 그곳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로 향한 것이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1.3km 길이의 베를린 장벽 일부에 조성된 갤러리이다. 1990년, 세계 각국의 미술가들이 그린 105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길고 가장 오래된 야외 공개 갤러리이다. 2006년 7월, 기존의 위치에서 40m 서쪽으로 옮겨진 바 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어쩐 일인지 나는 살짝 헤맸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메르세데스 벤츠 아레나(Mercedes-Benz Arena) 바로 옆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이니 그쪽으로 쭉 걸어가면 된다.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신문이나 방송에서, 잡지나 인터넷에서 수도 없이 그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직접 내 눈으로 본 이곳은 미디어를 통해서 본 것과는 많이 달랐다. <형제의 키스>처럼 유명한 작품이야 많이 접해 보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형제의 키스보다 더 인상 깊었던 많은 작품이 그곳에 있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 '벽'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이 왜 '갤러리'로 불리는지 제대로 이해하며 혼자서 천천히 백다섯 편의 그림을 감상했다.
이 긴 벽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한 번, 다시 저기부터 여기까지 한 번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다. 그러니까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네 시면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 유럽의 겨울이 말이다.
그 사실을 조금 슬퍼하며 숙소로 돌아왔을 때, 나처럼 까만 머리와 까만 눈을 한, 동양에서 왔을 것이 분명한 누군가를 마주쳤다. 내가 그쪽을 단번에 알아본 것처럼 그쪽도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면, 그쪽에서는 자신을 South Korea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그렇게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났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하고 있던 은경 언니를 말이다.
간단히 서로 인사를 하자마자 언니는 식당에 내려가 라면을 끓여먹을 생각이라며 같이 내려가지 않겠냐 물었다. 들어오는 길에 저녁을 먹은 터라 라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이 수다나 떨 겸 쫄래쫄래 언니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언니가 미리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도 한 잔 얻어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오랜만에 한국어로 떠난 수다 덕에 기분이 좋아졌다. 베를린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아침에는 친절한 세 명의 독일인을 만나고, 저녁에는 반가운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