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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15. 2017

Warsawa. 주머니 속의 30 즈워티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넷. 폴란드, 바르샤바 (2)

 

바르샤바에서의 둘째 날, 숙소를 나선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신세계(Nowy Swait. 노비 시비어트) 거리였다. 이 거리를 따라 잠코비(Zamkowy) 광장까지 올라가면서 올드 타운(Old Town)을 구경할 계획이었다. 노비 시비어트 거리는 바르샤바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거리인데, 가지 각각의 상점들과 레스토랑, 노천카페 등이 즐비하고 있어 이 도시에서 가장 걷기 좋은 거리라고들 한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걷기 좋은 거리라는 신세계 거리.


간밤에 내리던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아 다시 우산을 받쳐 들고 거리로 나섰다. 시간이 이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왠지 황량함을 느끼며 걷다가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성 십자가 성당(Holly Cross Church)이었다. 정면에 우뚝 솟은 두 개의 쌍둥이 첨탑이 무척이나 멋들어진 이 성당은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프레데리크 쇼팽(Frederic Chopin)의 심장이 묻혀 있는 곳이라 하여 매우 유명하다.


쇼팽은 폴란드인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 폴란드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이다. 폴란드의 관문인 바르샤바 공항의 이름이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인 것만 보아도 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쇼팽은 스무 살에 폴란드를 떠난 죽을 때까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시신은 파리에 안장되었지만 폴란드를 향한 쇼팽의 그리움과 애국심은 각별했다고 한다. 그래서 쇼팽의 묘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고 하고, 그의 심장은 그의 마지막 소원대로 조국으로 보내져서 이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십자가 성당 앞에 세워진 예수상이 인상 깊다.


사실 굳이 이 성당을 찾아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당 앞에 세워진,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상이 인상 깊어 자연스레 이 성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래서 이왕 멈춰 선 김에 성당 내부도 한 번 둘러보자 싶어 굳게 닫힌 문을 슬며시 밀어보았다. 밖에서 보았을 땐 짐작을 못했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매우 화려한 장식들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이 성당을 지을 때 금과 은을 무척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는 성 십자가 성당. 내부가 무척이나 화려하다.


이곳에서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곳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 곳에 쇼팽의 심장이 쉬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주위는 정성스레 꽃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군이 이곳을 파헤쳐서 쇼팽의 심장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17일, 쇼팽의 기일에 맞춰 그의 심장은 다시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쇼팽의 심장이 이곳에서 쉬고 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쇼팽의 심장이 있다.


이 성당의 맞은편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것으로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는 코페르니쿠스(Nicilaus Copernicus)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이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지동설은 천문학 사상 가장 중요한 재발견으로 여겨지는데, 놀라운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근거가 관측 결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철학적 직관이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아직 제대로 된 천체망원경이나 체계적인 관측 자료가 없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를 지나 조금 더 거리를 올라가면 '바르샤바 대학'과 '라지비우 궁(Radziwill Palace)'을 만날 수 있다. 바르샤바 대학은 폴란드 최고의 명문 대학이며, 라지비우 궁전은 현재 폴란드의 대통령 궁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라지비우 궁'의 경우 원래는 라지비우 가의 저택이었다고 하는데, 1817년 왕궁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곳이 극장으로 사용될 때는 쇼팽도 연주회를 연 적이 있다고 한다. 1955년에는 그 유명한 바르샤바 조약이, 1970년에는 독일 정상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1994년부터는 대통령 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신세계 거리를 차근차근 밟아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그 사이,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가 싶더니 곧 바람마저 우산을 뒤집어버릴 만큼 세차게 불기 전까지는 말이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당황한 나는 결국 잠코비 광장까지 가지 못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커피숍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 


나의 다음 목적지가 잠코비 광장에서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Warsaw Uprising Museum)’으로 바뀐 건 바로 그 커피숍 안에서였다. 날은 춥고 비는 그치지 않고 바람마저 황량하게 부는 이 날씨에 거리를 헤매는 건 좋은 선택 같지 않았다. 어디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듯했고, 그래서 어느 곳이 나의 목적지로 적당할까 고민을 하다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이 눈에 띄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박물관은 지금껏 내가 유럽 여행을 하며 가보았던 그 어떤 박물관보다도 더 크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더 규모가 크고 더 역사가 오래되고 더 많은 유적들을 갖춘 박물관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이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만큼 나를 집중하게 만든 박물관은 쉬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1944년의 바르샤바를 재현해 놓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1994년 건립되기 시작해,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던 2004년 1월 31일에 개관하였다. 그 이름처럼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나치 독일의 점령에 항거하여 바르샤바에서 일어났던 민중 봉기에 관한 기록을 간직한 박물관이다.


바르샤바 봉기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나치 독일에 항거해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말한다. 이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 소련군은 나치 독일군을 궤멸하다시피 하며 바르샤바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지배도 싫어했지만 다시 소련의 지배권 아래 들어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오랜 악연을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영국에 있던 폴란드의 망명정부는 본국에 남아있던 폴란드 군에게 무장봉기를 지시했고, 그렇게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 봉기는 63일 동안 이어졌는데, 독일군은 봉기 군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바르샤바 전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봉기 군뿐 아니라 20만 명이 넘는 민간인 또한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시민들 역시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폴란드의 국내군 조직은 거의 괴멸 지경에 이르렀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위에 소련의 붉은 군대까지 행진해 들어왔다. 붉은 군대는 그나마 남아있던 폴란드군 소속 병사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보내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바르샤바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 만큼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그럼에도 폴란드 인들은 이 봉기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실제로 바르샤바 여행을 하다 보면 바르샤바 봉기를 뜻하는 상징을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또한 매년 8월 1일에는 이날을 되새기기 위해 1분간 사이렌이 울리는데, 이때는 시민들 모두가 잠시 정지해서 1분 동안 침묵을 지키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고 한다.




이 박물관은 바르샤바를 찾았다면 꼭 한번 가보아야 할 곳이다.


이토록 처참한 그리고 영광스러운 사건을 다루고 있는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그 당시의 상황을 사진, 영상과 음성 자료, 편지 등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독일군의 지배를 받는 동안 바르샤바에서의 삶이 어떠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봉기 때 사용된 항공기도 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실은 그 생생함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단 하나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곳인 만큼, 이 박물관을 거닐다 보면 실제로 그 사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는 이 박물관이 문을 닫기 직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길지 않은 내 바르샤바 일정에서 반나절을 꼬박 이 박물관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여행 중에 뭔가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알려준 곳이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여행을 이토록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것도 다시 깨닫게 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드디어 도착한 잠코비 광장. 비는 그쳤지만, 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하다.


크라쿠프에서는 4박 5일을 보냈지만, 바르샤바에서 보낼 시간은 2박 3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 사이 이틀 밤이 지나갔고 그러니 이제 남은 건 베를린으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기 전까지의 하루뿐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일어나 체크아웃을 끝낸 후, 다시 '잠코비 광장'으로 향했다. 여행자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라도 바르샤바의 올드타운을 꼭 둘러보고 싶었다. 그런 내 오기가 이번에는 통했는지 다행히도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다.   


그렇게 드디어, 잠코비 광장에 도착했다. 이 광장은 왕궁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왕궁 광장이라고도 불린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지그문트 3세의 기념비였다. 폴란드의 수도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긴 그 지그문트 3세 말이다. 그리고 그의 뒤로 서 있는 건물이 바로 왕궁인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왕궁 옆으로는 성 요한 대성당과 예수회 교회가 있고, 이 두 건물을 지나 골목을 돌면 '구시가 광장(Old Town Market)'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구시가 광장을 지나고 나면 올드 타운이 끝나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이 도시를 감싸고 있던 옛 성벽의 일부가 나타난다.  





마리 퀴리 박물관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벽화. 하지만 현재는 맞은편에 있는 건물이 박물관을 대신하고 있다.


이 성벽을 넘어가면 바르샤바의 신시가지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신시가지는 잘 구경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 마리 퀴리(Marie Curie) 박물관이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마리 퀴리는 최초의 방사성 원소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세계적인 과학자이다.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개인으로서 노벨상을 두 번 이상 받은 사람은 미국의 화학자 라이너스 칼 폴링( Linus Carl Pauling)과 마리 퀴리뿐이라고 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와 결혼을 하면서 프랑스 국적을 얻긴 했지만,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 현재 퀴리 부인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곳은 실제 그녀의 생가였다고 하는데, 정작 가보니 박물관은 그녀에 관한 벽화가 그려진 건물이 아니라 그 맞은편 건물로 이전해 있었다. 아마도 벽화가 그려진 쪽이 그녀의 생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쇼팽의 마지막 살롱을 재현한 곳. 실제로 쇼팽이 파리에서 사용했던 피아노라고 한다.


이렇게 마리 퀴리 박물관까지 둘러보고 나온 다음에는 '쇼팽 박물관'을 다녀오기로 했다. 이 박물관은 쇼팽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으로 폴란드의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에 있는 쇼팽의 생가와는 다른 곳이다.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 다섯 개의 층에 걸쳐 쇼팽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에서는 쇼팽의 음악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이 고즈넉하게 마련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곳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1층에서는 쇼팽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볼 수 있고, 2층에서는 쇼팽이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절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3층에서는 쇼팽이 다녀왔던 다양한 국가들과 그의 죽음에 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바르샤바의 거리에, 해가 저문다.


그렇게 쇼팽의 박물관까지 둘러보고 나온 후에도 여전히 시간이 한참 남는다. 그래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 싶어 커피숍에 들어갔다가, 문득 깨달았다. 몇 시간 후면 폴란드를 떠나야 할 사람 치고 내가 너무 많은 즈워티(PLN. 폴란드 통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폴란드 물가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저렴했다. 동유럽 물가가 싸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싸 봤자 얼마나 싸겠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더블린 물가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폴란드에서 지내려니 매번 뭔가를 먹을 때마다 ‘뭐야? 이걸 다 합해도 겨우 이 가격밖에 안 한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덕분에 참 즐겁기도 했지만, 문제는 때문에 생각보다 너무 많은 즈워티가 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돈으로 무얼 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여행 중 처음으로 쇼핑을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즈워티를 그대로 남겨가 다시 유로로 바꿔도 되지만 그렇게 해봤자 아일랜드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듯했다. 그러니 이래저래 수수료를 낭비할 바에야 폴란드로 여행 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싹쓸이를 해간다는 지아자 크림이라는 것을 나도 한 번 사 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폴란드의 화장품 샵에 들렀다가, 그 놀랄 만큼의 저렴한 가격들을 접한 후 여행 중 처음으로 더 큰 캐리어를 가져왔어야 했다고 얼마간 후회를 했다. 그래도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인 내 가방을 생각하여 적당한 선에서 쇼핑을 중단하고, 그러고도 남은 돈으로 폴란드에 온 이후 가장 근사한 식사를 하고 (정확하게는 가장 비싼 식사. 그다지 근사하진 않았다.) 팁까지 넉넉하게 챙겨준 후에 다시 짐을 찾은 후 터미널에 가서,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그 버스를 타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고도 나에게는 여전히 30 즈워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폴란드를 떠나 독일로 향하니 이 30 즈워티를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30 즈워티면 7유로가 조금 넘는 돈이니 유로로 다시 환전을 하는 것도 우습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 돈을 잘 간직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 남은 즈워티가 언젠가 나를 다시 폴란드에 오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희망 같은 것을 품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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