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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슬기 Feb 20. 2022

고교비평준화 지역에서 산 30대의 뒤늦은 고백

지금으로부터 15년도 훌쩍 넘은 중학생 시절. 기억하려고 해도 흐릿한 그때지만, 어떤 순간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시험을 보면 담임선생님이 교탁에 서서 성적표를 나눠줬었다. 얇디얇은 한 줄로된 종이에 국어, 영어, 수학 등 과목 순서대로 성적과 반 등수와 전교 등수가 적혀있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는데, 그보다 더 긴장되는 건 가장 친한 친구의 성적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내 성적을 받고나면 ‘그 친구가 나보다 등수가 좋을까’, ‘내가 그 친구보다 잘했을까’가 가장 궁금했다. 아마도 그 친구도 나와 비슷했던 거 같다. 성적표를 받은 후 청소시간이면 빗자루질을 하며 운을 띄웠다.


“나 이번에 미술에서 평균 점수 다 깎아 먹었잖아.”

“에이~ 미술은 그래도 비중이 낮잖아. 나 이번에 국어 망했다.”

“망했다고 하면서 맨날 나보다 높잖아. 몇 점인데? 90점 안 돼?”

“아니 90점은 넘는데 저번보다 떨어졌어…”


궁금하면 속 시원히 점수를 보여주고 이야기하면 좋았으련만. 경쟁심을 꽁꽁 숨기고 서로 간만 보다가 흐지부지 대화를 끝내곤 했다. 그런 대화가 끝나면 항상 마음이 찜찜했다. 망했다면서도 나보다 잘하는 친구가 괜히 밉고 부러웠다. 가끔 내가 이겼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잠깐 기분이 좋았는데 이걸 친한 친구에게 말할 수도 없어 마음 한켠이 허전해졌다.



체육 수행평가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도 있다. 축구 시험이었는데, 직선으로 드문드문 작은 깔때기를 세워놓고 그사이를 축구공을 요리조리 옮기며 달려가는 거였다. 애초에 운동신경도 체력도 없는 편이라 이를 해내기 위해 주말이면 집 앞으로 나와 사람 없는 곳에서 연습했었다. 혼자 몇 번 뛰다가 넘어졌는데, 시멘트 바닥이라 어찌나 아프던지 무릎이 찢어지고 피가 철철 났다. 그 흉터 자국은 아직도 남아있다.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우는데, 아파서 우는 것보단 이 다친 무릎 때문에 수행평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울었다. 내가 못한 만큼 더 많은 친구들이 날 앞질러 갈 것이고, 그걸 다른 과목으로 메울 수 있을까 막막했다. 다친 날 보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 날 제쳤다고 조금은 기뻐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어릴 적 여러 번의 이사 끝에 정착하게 된 곳이 광명이었는데, 당시 이곳은 비평준화라서 중학교 내신점수와 고입선발고사 성적을 종합해 고등학교를 지원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지역의 분위기가 남달랐다. 중학교 성적이 좋아야 좋은 고등학교에 가고,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동네 학부모들의 정신이었던 거 같다. 덕분에 중학생 시절은 고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살았다. 집 근처에 있던 성적이 가장 좋아야 들어갈 수 있는 1순위 사립고등학교는 매번 수능이 끝나면 학교 건물만한 현수막을 걸고 동네방네 좋은 대학에 붙은 학생들을 홍보했다. 그 학교는 기숙학교라 주말이면 학교 정문이 인산인해로 북적였는데 왜인지 학생도, 학부모도 어깨가 한껏 솟아있는거 같았다. 아마도 내 시선에 부러움이 잔뜩 묻어있었기 때문이겠지. 이런 비평준화 분위기는 고등학교에 가고 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난 지역에서 2번째로 성적이 좋아야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체로 반에서 10등 이내로 들어와야 합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집과 학교가 멀어서 걸어가려면 40분은 훌쩍 넘었지만, 처음엔 다 좋았다. 동네에서 학교 이름을 말하고 교복을 살 때도, 학교 정문을 들어서 입학을 할 때도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나를 부모님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 같아 효도한 거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분은 학기 초 중간고사를 보고 다 무너져 내렸다. 난생처음 받아본 점수와 등수를 보고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에 충격을 받고 이걸 극복하지 못하겠다며 암담한 미래를 혼자 떠올렸다. 한마디로 망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웃긴 건 이 학교 교복을 입고 학원을 가거나 동네를 다니면 누구나 나를 공부 잘하는 사람을 본다는 것이었다. 학교 안에선 좌절감을 느끼고, 학교 밖에서는 우월감을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집에 가는 엘리베이터 안이었는데, 내가 교복을 입고 엘리베이터 입구 쪽에 있고 그 뒤로 어머니와 딸로 보이는 분이 계셨는데 그때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누구야 이거 봐라. 공부 못하면 이런 교복 입고 다녀야 해. 그러면 창피하지 않겠어?”

“엄마..이거 거기 학교 아니고 광명북고 교복이야.”


내가 다녔던 학교와 교복이 비슷했던 다른 학교를 비교하며 험담한 일을 직접 겪었는데, 이 일로 내가 배운 건 성적으로 사람이 차별을 당하는구나 그리고 성적으로 차별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다른 학교 학생이었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때는 거기까지 헤아리지 못해 내가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이게 좀 웃긴 일이라며 엄마와 친한 친구에게 말하기도 했었다. 



돌아보면 친구들과 지냈던 좋은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 성적을 생존의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었던 것, 좌절감과 우월감 속에서 차별을 배운 건 비평준화 지역이라는 배경이 주요하게 작용했던 거 같다. 비평준화가 도대체 뭐길래. 오히려 내가 수능을 볼 때는 정시보다 내신이 중요한 수시가 확대되어 좋은 고등학교면 좋은 대학교에 간다는 말도 무너졌었다. 또한 공고를 나와 경력을 쌓으며 매달 나보다 더 많은 생활비를 내는 친동생을 보면 대학을 나와야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건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때는 당연했던 게 지나고 나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다행히 10년 전인 2012년 광명은 고교평준화 지역이 되었고 많은 지역에서 이를 도입했지만, 아직도 비평준화 지역이 있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 동탄2신도시에 사는 중학생 안승민님의 오마이뉴스 칼럼에 이렇게 적혀있다.


“학교란 참 모순적인 공간이다. 배려와 협력을 가르치지만 정작 나는 옆에 있는 친구와 경쟁을 해야 한다. 옆에 있는 친구가 공부를 잘하면 내 내신 점수는 떨어지고, 옆에 있는 친구가 공부를 못하면 내 내신 점수는 오른다…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이런 경쟁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우리 사회가 가진 교육의 문제가 ‘비평준화'만은 아닐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할수록 교육의 목적이 좋은 대학 진학에 맞춰지는 것, 이력서에 학력을 적어야 하는 것, 출신 대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다 문제겠지. 허나 그 가운데 가장 빠르게 바꿀 수 있는 고교비평준화 제도가 아닐까 싶다. 그 변화로 중학생들의 일상은 당장 달라질 수 있다. 


잔인한 중학생 시절을 산 나에게, 잔인한 오늘을 사는 그에게 어제 몰랐던 걸 오늘 배우며 기분 좋은 성취감을 느끼고, 내 성적과 상관없이 친구가 얻은 성취를 기쁘게 축하해줄 수 있는 학창 시절을 선물해주고 싶다. 그게 30대가 되어서야 꿈꾸는 학교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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