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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1. 2024

장르들 사이에서

<파묘> 장재현 2024

*스포일러 포함     


 오컬트(와 포크호러)는 악마, 원혼, 귀신, 지박령, 정령, 수호천사 등의 이름으로 불려온 초현실적 존재들을 상대해왔다. 그것은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사람에게 빙의하기도,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을 괴롭히기도,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기 위해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의 맥락에서 오컬트라 불려온 것들은 대부분 포크호러에 가까운 맥락으로 소개되어 왔다. 김기영의 <이어도>가 그럴 것이고, <월하의 공동묘지>나 <여곡성>을 비롯한 ‘전설의 고향’ 류의 호러영화들이 그랬으며, <무녀도>나 <피막>처럼 무당이 중심이 되는 샤머니즘을 소재로 내세우기도 했다. 이용민의 <살인마> 같은 특이사례가 존재하지만, 그 또한 고딕호러적 외피에 ‘전설의 고향’스러운 내용을 품고 있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한국의 오컬트는 주로 무당과 샤머니즘을 중심으로 원귀를 내쫓는 이야기, 혹은 이방인을 내쫓는 이야기가 주를 이뤄 왔다. 나홍진의 <곡성>은 (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 두 가지 흐름을 함께 다뤄낸다.     

 장재현의 두 전작은 그러한 흐름에서 다소간 벗어난다. <검은 사제들>은 무속이 아니라 전형적인 엑소시즘의 클리셰를 끌어왔다. 주인공은 무당이 아니라 신부이며, 악마는 이유 없이 소녀의 몸에 빙의한다. <사바하>는 밀교라는 소재를 끌어들인다. 세속적인 목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슴동산’이라는 이름의 불교 기반 사이비 종교를 탐색한다. 다만 본격적인 오컬트나 포크호러라기보다는 가상의 사이비 종교 집단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추리극에 가까운 형태를 취한다. 다시 말해, 장재현의 영화들은 한국에서 오컬트 혹은 포크호러라 부를만한 주제들을 계속 벗어났다. <사바하>에 와서 오컬트는 장재현 영화의 표면이지 장르적 중심이 아니다. <파묘>는 그러한 지점이 더욱 분열적으로 드러난다.      

 <파묘>는 둘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LA에 거주하는 오래된 재벌 집안에 내린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화림(김고은), 봉길(이도현), 상덕(최민식), 영근(유해진)이 모이는 과정을 담아낸다. 의뢰인의 할아버지가 친일파였기에 부를 축적했으며, 그의 묫자리가 악지(惡地)에 있었기에 의뢰인까지 삼대에 걸쳐 저주를 받았음이 드러난다. 네 주인공은 굿을 하며 관을 파내고 화장을 하며 사건을 마무리한다. 후반부는 친일파의 관 아래 묻혀 있던 거대한 봉인된 관을 발견하며 시작된다. 거대한 관에는 오니가 된 다이묘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허리를 끊기 위해 그곳에 묻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네 주인공은 고군분투 끝에 그를 물리친다.     

 <파묘>의 전반부는 사람에 들린 저주를 풀고 악귀를 내쫓는 과정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오컬트 장르의 플롯을 일정 부분 따른다. 전반부에서 해결되지 못한 어떤 지점을 발견해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하는 후반부는 의문의 무덤/관과 그 지역에 얽힌 역사를 다룬다는 지점에서 포크호러에 가깝다. 물론 <파묘>가 <위커맨>에서 <미드소마>에 이르는 포크호러의 대표작들처럼 ‘닫힌 공동체’나 ‘컬트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속적인 것(음양사 기순애의 등장), 특정한 맥락을 구성하는 역사와 그로 인해 구성된 집단(친일파 후손 재벌 가족) 등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파묘>의 후반부를 포크호러적이라 부를 수 있겠다. 그렇게 둘로 나뉜 이야기를 하나로 봉합하는 것은 친일파 후손 가족에서 (일제 쇠말뚝 음모론을 주요하게 끌어온) 일제의 악행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쫓는 네 주인공의 추적극이다.     

 영화는 그렇게 여러 장르를 굉장히 분리된 방식으로 영화에 도입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하나의 맥락 속으로 통합하려 한다. 글의 초반에서 한국영화에서의 오컬트가 소화되어온 방식을 짧게 언급했지만, <파묘>는 오컬트와 포크호러로 거칠게 나눌 수 있는 맥락 속에 자신을 위치지으려 하지 않는다. <사바하>에서 장재현은 오컬트와 미스터리 추리극의 외피 속에서 식민지 남성성과 성감별 낙태, 여아 살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도리어 장르적 외피를 다소 무리할 정도로 훼손했다. 악마, 신, 교주, 뭐라고 부르던 미지의 대상이었던 그 존재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아우라는 급격히 소멸한다. <사바하>의 클라이맥스가 그랬고, <파묘> 후반부의 클라이맥스 또한 그러하다. 다이묘-오니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그것과 면대면으로 대적하게 되는 순간 그것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빠르게 해소된다. 영화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 파훼법을 찾아 대상을 (재차) 죽여버리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오컬트, 포크호러, 일제강점기, 음모론 등 다양한 재료를 뒤섞음으로써 발생하는 틈새는 친일파와 일본귀신의 처단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익숙한 한국관객의 쾌감으로 메꿔진다.      

 일제강점기와 그 여파는 오랜 기간 장르적으로 소화됐다. 우리는 그 역사를 만주극을 비롯한 액션영화와 몇몇 호러영화들, 21세기 들어 실존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운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마주할 수 있다. 최근의 몇몇 영화들은 더욱 장르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이해영의 <경성학교>와 <유령>은 일제강점기를 미스터리 호러나 밀실 심리 스릴러의 배경으로 끌어옴과 동시에,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것을 뒤엎는 액션의 활력으로 쾌감을 주고자 했다. 김홍선의 <늑대사냥>은 이야기의 기원이 일제강점기에 놓인다는 지점을 숨겨두었다가, 과장된 폭력과 핏빛 이미지들을 통해 그 기원을 하나의 당연한 사실로 설정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대상에 대한 장르화는 당시 존재했던 여러 제국주의적 악행을 당연한 사실로 간주한다. <파묘> 또한 그 연장선상에 놓인다. 다만 이 영화가 재료로 삼은 장르 속에서 과거는 당연한 사실보다는 다분히 상업영화적 쾌감에 자리를 내어준다. 둘로 나뉘어버린 영화는 결국 부정교합을 야기하고, 익숙한 방식의 쾌감으로 그것을 해결해보려는 시도는 몇몇 노골적인 대사로만 표현된다. 장재현의 앞선 영화들이 한국 상업영화라는 영역 속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활력을 더해주었다면, <파묘>는 그 영역에 너무 깊이 파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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