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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22. 2024

주어진 것

<수유천> 홍상수 2024

 영화의 제목이 처음 공개됐을 때 느꼈던 의아함을 떠올려 본다. 수유천은 없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되는 덕성여대와 그 인근에 흐르는 천은 우이천이다. 영화의 첫 장면이자 하루의 시작을 알리듯 반복하여 등장하는, 천변에 앉아 수첩에 수채화를 그리는 전임(김민희)가 있는 곳은 우이천이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수유천이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진행된 GV에서 홍상수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캐릭터들의 성질, 어떤 장소, 그날 하늘이 허락한 날씨가 있다. 이 세개의 요소가 내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내가 내게 허용하는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천’이란 없는 지명은 주어진 것인가? 주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      

 <수유천>은 홍상수의 근작 중에서도 유독 직선적인 이야기를 선보인다. 여대 강사인 전임은 연극 프로젝트의 연출을 맡아주던 남자(하성국)가 세 명의 여학생을 돌아가며 만난 사건으로 물러나자, 급하게 연극배우인 외삼촌 시언(권해효)를 데려온다. 시언의 팬이라는 정 교수(조윤희)는 시언을 환대한다. 학생들은 시언이 준비해 온 촌극을 연습하고, 무대에 올린다. <우리의 하루> 속 두 주인공이나 <여행자의 필요>의 이리스와 다르게, <수유천>의 인물들에겐 해결해야 할 과업이 있다. 그 과업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각 인물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난다. 이를테면 시언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초를 겪었던 예술인이었고, 난잡한 행실이 문제가 되어 연출을 못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는 익숙하게 봐온 공론화들을 떠올리게끔 한다. 물론 여기에는 별다른 가치판단이 없다. 영화의 촬영지가 여대이며 실제로 외부인의 출입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공간이기에 그에 관한 전임과 시언의 대화가 영화에 담긴 것과 같은 층위에서 이 사실들은 존재한다.      

 <수유천>은 인물들에게 부여된 목표들을 향해 움직인다. 천변의 전임에서 시작해 달을 비추며 끝나는 영화 속 하루의 사이클이 반복되고, 시간은 흘러 시언과 학생들의 촌극이 무대에 오르고, 정 교수와 시언은 연인이 된다. 인물들이 변화하고 조금씩 이동하는 동안 전임은 영화 속 반복에 속박된 것만 같다. 영화 속 첫 모습과 마지막 모습 사이의 차이가 캐릭터를 보여준다는 흔한 말에 다른 인물들은 (홍상수의 근작들 속 인물들과 다르게) 부합하지만 전임만은 그대로인 것만 같다. 장어집 옆의 개울에서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화면 바깥으로 나간 전임은 시언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그는 “거기 뭐가 있어?”라고 묻는 시언의 말에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답한다. 마치 이 주어진 것 바깥에는, 주어진 것을 찍는 영화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전임은 밝게 웃으며 말한다.     

 씨네21 <수유천> 특집에 실린 김민희 배우론에서 이우빈은 홍상수가 김민희를 정물로써 대한다고 지적한다. 천변에 앉아 있는 전임에서 시작해 밝게 웃는 전임의 얼굴 프리즈 프레임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마치 <소설가의 영화> 속 ‘소설가의 영화’에 등장한 김민희의 모습이 그랬던 것처럼 전임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김민희라는 존재를 찍어낸다. ‘수유천’이라는 가짜 지명이 영화 속 다른 존재들의 존재를 거스르듯 하는 인상을 주는 것과는 반대로, 전임/김민희는 영화 속에 주어진 가짜 사실들 속에서 가장 온전히 주어진 것으로 존재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부터 11편의 홍상수 영화에 출연한 그를 어떻게 찍을 것인지에 관한 대답들에, 하나의 마침표가 찍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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