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익사> 라우리나스 바레이사 2024
자매는 각자의 가족을 데리고 부모님이 남긴 시골집으로 휴가를 떠난다. 두 명의 아내, 두 명의 남편, 두 명의 자녀로 구성된 일행은 집을 정리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요리를 해먹고,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한다. 영화는 여섯 사람의 삶을 뒤바꿔 놓게 된, 그 휴가에서 벌어진 어떤 사고를 전후로 한 시간들을 다룬다. '마른 익사'는 물 속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지는 사고로 인해 폐와 기관지 등에 물이 들어차 서서히 죽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마른 익사'는 영화 속 사건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증상이 '익사'라기보단 감기나 폐렴과 같은 질병과 크게 구별되지 않기에 자신과 주변인들도 모르게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서서히 죽음으로, 파국으로 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여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리투아니아의 따스하고 활량한 풍경은 그러한 분위기에 힘을 더한다. 다만 영화는 '사건'을 영화의 중심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사건 이전과 이후를 교차시키기에, 관객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말로 누구의 실책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영화 내내 그려지는 두 남편 사이의 묘한 기싸움, 시골집을 청소하고 돌보는 일들이 성별분업화되어 있는 것에 대한 피로감, 서로 간에 직업적, 경제적, 신체적 차이들에서 오는 긴장감이 사건 자체의 파괴력을 대리한다. 문제는 그것이 비선형적 방식으로 편집되는 과정에서 관객에게 감정적 파고를 전달하는 대신 '진실'이라고 불릴만한 것에서 관객을 배제한다는 인상을 준다는 지점이다. 그럼으로써 <마른 익사>는 드라마와 미스터리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클라우드> 구로사와 기요시 2024
게임팩이나 명품가방부터 의료기기까지, 리셀러를 직업으로 삼는 요시이의 유일한 직업윤리는 돈이다. 그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여자친구 아키코와 함께 금빛 미래를 꿈꾸며 시골의 창고 겸 집을 임대하고 사노라는 이름의 조수를 고용해 사업을 확장하려던 요시이는 그에게 피해를 입은 다른 리셀러, 구매자, 판매자 등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클라우드>를 두고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 영화에는 액션이 있다. 다만 여기서의 '액션'이 사무라이 영화나 야쿠자 영화의 화려하고 처절하며 유혈낭자한 무언가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클라우드>의 액션은 '헤이즈 코드'가 작동하던 시기의 할리우드 서부극, 총격과 쓰러짐의 숏-리버스 숏이 오가던 그 시기의 서부극과도 같다. 혹은 총격(shot)을 문자 그대로 숏으로 해석해낸 두기봉의 <흑사회>에서의 총격적을 길게 늘려놓은 것 같달까? 그러한 지점에서 <클라우드>는 <네 멋대로 해라> 시리즈나 <지옥의 경비원>과 같은 기요시의 비디오 영화 시기를 연상시키는 각본을 지금 그의 연출 스타일로 만들어낸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의 재미로 가득하다. 기요시는 (물론 자신의 입으로는 전형적인 장르영화인 것처럼 말하지만) 전형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그저 액션영화이거나 그저 스릴러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큐어>와 같은 그의 걸작처럼 '마스터'의 액기스가 농축된 무언가도 아니다. 단지 '장르영화'라는 큰 틀을 두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유희를 펼쳐내듯 가벼운 터치로 그려낸, 더불어 '리셀러'라는 소재에서 감각되는 온라인 스크린과의 대면에서 오는 차가온 인상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때문에 영화의 종착지에서 선보여지는, 기요시의 인장과도 같은 자동차 장면은 이 영화가 그의 영화임을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 박송열 2024
전작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서 빈곤한 상황 속에서도 양심적으로 정당한 노동의 댓가로서 돈을 벌고자했던 영태는 이번 영화에 없다. 똑같이 박송열이 연기하고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지만, 이번 영화에서의 영태는 요향한 '홈런'을 바라는 것만 같다. 전작과는 다른 이름으로 출연한 원향라의 '미주'는 여전히 방과후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고자 하지만 상황의 녹록치 않다. 베이비시터에 도전해보지만 아이와 '놀아주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못하고, 다른 일자리는 쉬이 찾아지지 않는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주식이나 부동산, 대부업 등을 포함한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훨씬 앞지르는 상황 자체에 대한 주목이다. '못난 돈'을 받지 않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던 전작의 주인공과 달리, 본작의 두 주인공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한다. 물론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는 범죄영화가 아니며 범죄적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가? 부동산 투기나 대부업과 같은 것들은 영화 전체에 걸쳐 두 주인공의 주변에 아른거리며, 그것은 영태가 바라고 미주가 기대하던 '홈런'의 정체이기도 하다. 노년의 나이인 미주의 어머니마저도 "알바하러 가야한다"고 말할 정도로 생애주기 전체에 걸쳐 '노동해야 함'이 강요되지만 노동만으로는 부부의 월세를 감당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는 그러한 상황을 그려내는 일종의 우화다.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앗아간 휴머니즘을 되새기고자 한 채플린의 익살스러운 몸놀림과 표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적지 않은 숏이 얼굴 클로즈업으로 채워지는 이 영화 속 박송열과 원향라도 그러하다.
<세이브 더 게임> 박윤진 2024
세운상가의 건설현장을 보여주며 시작되는 이 다큐멘터리는 컴퓨터/게임잡지 편집자, 과학기술사 연구자, 게임개발자, 게임유통사 사장 등의 인터뷰를 경유해 한국 게임의 초기사를 탐구한다. 최초의 상용 국산 게임 <신검의 전설>의 출시부터 첫 히트작인 <폭스레인저>와 <그날이 오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로 알려진 게임사 손노리, PC통신의 등장, 불법복제의 시작, IMF 이후 몰락한 패키지게임 시장 등 1990년대 국내 패키지 게임과 MUD게임 <단군의 땅>과 <쥬라기 공원>에서 MUG게임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로 시작되는 온라인게임 등으로 꾸려진 한국 초기 게임사는 당시의 사회적 맥락(일본대중문화 봉쇄, PC 보급과 PC통신 및 인터넷 상용화, 경제적/사회적 변화 등)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렌즈가 되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게임의 발전사가 국내 컴퓨터/인터넷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점도 <세이브 더 게임>을 흥미롭게 해주는 포인트다. 인터뷰가 진행되며 인터뷰이들을 소개하는 명칭에 조금씩 변화가 발생하는데, 이는 대학, 동호회, 게임사, 잡지사 등을 오가며 활동한 한국 게임의 행위자들 각자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이 영화에서 줄기가 되는 것은 그래픽으로도 등장하는 한국 게임의 타임라인과 거기에 적힌 게임들/사건들이지만, 영화의 가장 주요한 내용물은 각각의 행위자가 움직인 궤적들, 그들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조금은 산만한) 한국 게임의 지도그리기다. 국내 전자공학과 1호 여학생이자 마리텔레콤 대표였던 장인경처럼 남성적인 장르로 대표되었던 게임에 가려진 여성 개발자의 활약을 조명하는 지점도 의미가 있다. 전작 <내언니전지햔과 나>에서 망해버린 게임을 구하기(save) 위해 동분서주 했던 박윤진 감독은 보다 대중적인 터치의 이번 영화에서 게임을 기록(save)허기 위해 움직인다. 전작처럼 에너지 남치는 작품은 이니지만, 결국 기록하는 것이 무언가 구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연결되어 보인다.
<나의 도둑맞은 우주> 파라나즈 샤리피 2024
영화는 무수한 푸티지들, 특히 이란 인민들이 촬영한 푸티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파라나즈 샤리피 감독이 직접 찍은 장면들도 여럿 등장하지만, 그 푸티지들이 얼핏 사족처럼 다가올 정도로 다른 푸티지들의 힘은 강력하다. 샤리피 감독은 사람들이 찍은 푸티지를 수집해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만든다. 그것은 취미이자 예술적, 정치적 실천이 된다. 78년 이란 혁명 이전에 촬영된 8mm, 16mm 홈무비 푸티지들에서는 신체의 자유가 존재했던 순간을, 스마트폰 이후의 푸티지에서는 신체의 자유를 되찾고자 저항하는 인민의 모습을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푸티지가 각각의 방식으로 (매체에 대한 통념과 관계없이) 물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열화된 필름 위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자유가 가능했던 과거를, 촬영자의 시야와 행위를 푸티지의 움직임으로 곧장 연결하게 되는 스마트폰 푸티지들에서는 현재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열망을 감각할 수 있다. 그것은 필름이라는 물질적 존재이건, 디지털 영상 파일이라는 비가시적 물질로서의 이미지이건, 각각의 이미지적 존재방식이 지닌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다. 사실 부산국제영화제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에서 이란을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지금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봐온 관객이라던 <나의 도둑맞은 우주>가 전파하고자 하는 내용이 익숙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는 무수한 시리아 인민의 스마트폰으로 기록된 내전을 보았고(<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 미국이라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급변하는 국내정치 상황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고군분투를 보았으며(<아프간 리스트>), 자유를 박탈당한 이란에서 영화로 진실을 찍고자 하는 방식(자파르 파나히의 영화들)도 보았다. 그러한 영화들의 자장 속에서, <나의 도둑맞은 우주>는 40여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 앞에 도착한 이미지들을 만져볼 것을 요구한다.
<뱀의 길(2024)> 구로사와 기요시 2024
1998년 구로사와 기요시는 <뱀의 길>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링> 시리즈의 각본을 써 널리 알려진 타카하시 히로시가 각본을 맡았다. 두 사람은 2024년 프랑스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해 발표한다. 원작에서 전직 야쿠자였던 주인공은 이번 영화에서 '미나르 재단'이라는 겉보기엔 유력 자산가의 사회공헌재단 같지만 그 속에 음험한 비밀이 숨겨진 재단의 직원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주인공의 조력자 또한 학원강사에서 의사로 변경되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사소하다. 98년도 <뱀의 길>은 97년 <큐어>에서 이어지는 듯한, 세계 자체의 부패와 몰락의 어둠이 잔뜩 드리운 듯한 배경 속에서 (종종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독특한 리듬으로 풀어낸 미스터리 스릴러였다. 반면 2024년의 <뱀의 길>은 그 이후의 기요시 영화들, 이를테면 <리얼 완전항 수장룡의 날>의 축축함, <회로> 속 그을음들이 감각시켜주는 기분나쁨,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의 불쾌한 미스터리와 같은 것들을 연상시킨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조력자 사요코의 존재가 그러하다. 원작의 조력자는 '학원강사'라는 지위 속에서 모종의 이유를 (합리적이진 않더라도) 상상할 수 있었으나, 24년도 <뱀의 길> 속 사요코는 무엇을 위해 잔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설픈 복수극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사요코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악인을 골라 죽이는 사이코패스, 이를테면 <덱스터>의 덱스터와 같은 인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스터리가 해소되지만, 그것은 영화가 종료되기 5분 전의 일일 뿐이다. 프랑스와 프랑스어라는 배경과 언어의 차이는 이번 영화를 더욱 이상한 지점으로 이끌어간다. 물론 프랑스가 채택된 것에는 여러 현실적인 프로덕션상의 이유가 존재하겠으나, 관객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는 독특한 감각이다. 일본-프랑스 합작의 형식으로 제작된 <뱀의 길>은 일본의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프랑스 하드웨어의 영화, 라는 단순한 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일본이라는 퇴로를 남겨둔 채 프랑스를 무대로 삼은 것에 가깝게 다가온다. 그것은 영화 속 사요코의 상황과도 같다. 그는 자신의 남편처럼 일본으로 돌아가 평온한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말로는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파리에 남아 복수의 칼을 간다. 어쩌면 이번 영화가 담아내고자 한 것은 올해에만 <클라우드>와 <차임>을 포함해 세 편의 영화를 공개한 기요시 자신의 위치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클라우드>와 거의 비슷한 구도를 보여주는 후반부의 총격전은, 기요시 자신의 방식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두 영화 속에서 관철시켜보고자 하는 시도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미비아의 사막> 야마나카 요코 2024
부산영화제 프로그램노트에도 쓰여 있지만, <나미비아의 사막>의 주인공 카나에게 호감을 갖기는 어려운 일이다. 조울증이나 경계선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듯한 언급이 등장하고, 계속해서 술과 담배를 달고 살아가며, 자신에게 헌신적인 남자친구에겐 가스라이팅을 일삼고, 무수한 거짓말을 내뱉고, 그러한 와중에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며 헤어질 궁리를 한다. 영화는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카나의 어지러운 삶을 담아낸다. 극영화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썸머 필름을 타고!>와 <룩백>,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와 <부적절한 것도 정도가 있어!> 등을 통해 일본의 새로운 스타로 주목받고 있는 카와이 유미는 <나미비아의 사막>에서 '스타'로서의 이미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카나라는 인물을 연기한다. 그만큼 이 영화는 카와이 유미라는 배우의 원맨쇼에 가깝다. 우리가 <나미비아의 사막>을 통해 목격하는 것은 방황하는 청춘의 초상이 아니다. 그렇다기엔 카나라는 인물은 방황하지도 않고 정착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카나라는 이름의 트라우마 덩어리를, 무엇을 갈구하는 것인지 파악할 수조차 없는 욕망 덩어리를, 도쿄의 거리를 나돌지만 자신의 오아시스를 찾을 수 없는 카와이 유미의 모습을 볼 뿐이다. 다소 당황스럽게 카나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듯한 영화의 마지막은 아쉽게 느껴지지만,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붙잡고 카나의 삶을 보게끔 만드는 인상적인 힘을 보여주는 영화.
<미쉘> 박세영 2024
한 쌍의 연인이 격정적으로 키스를 나눈다. 울산 간절곶의 숙소에서 두 사람은 일출을 기다린다. 해가 뜰 때까지 관계를 다시 살려보자고 하는 남자, 그것이 맘에 들지 않는 여자. 기적을 기다리는 남자와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여자. <미쉘>은 <다섯 번째 흉추>나 <기지국> 등 장르적 성격을 띤 박세영의 근작들보단 <vertigo>와 <호텔과 시청사이>처럼 실험적 작품에 가깝다. 흐르는 시간과 엊갈리는 시선, 영화의 외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찾아오는 소리가 화면 내부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일출을 기다리는 뱀파이어들처럼 두 인물을 담아내고 두 인물의 엇갈림을, 혹은 기적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담아낸다.
<굴뚝 속의 참새> 라몬 취르허 2024
하우스 호러 속 집은 인물들을 미치게 만든다. <굴뚝 속의 참새>는 (인사영상 속 라몬 취르허의 말에 따르면) 가족 드라마다. 하지만 영화 속 주요한 공간인 카렌 가족의 집은 그 자체로 정신병이 솟아나는 샘과 같다. 카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들에게 냉랭하고, 그들의 상처를 무시한다. 다른 가족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해, 불륜, 근친의 욕망, 우울증, 도피성 독립, 집착, 거짓말, 트라우마, 동물학대와 같은 것들이 카렌의 가족, 그리고 카렌의 남편 마르쿠스의 생일을 맞아 그들의 집에 찾아온 카렌의 여동생 의 율레의 가족, 집에 딸린 오두막에 머무는 여자 리브도 마찬가지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집의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빠르게 파국으로 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애니멀 3부작'으로 묶이는 취르허의 전작들을 보지는 못해 어떤 식으로 연관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굴뚝 속의 참새>는 욕망들의 멜팅팟으로서 집을 그려낸다기보단 '집'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가치들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어떻게든 부여잡고자 했던 시간들이 강렬한 카운터 펀치로 되돌아오는 순간을 담아내는 영화다. 그것은 파국임과 동시에 해방이다. 하우스 호러의 인물들이 자신들에게 뻗친 집의 저주를 해소하는 방법은 집을 없애는 것이다. 그 집은 불타거나, 무너지거나, 철거되어야 한다. 고정된 숏들로만 구성된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외화면에 언제나 다른 인물이 존재할 것을 염두에 두게끔 하며, 모든 숏과 숏의 연결은 그것이 기묘한 위반의 쾌락 혹은 내적/외적으로 붕괴되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의 흥미로움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고정된 쇼트들이 겹쳐지고 어그러지며 잠시간의 판타지로, 혹은 심연으로 드러나는 붕괴의 순간은 곧장 해방의 순간이 된다.
<뭐 그런 거지> 이하람 2024
연기를 제외한 영화의 모든 부분을 홀로 진행했던 데뷔작 <기행>과 마찬가지로, <뭐 그런 거지> 또한 이하람 감독이 연출, 각본, 편집, 촬영, 사운드, 음악, 소품, 색보정, VFX 등 영화의 모든 부분을 홀로 진행한 작품이다. 데뷔작이 전래동화나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비주얼과 이야기를 선보였다면, <뭐 그런 거지>는 어딘가 SF적인 터치에서 출발한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 하늘을 떠다니는 UFO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 영화는 한 쌍의 남여 커플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지구가 망해가고 있다는 전제 하에, 두 사람은 사람들을 골라 죽인다. 그들의 살해대상은 아이를 납치하려던 남자, 원조교제를 일삼는 남자, 자동차를 훔치려던 남자 등 범죄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악인들을 골라 죽이는 자경단으로서의 연쇄살인마의 이야기 같은 것은 아니다. 커플은 마치 망해가는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들에게 신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인 것 마냥 행동한다. 그들은 서부극의 무법자 같기도, 로드무비의 방랑자 같기도, 불시착한 SF영화의 주인공 같기도 하다. 영화는 어느 것도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함께 죽기를 꿈꾼다. 영화에서 명확한 것은 그 뿐이며, 두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은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하고 망해가는 세계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역사 속 이미지들에서 가져온 폭력의 계보 위에 두 사람의 폭력을 얹고자 한다. 이 시도는 성공적이진 못하다. 저승 혹은 천국으로 향하는 처녀귀신과 소년의 단선적 여정이었던 <기행>의 이야기와 다르게, 목적지도 목표도 없는 <뭐 그런 거지>의 인물들을 관객이 쫓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1인 제작의 한계를 조금씩 자신의 스타일이자 개성으로 만들어가는 이하람의 꾸준함을 재차 목격할 수 있다는 반가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