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봉준호 2025
봉준호의 두 번째 할리우드 프로젝트이자, 본격적인 할리우드 프로덕션 작업이며, 첫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영화. <설국열차>는 어쨌거나 CJ ENM이 주도한 프로젝트였고, <옥자>는 플랜B가 제작했지만 넷플릭스의 초창기 오리지널 영화라는 지점에서 예외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국내 배우와 할리우드 배우를 섞어 기용했으며 일정 부분 한국을 배경 삼는다는 점에서, 봉준호는 <미키 17>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할리우드 영화’를 만든 셈이다. 이는 <미키 17>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지점이다. 봉준호 영화의 방향성은 언제나 할리우드에 맞춰져 있었다. 단지 그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끝자락을 이상하게 뒤틀어두었을 뿐이다. 과학자나 군대가 아니라 서민 가족이 괴물을 무찌르거나, 거대생명체의 동반자로 깊은 산골에서 살아가는 소녀를 지정하거나, 체제 변환의 혁명이 아니라 체제 전복의 혁명을 시도하는 등 SF와 모험극의 외피를 쓴 그의 영화들은 익숙한 길을 쫓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봉준호의 영화는 한국에 붙잡힌 지박령이나 다름없다. 그가 쓴 대사들이 영어로 번역되는 순간 대사는 힘을 잃는다. 단순히 말맛을 잃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플란다스의 개>나 <살인의 추억>을 가득 채운 대사들의 리듬감, <괴물>의 작은 매점 속에서 오가던 대사들의 충만함, 무엇보다 그 대사들이 잠시 멎은 순간. 그의 영화가 글로벌 프로젝트로 규모를 옮기는 과정에서 ‘삑사리의 미학’은 자리를 잃어버린다. 각본 안에 자연스레 새겨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장을 드러내기 위해 삽입되는 삑사리는, <설국열차>의 커티스가 물고기를 밟고 미끄러지던 순간, 더 이상 자신의 영화에 ‘삑사리’를 넣을 수 없게 되어버렸음을 시인하듯 그것을 슬로우로 잡았던 시점에서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기생충>은 그 어떤 덜컹거림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모양새로 완성되었다.
<미키 17>은 그간 봉준호가 선보여 온 것들의 총집합처럼 다가온다. 가장 큰 셀프-레퍼런스는 아무래도 <설국열차>다. 누군가의 평처럼 설국열차의 일직선을 XYZ축 모두의 방향으로 확장한 것처럼 다가오고, 미키의 방은 조금 넓게 혼자 쓸 수 있는 꼬리칸처럼 다가온다. 인간을 부품처럼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윌포드의 것 아니었나. ‘크리퍼’의 입 디자인은 <괴물>의 그것과 닮았고, 크리퍼와 대화 및 교감하는 순간들에선 자연스레 <옥자>를 떠올린다. 미키 17이 미키 18을 쫓다 계산에서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모습은 <살인의 추억>에서 갑자기 옷장 밖으로 굴러 떨어지던 백광호의 모습을, 비밀들을 주고받는 사이클러는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을, 미남 배우를 맹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킨 솜씨는 <마더>에서부터 이어져 오고 있던 것 아닌가. <미키 17>은 봉준호가 그간 해왔던 것들을 할리우드 작가주의 블록버스터의 영역 안에서 재조립한 결과물이다. 어떤 면에서는, <기생충>을 통해 입지전적의 지위에 오른 봉준호가 자신의 스타일을 할리우드 대중에게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케네스(마크 러팔로)와 일파(토니 콜렛) 부부의 모습에서 트럼프나 윤석열-김건희의 모습을 발견하며 이 영화를 현실정치에 개입하려는 블랙코미디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물론 우리가 눈앞의 영화들을 그렇게 읽어내고 싶게끔 강한 유혹을 받는 시대지만, 틸다 스윈튼이 봉준호 영화에서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잊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봉준호는 계급투쟁과 생태주의, 자본주의 비판 등을 여전한 방식으로 담아낼 뿐이다. ‘생존’을 이야기하는 자본은 어떻게 노동자를 비인격화하고 물화하는가. 그리고 영화가 다뤄낼 수 있는 외설적 행위와 이미지는 어떻게 인간적인 (혹은 생명적인) 행위인가.
결국 <미키 17>은 봉준호가 언제나 해왔던 이야기를 다시금 반복한다. 조금 더 커진 스케일과 다른 배우, 다른 언어를 통해서. 다만 여기서 ‘다른’은 상당히 큰 격차다. 케네스-일파 부부가 미키와 카이(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장면, 두 사람은 임무 중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카이의 추모 기도를 가로채고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마치 한국 교회 사람처럼. 물론 케네스-일파 부부는 북미의 극우 기독교와 결탁한 인물로 묘사되며 그것을 통해 정치적 자원을 축적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렛을 통해 모격하는 것은 상당히 생경한 광경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속 한인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는 이들이 한국계가 아니라 백인 부유층이었다고 상상해 보자. <미키 17>의 이 장면은 그와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 봉준호는 <설국열차>와 <옥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한국적인 레시피를 할리우드의 재료들로 만들고자 재차 시도한다. 아니, <미키 17>은 그러한 시도가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지는 장이다. 이 시도는 봉준호의 딜레마를 재차 보여준다. 그는 김지운이 <라스트 스탠드>를 만들며 경험한 상쾌한 실패와 다르다. 할리우드 키드가 마침내 할리우드 스타와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 같은 것이 없다. 김지운이나 심형래가 국내에서 할리우드를 만들고자 했다면, 봉준호는 할리우드의 껍데기를 둘러싼 한국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전자의 두 사람이 결국 할리우드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무언가를 내놓을 때, 봉준호는 이상한 구심력으로 글로벌의 재료를 (한국이라는) 로컬의 맥락으로 끌어오고, 그럼으로써 실패한다. <미키 17>은 그것을 가장 확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