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퍼시픽 림>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출연: 찰리 허냄, 키쿠치 린코, 이드리스 엘바, 찰리 데이
제작연도: 2013

거대 괴수가 나오는 영화는 많다. 혼다 이시로의 <고지라>(1954)와 고든 더글라스의 <THEM!>(1954)를 필두로 일본과 할리우드에선 각종 괴수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일본에선 고지라를 필두로 한 신화나 민담 베이스의 괴수들이, 할리우드에선 개미나 거미 등 이미 존재하는 생명체가 거대화된 형태의 괴수들이 쏟아졌다. 괴수영화의 흔적은 <토르: 라그나로크>(2018) 오프닝 시퀀스에서 토르가 상대한 거대괴수처럼 대형 블록버스터의 지나가는 악역이나, <고지라>(2014) 리메이크를 통해 시작된 유니버셜의 '몬스터버스' 시리즈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거대 로봇 또한 역사가 깊다. 나가이 고의 <마징가 Z>(1972~1974)를 시작으로 <기동검사 건담>(1979~1980),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1996) 등의 애니메이션이 일본에서 계속 등장했다. <고지라 대 메카고지라>(1974)처럼 거대 괴수물의 발전과 거대 로봇의 역사는 함께 발전해왔다. 8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하스브로의 장난감을 토대로 제작한 <트랜스포머>(1984~1985, 소위 G1이라 불림)를 제작했고, <아이언 자이언트>(1999)와 같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거쳐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2007) 시리즈까지 이어지고 있다. 메카고지라와 건담을 비롯해 여러 거대 로봇이 등장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은 그 역사를 하나의 취향으로 묶는다.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와 거대 로봇을 한 영화에 등장시킨다. 해저에서 나타난 '카이주'들이 인간의 도시들을 공격하고, 살아 남은 인간들은 파괴되지 않은 도시에 장벽을 쌓음과 동시에 '예거'라 불리는 거대 로봇을 만들어 카이주에 맞선다. 뇌파를 통해 로봇과 파일럿이 연결된다는 설정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카이주라는 거대 괴수의 형상은 <고지라>를 비롯한 각종 일본 괴수영화에 등장하는 괴수들을 연상시킨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연출 또한 일본의 거대 로봇 및 거대 괴수물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문법과 규모로 재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인공 롤리와 마코가 조종하는 예거 '집시 데인저'가 홍콩에 나타난 카이주와 싸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다에서 도심으로 싸움터가 옮겨가는 과정에서 집시 데인저와 카이주가 짓밟는 자동차, 집시 데인저가 카이주에게 휘두르는 화물선, 홍콩의 스카이라인 위로 올라온 로봇과 괴수의 머리 등은 일본 영화 및 애니메이션 속 거대한 존재들의 규모와 무게감을 그리는 방식과 유사하다.

사람들은 <퍼시픽 림>의 서사가 빈약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엉망이라 혹평한다. 남은 것은 거대한 로봇과 괴수의 격돌 뿐이라는 것은 갈수록 처참해지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에도 해당하는 혹평일 것이다. <퍼시픽 림>은 그런 류의 혹평을 받을만한 작품이 아니다. 예거와 카이주의 육중함에 무너지는 건물과 짓밟히는 자동차들, 그 사이에서 분투하는 파일럿과 살아남은 도시의 시민들. 예거와 카이주의 무게감은 그것들을 파괴함과 동시에 떠받친다. <퍼시픽 림>의 이야기는 무너져가는 서브컬처의 현재를 일으켜 세워 보려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노력이자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