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Spy
감독: 폴 페이그
출연: 멜리사 맥카시, 미란다 하트, 로즈 번, 주드 로, 제이슨 스타뎀
제작연도: 2015
모든 스파이에게는 '윙맨'이 있다. 현장에서 뛰는 스파이들을 위해 실내에서 다양한 정보와 가젯을 제공하는 사람들. 폴 페이그의 스파이 영화 <스파이>의 주인공은 정보국의 내근요원인 수잔 쿠퍼이다. 007 시리즈의 Q를 떠올리면 그의 역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능한 현장요원인 브래들리 파인을 보조한다. 그러던 중 브래들리가 임무 중 사망하고, 모든 현장요원의 신분이 마피아들에게 노출된다. 정보국은 마피아들에게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잔을 핵무기 밀거래를 막기 위해 현장에 투입한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베테랑 현장요원 릭 포드가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2011), <더 히트>(2013), <고스트버스터즈>(2016) 등 여성 중심의 코미디 영화를 꾸준히 연출해온 폴 페이그의 <스파이> 역시 여성 중심의 코미디 영화이다. 그는 <더 히트>부터 남성 중심의 장르라고 여겨지던 것들을 여성 중심 코미디로 옮겨오기 시작한다. <더 히트>는 경찰 버디무비를, <부탁 하나만 들어줘>(2018)은 히치콕 풍의 스릴러를, <고스트버스터즈>에서는 아예 유명한 SF 코미디 영화를 리메이크한다. <스파이>는 제목 그대로 스파이 장르를 독특하게 변형한 작품이다. '본 시리즈'와 같은 진지한 스파이 영화가 아닌,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처럼 다양한 가젯과 액션이 중심이 된 스파이 장르를 변형하고 패러디한다.
수잔 쿠퍼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입사 당시의 테스트에서 나름 훌륭한 성적표를 받았음에도 현장에서 뛰지 못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현장 요원들은 유능할 뿐만 아니라 멋있다. 그들은 출중한 외모, 매력적인 육체, 아름답고 격렬한 액션을 선보인다. <스파이>의 브래들리와 릭은 주드 로와 제이슨 스타뎀이라는, 매력적이고 남성적인 외모를 갖춘 이들이 연기한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여성 현장요원인 카렌 또한 <데드풀> 시리즈의 바네사로 이름을 알린 모레나 바카린이 연기한다. 전형적인 '미인'의 형상에서 동떨어져 있는 수잔 쿠퍼는 자신의 유능함을 테스트를 통해 보여줬음에도 현장요원으로 발탁되지 못한다.
<스파이>의 코미디는 이러한 요소들에서 발현된다. 수잔 쿠퍼는 정보국 고위 간부들이 보기에도, 그 동안 스파이 장르의 관객이라 상정되어 온 불특정의 남성 집단에게도 '아름답지 못'한 '여성'이다. 그가 내근요원이 된 것에는 장르의 관습과 현실의 직장 내 성차별이라는 두 가지 장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그런 그가 현장요원으로 발탁되고, 남성성을 과도하게 내세우는 릭 포드와 얼떨결에 동행하게 되며 벌어지는 사건들이 영화의 주축이다.
릭 포드의 남성적인 면모는 과장된 대사와 실패하는 행동들을 통한 코미디로 표현된다. 독약을 먹고 살아남았다거나 총에 맞고 살아남았다는 무용담은 제이슨 스타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를 통해 과장되고, 무모하고 저돌적인 그의 행동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다. 릭 포드에 비해 젠틀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브래들리 또한 영화 초반 임무에 실패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두 캐릭터의 모습은 스파이 장르에서 흔히 그려지던 남성 캐릭터들의 특징을 두 가지 계열로 분류하고 캐릭터화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수잔 쿠퍼라는 캐릭터에게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다.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완 앳킨슨의 <쟈니 잉글리쉬>(2003)나 007의 패러디인 <오스틴 파워>(1997) 등 <스파이> 이전에도 스파이 장르를 코미디로 풀어낸 영화들이 있었지만, 이 영화들은 배우가 기존에 지닌 캐릭터에 의존하거나 스파이의 남성성을 과장하면서도 '본드걸' 같은 요소를 여전히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스파이>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깨부순다. 마피아 보스인 레이나(역시 여성 배우인 로즈 번이 연기한다)의 앞에서 수잔 쿠퍼는 위압적인 남성 캐릭터처럼 행동한다. 그럼에도 그는 스파이라고 의심받기는 커녕, 레이나가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자신이 여성 보디가드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상쇄한다. 수잔의 동료 내근요원이자 수잔을 보조하게 된 낸시 또한 사무실을 빠져 나와 현장에 합류한다. 이들은 함께 과장된 언행과 액션을 선보이고, 동시에 남성이 아니기에 가능한 방식으로 마피아 보스 레이나 옆 자리에 침투한다.
이들은 남성성이 실패한 자리에 침투하고 그곳을 점령한다.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던 자리를 꿰차고, 그곳을 기존과 유사하지만 다른 주체를 통해 발화되는 가능성으로 채운다. 타의적으로 보조하는 자리에 발이 묶인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그들의 도움을 통해서만 유능하다는 이야기를 듣던 남성들을 삭제한다. 누구나 능력이 있다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신화는 사실 실제하는 차별과 편견에 의한 배제의 원리였음을 영화는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