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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6. 2020

82. <벌새>

감독: 김보라
출연: 박지후, 김새벽, 이승연, 박수연, 박서윤, 설혜인
제작연도: 2018

  <리코더 시험>(2011) 등의 단편영화로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린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2018의 한국영화 데뷔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1994년을 살아낸 중학생의 시점으로 그 시대를 담아내는 이 작품은 학벌, 가부장적 가정, 세월호 참사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안전불감증 및 불안정한 상태, 학생운동, 재건축 등 수많은 한국의 사회문제들을 자연스럽게 경유한다. 붕괴의 징후를 시도때도 없이 내비치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중학생 은희는 한문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을 통해 변화한다. <벌새>에서 영지는 한번도 스스로 누군가와의 단절을 주도하지 않는다. 은희가 겪는 관계의 단절들은 상대방에 의해서이거나, 갑작스런 재난에 의해 발생한다.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은희가 집을 잘못 찾아가 간절하게 엄마를 부르며 문을 두들기는 오프닝 시퀀스는 그러한 단절의 상황 속에 내던져진 상황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때문에 <벌새>는 부모나 학교 선생님조차 길잡이가 되어주지 못할 망정 균열이 가고 있는 길만을 제시하고 있는 잘못된 길잡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우연히 만나 길을 알려주는 대신 어떤 길이든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 분열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 대신,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보라 감독이 밝혔듯, <벌새>는 여러모로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특히 성수대교가 붕괴된 이후 등장하는 정지된 이미지들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후반부의 정지된 시간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양의 정지된 시간은 단순히 인물과 극 중 사건의 정지가 아닌, 영화가 긴 시간 동안 그려온 세계 자체의 정지이다. 동시에 <타이페이 스토리>(1985)나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인물을 향해 쏟아지는 듯한 자동차와 빌딩이 거울과 창에 비친 형상들은 그것들이 흐르는 이미지임에도 인물을 압박해 정지시키려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벌새>의 정지된 장면은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2018년에 제작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2014년 4월 16일의 정지된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침몰한 선박과 함께 정지된 시간, 그것은 건축물의 붕괴로 인해 세계가 운동을 멈추는 <벌새>의 것과 닮았고, 그것을 연출하는 방식은 에드워드 양의 것과 닮았다. 

 그리고 <벌새>는 다시 전진한다. 은희는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언니와 함께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본다. 그러고 학교에 간 은희는 주변을 둘러본다. 은희의 눈길이 닿는 많은 곳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은희 또래의 학생들이 보인다. 정지상태를 바라보던 은희는 종종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텅 빈 집에서 홀로 '여러분'의 고속도로 뽕짝 버전을 틀어두고 막춤을 추는 은희는 어떻게든 움직이려 한다. 무너진 성수대교를 보던 은희의 시선은 움직이는 또래의 사람들로 옮겨간다. 영화는 그러한 은희의 얼굴에서 끝난다. 우리 앞에 어떤 길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 길을 뚜렷이 바라볼 수 있다는 희망이 <벌새>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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