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을 높이는 믹스를 사용하자, 딸기 케이크-2
어느 여행지든 그곳의 시장이나 마트를 가는 일을 좋아한다.
그 나라에서 먹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이들은 어떤 식생활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얼마나 베이킹에 진심인 나라인지는 마트를 한 바퀴만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섹션을 가득 메운 베이킹 재료와 각종 케이크, 쿠키 믹스는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1부터 10까지 모든 것을 직접 만드는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나이기에 믹스를 사는 일은 거의 없다.
아, 이런 나도 찬양하는 믹스가 있다. 바로 호떡과 팬케이크 믹스.
아무리 반죽을 잘해도 대기업이 잘 만들어둔 안정적인 비율의 믹스의 맛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히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 두 가지 메뉴다.
한국에서도 이 두 가지 메뉴 외에는 믹스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미국에서는 다양한 믹스 제품 중 어떤 것도 사지 않는 게 더 어리숙한 일처럼 여겨진다.
짧은 시간, 최소한의 수고로 맛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결국에는 자존심의 문제라기보다, 효율의 문제였다.
효율을 위해 믹스를 카트에 들였다. 카트에 들이기까지 사실 조금 시간이 걸렸다.
미국 여행에서 사 왔던 딸기 케이크 믹스를 두 달이 지나서야 구워보기로 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극 추천한 제품이었다.
보통 딸기 케이크를 만들 때는 제누아즈부터 굽는다.
달걀과 설탕을 넣어 살짝 저어준 뒤, 달걀이 익지 않을 정도로 중탕한다.
그리고 거품을 올려 걸쭉한 상태가 되면 가루류와 녹인 버터와 따뜻한 우유를 넣어
거품이 꺼지지 않게 잘 섞는다. 그리고 오븐에서 굽는 과정까지가 필요하다.
숙련이 된다면 금방 끝날 일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오늘은 설명서에 적힌 대로만 따라 했다.
물 한 컵, 식물성 오일 1/2컵, 달걀 3알과 믹스를 다 넣으면 시트 반죽이 완성된다.
거품을 올리지도 않고, 예민한 작업도 없이 모든 재료를 섞기만 했다.
십 분도 걸리지 않아 반죽이 완성됐고 오븐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오븐에서 구워지는 무언가.
잘 구워진 시트를 차갑게 식힌 뒤에 생크림을 만들고 딸기를 잘랐다.
가장 설레고, 재밌는 작업은 케이크를 장식할 때다.
그전까지 모든 과정을 마쳐야 이 영광의 순간에 닿을 수 있는데
오늘은 믹스 덕분에 수고를 줄였다.
평소보다 빨리 이 순간에 닿았다.
보송보송한 시트는 아주 부드러웠다.
실패가 없는 생크림이 더해지고 계절의 끝을 달려가는 딸기를 동네 마트에서 싸게 업어왔다.
케이크를 완성하고 엄마와 한 조각씩 나누어 먹는데 큰 이모가 전화가 걸려왔다.
이모는 동생들에게 돌아가면서 전화를 건다.
어제는 경숙이에게, 오늘은 경희에게, 내일은 경미에게.
오늘은 경희의 차례다.
이모는 내가 미국으로 여행 가기 전날 걸려온 전화에서
지금 젊은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후회 없이 여행하고 경험하고 오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오늘은 여행은 어땠냐며 물었다. 많이 그립지는 않냐고.
너무 많이 그리웠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잘 지내야 하니까 또 나름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도.
시간은 흐르고 그리움은 짙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실 언젠가 이 그리움조차도 흐려질까 겁이 난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그곳의 딸기케이크로 잠시 지난 여행에 다녀왔다.
한때는 나의 모든 것 같았던 시절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살면서 한 번을 스치듯 만났던 사람들도 생각해 보면 인연이었던 게 맞았다.
시절의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는 동안 한번 더 얼굴을 마주할 날이 생긴다면
그동안 잘 지냈냐고 그리고 참 고마웠다고
나의 지난, 아니 평생의 인연들에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