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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두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던 시기에 나를 움직일 일을 만들기 위해서 ‘반주학과’라는 두 번째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좋아하던 일이라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주학과는 지독하게 힘들기로 악명이 높다. 그야말로 나를 움직이게 하는 데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수업은 듣던 것보다 더 힘들었고 수업 준비에 실습 준비, 내 생업을 위한 연습까지, 잠도 안 자고 연습을 해도 따라가기가 벅찼다. 매 수업 시간마다 연주를 해야 했기에 새롭게 봐야 할 악보는 갈수록 쌓여갔다. 늘 따라가기 바빴고 실수하고 늘 평가당했다. 완벽주의 기질 때문에 남들 앞에서 들려줄만해지기 전까지 절대로 들려주지 않는 나인데, 준비가 안됐어도 공개적으로 못하는 모습이 자꾸 노출되니 자존감은 점점 더 바닥을 쳤다.
더 큰 문제는 매주 들어가야 하는 전공실기 레슨이었다. 생업과 다른 수업들을 항상 먼저 챙기면서 학기말에만 실기시험으로 학점이 나오는 전공실기는 우선순위에서 미뤄두었다. 전공실기 담당 선생님은 항상 준비 안 된 내 모습에 역정을 내셨다. 지금 하는 일이 너무 많은데 능력이 부족하니 전공 실기 곡은 학기말에 한 번에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한 학기 내내 그런 모습을 보이니 전공 레슨 50분 동안 45분은 매번 정신교육을 받았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렵 치러지는 실기시험에서는 늘 1등을 하긴 했다. 선생님이 보기에 그렇게 불성실한 나인데, 학기말에 점수를 잘 받는 것도 기가 막혀하셨다. 반짝 연습해서 나온 점수가 잘 나온다며 그건 그것대로 또 혼났다.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실감이 계속해서 나를 몰아붙였다. 살이 계속 빠져서 가죽만 남았다. 속사정을 모르는 동기들은 정장 바지가 왜 힙합바지가 됐냐며 놀렸다. 내 상황을 아는 교수님은 나더러 힘들다고 시위하는 거냐고 농담을 하시며 왜 그렇게 살이 계속 빠지냐고 걱정을 하셨다. 일정에 맞춰 무대에 올려야 할 곡들은 줄줄이 쌓여 있었는데 하나를 겨우 마무리하고 나면 다음 일, 또 그다음 일. 하루살이였다. 언덕 위까지 돌을 굴려 올리고 나면 그 돌은 어느새 다시 언덕 밑으로 떨어져 있는 무한하고도 의미 없는 시지프의 공포감이 딱 내 것이었다. 체력까지 바닥이 나니 무기력증은 더 심해졌다. 그즈음 내게는 위로가 없었다. 나 스스로도 타인으로부터도. 그렇게 나를 몰아붙이기만 했던 그때 나는 괜찮아지지도 않았고 피아노에 대한 열정마저 잃었다.버티기를 그만두고 휴학을 했다. 몰두할 게 없어지면 더 힘들어지지 않겠냐고 걱정하는 지인들이 휴학을 만류했다. 한 학기 남았는데 아깝기도 했지만,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내 마음을 먼저 고쳐야 할 시기에 좋은 결과를 내야만 하는 일을 선택한 것은, 삔 다리를 가지고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 출전한 것과 같은 선택이었다. 나를 다그치기만 하신 선생님을 미워하고 원망도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었다. 100미터 경기에 출전한 사람을 다그친 전공실기 선생님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신 것뿐이었다. 100미터 경기에 출전하는 대신, 애초부터 다리가 삐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고 치료하는 것을 선택했어야 했다.
그렇게 학위를 포기했지만 나는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를 얻었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준비 안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실수하지 않을 기회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삔 다리를 가지고 완주했다면 성취감으로 위안을 얻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다시는 다리를 못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사소하게는 내일은 뭘 입고 나가지, 점심은 뭘 먹지부터 크게는 진로나 회사를 선택하는 일.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은 포기한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보면 포기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일부이고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힘든 일 앞에서조차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며 자신을 계속 다그치기보다, 아프면 포기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면 좋겠다. 다친 다리로도 전력 질주할 수 있는 건 ‘달려라 하니’나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