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버릴 줄 모르는 맥시멀리스트들을 위한 글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여백의 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물건이 참 많았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박스들이 켜켜이 쌓인 먼지와 함께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은 지 오래였고, 집안의 서랍이란 서랍 안에는 버릴 것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물건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제발 ‘버리고 살자’는 나의 지속된 외침에 어느 날 드디어 엄마는 살을 깎아내는 심정으로 서랍장 하나만큼의 물건을 버렸다. 웬걸. 며칠이 지나자 서랍장에는 금세 다른 물건들이 샘솟듯 들어찼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삿짐센터 직원이 집을 둘러보고는 이 정도 짐이면 큰 트럭 한 대와 작은 트럭 한 대면되겠다고 견적을 내고 돌아갔다. 이사 당일이 되어 짐을 옮기던 이삿짐센터 직원이, 처음 왔을 때는 그 정도로는 안 보였는데 한도 끝도 없이 짐이 나오는 이런 집은 처음 봤다고 볼멘소리를 하셨다. 급기야 센터 직원은 부모님에게 ‘보통 다른 사람들은 이사할 때 물건을 많이 정리해서 버린다.’며 낡은 물건은 버릴 것을 권하셨지만, 부모님은 무슨 물건이든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는 인생철학을 설파하시며 버릴 물건이 없다는 말로 단호하게 선을 그으셨다. 결국 이삿짐센터에 웃돈을 얹어주시고 이사를 마무리했다.
부모님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는 맥가이버처럼 물건이 망가지면, 그것과 딱 맞는 부품이 없어도 집안 어딘가에 있는 다른 물건을 조합해서 기가 막히게 뚝딱 고치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성’과 맥가이버의 ‘가이버’를 따서 아버지에게 ‘오가이버’라고 별명을 붙여 드렸고 오가이버의 손에서 물건이 재탄생될 때마다 동생과 나는 그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 맥가이버의 주제가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어느 날, 손잡이와 머리 부분이 분리되어 못 쓰게 된 망치를 고치기로 마음먹고 손잡이로 쓸 만한 대안을 찾아온 집을 뒤지기 시작한 오가이버. 그때, 적당한 길이와 두께의 나무가 오가이버의 레이더에 잡혔다. 가정집에 대체 왜 거칠고도 튼튼한 나무 한 자루가 있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오가이버는 길이와 두께마저 딱 들어맞는 그 나무를 발견하자마자 유레카를 외쳤고, 한참을 뚝딱뚝딱하더니 망치의 머리 부분과 튼튼한 나무를 하나로 조합하는 데 성공했다. 오가이버의 DIY 망치는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쌩쌩하다. 이후로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집에 소장하고 있었던 덕분에 오가이버는 망가진 물건들을 손쉽게 소생시키곤 하셨다.
이처럼 부모님의 물건에 대한 철학은 삶에서 얻은 경험으로 그 믿음이 더 두터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책을 읽다가 부모님의 물건에 대한 철학이 레비-스트로스가 명명한 ‘브리콜라주’의 사고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리콜라주’는 구조주의 철학자이며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가 남미의 마토 그로소 원주민들을 관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해 소개한 개념이다. 마토 그로소 원주민들은 정글 속을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당장은 자신들에게 필요 없는 물건일지라도 어딘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발견한 물건을 주워 와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물건을 주웠을 때 처음에는 그 용도를 알 수 없었던 물건이 나중에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한 일도 있었기에, 이 원주민 사회에서는 이 습관이 매우 중요한 능력이었다.
이처럼 물건을 ‘비예정 조화 차원’에서 수집해 두었다가 적당한 때에 요긴하게 활용하는 능력이 바로 레비-스트로스가 명명한 ‘브리콜라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근대적이고 예정 조화적인 사상(용도를 명확히 하고 나서 개발에 착수하는 사고관)에 대비되는 유연한 사상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어디에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가치가 있을 것 같으니 만들어 내보자하는 사고방식으로 제작된 것들이 실제로 제작자의 의도보다 훨씬 더 막대한 가치를 생성하게 되었고, 현대에는 의료 현장이나 우주개발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마토 그로소 원주민들의 직감적인 본능이 현대에도 매우 유효한 사고방식인 것인데, 부모님은 ‘브리콜라주’라는 개념을 모르고도 이미 삶에서 비예정조화적인 삶을 살고 계신 셈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내 서랍에도 꼭 필요한 문구류 외에 폐품에 가까운 다양한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있다. 피자를 포장해 온 피자집 노끈부터 마트에서 받은 비닐봉지, 선물 상자들, 페이를 받았던 봉투가 몇 다발, 용도를 알 수 없는 전기 선들, 예전에 쓰던 휴대폰 몇 대, 온갖 설명서들. 언젠가 필요로 할 때가 있을 것 같다는 믿음으로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물건들에게, 새해를 맞아 깔끔하게 정리된 환경을 제공하기로 하고 한 없이 뒤엉켜 있는 피자집 노끈부터 한 올 한 올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재밌는 일이 생겼다.
서랍에서 나와 허공에서 꿈틀대는 노끈을 보고 우리 집 고양이 로이가, 만 원짜리 쥐돌이 장난감보다 더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리를 하다 말고 한참 동안 노끈을 현란하게 흔들며 고양이와 놀아주었다. 팔이 아파올 때쯤 노끈을 소파의 나무 손잡이에 묶어 두었는데, 내가 흔들어 주지 않아도 혼자 잘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 피자집 노끈은 한 번 쓰고 폐기될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고 고양이의 장난감으로 재탄생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어디에 쓰일지 모르지만 일단 노끈을 서랍에 보관한 나의 이 감각은, 바로 마토 그로소 원주민들의 야성적인 지성과 같은 것이라고. 하하.
정리정돈을 마친 내 서랍 속의 소중한 재화들은 이제, 새 소명을 기다리고 있다.
덧,
브리콜라주는 물건에만 한정되는 개념은 아니다. 현대에는 과거의 거대 담론에서 찾아낸 개념과 사상을 이용하여 실천하는 것을 일종의 브리콜라주라고 생각한다.
더 궁금한 분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슬픈 열대>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