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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chun Kim Dec 17. 2022

내가 좋아하는 시

쉬운 말로 쓰인 시를 좋아한다. 어려운 시는 사실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억울해서인지 쉬운 말로도 좋은 시가 나오기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과 여백을 지나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시들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다만 쉬운 언어로 정갈히 내린 시는 울림의 크기가 다르다. 깨달음 뒤에 찾은 단어들을 가만히 놓아두는 그 배치만으로 자족한 시들.


눈도 왔으니까 오늘은 그런 시를 몇 개 읽어보자.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는 정말 엄청난 문장이다. 저런 문장을 쓸 수 없는 나는 이런 빈곤한 감탄사로 그저 충격을 표현하는 일밖에 할 게 없다. 어떤 시인은 쉬운 말 몇 개로도 대추나무에 매달린 한알 안에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정지의 힘 -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씨앗처럼 정지하라”라니. 그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니. 그저 감탄할 뿐이다. “씨앗”과 “정지”는 누구라도 아는 말이다. 쉬운 단어 두 개의 배치만으로 이렇게 큰 공명을 만든다. 학원 공부에 지친 중학생도 고전역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도, 그 누구라도 이 시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


제목 없음 - 김대호

이 세상에는 대단한 것투성이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만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대단한 것들이 나를 짓누르려 할 때
있는 힘껏 땅바닥에 침을 뱉어본다.

나는 침이다.
그 안에 담긴 의지다.



딱히 제목이 없는 이 시는 김대호 아나운서가 ‘신입사원’이란 아나운서 공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자기소개로 읽은 문장이다. 방송은 보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짤로만 봤는데 참이슬 병을 들고 ‘참’을 ‘침’으로 만든 장면이 있던 걸로 봐서 뭔가 순발력이 필요한 자기소개 코너였던 것 같다. 온전한 김대호의 문장은 아니고 그가 좋아하는 책에서 본 문장을 차용한 것이라 한다. 그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 집요하게 찾아봤으나 책 제목을 찾지는 못했다.


저 문장도 훌륭한 시라고 생각한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물론 출처는 제대로 밝혔으면 더 좋았겠지만.



올해 박준 시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박준은 시를 몇 개 낭송하며 어려운 문장이 나오자 “저는 시의 어느 한 구절만 마음에 들어도 좋은 시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게 자신이 시를 즐기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시를 대하는 게 한결 쉬워졌다. 창비에서 운영하는 시요일이란 앱에서 시를 받아보곤 하는데 다 읽어도 알쏭달쏭한 시 혹은 끝까지 읽기 어려운 시를 만날 때면 박준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나에게 닿는 한 구절만으로도 시는 충분히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전엔 폰을 오른쪽으로 밀면 나오는 위젯 화면에 몇번 쓰지도 않는 포인트할인이며, 또 환율이니 S&P니 비트코인이니 하는 각종 차트를 넣어놨는데 다 없애버렸다. 그 자리에 시요일을 넣었더니 숨통이 트였다. 시는 차갑고 맑은 물 같아서 잠깐 머리를 식힐 때 읽기 좋다. 혼란스런 도시 안에서 잠시나마 딴 세상에 다녀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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