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컬처덱을 만든다며 자기소개를 적게 했다. 항목 중엔 좌우명도 있었다. 좌우명이라. 누가 그런 것을 이 여태 품고 산단 말인가. 잠깐 고민하다 더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아무 얘기나 적기로 했다. 문득 마이크 타이슨 형님 말이 생각났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한대 처맞기 전에는.”
적고 나니 이게 뭔가. 아니, 이거잖아? 나는 방금 나의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격언이 뭔지 알게 됐다. 지난 10년 간 일에게 흠씬 처맞아본 이제는 안다. 일은 계획이 아니라 대응이 한다. 가설을 놓고 떠들어봤자 밖에 나가는 즉시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펀치가 날아온다.
일 뿐이겠는가. 삶을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사는 게 권투와 좀 닮았다. “코너에 몰렸다”거나 “한방이 있다” 같은 말들. 링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상에 옮겨놔도 어색함이 없는 건, 권투선수를 애잔히 그리는 영화가 유독 많은 건 은연중에 권투를 삶에 비춰보기 때문일 것이다.
권투는 주먹만 쓰는 스포츠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꼭 그렇진 않다. 사진작가 알버트 왓슨은 타이슨의 사진을 찍으러 가선 뒤로 돌아서게 했다. 권투를 좋아하던 그의 아버지가 생전에 했던 말, “권투는 목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과연… 가스통 같은 저 목을 보면 그렇구나 싶다.
영화 <록키>도 마찬가지다. 가장 유명한 권투영화지만, <록키>에서 권투는 주먹으로 이기는 스포츠가 아니다.
아폴로 크리드와의 경기 전 록키는 겁에 질리고 만다. 세계챔피언 크리드는 고리대금업자 밑에서 수금이나 하러다니던 무명 복서 록키의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챔피언 측에서 ‘아메리칸 드림’이란 보여주기식 이벤트를 위해 준비한 경기다.
록키는 여자친구 아드리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못하겠어. 랭킹 목록에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난 보잘것없는 사람이야.
(...) 하지만 상관없어. 시합에서 져도, 아니 얻어맞아 머리가 터져도 괜찮아. 15회까지 버틸 수만 있으면 돼. 아무도 끝까지 가진 못했거든. 내가 그때까지 버티면, 종이 울릴 때까지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
모두의 예상대로 록키는 크리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흠씬 얻어맞는다. 곧 다운되고 만다. 다시 일어나면 또 골고루 얻어맞는다. 그런데도 록키는 자꾸만 일어난다. 금방 끝날 깜짝 이벤트 경기를 예상하던 관객들은 그런 록키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다. 록키가 몇 번을 더 쓰러지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더 이상 아무도 야유하지 않는다. 록키는 15라운드의 종이 울릴 때까지 결국 버텨냈다. 두 발로 서서 퉁퉁 부은 얼굴로 아드리안을 애타게 찾는다.
육중한 목이 주인공인 알버트 왓슨의 사진도 끝내 일어선 록키도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 흠씬 주먹을 맞고도 버텨내는 일,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권투가 우리 삶과 닮은 건 아마도 이 지점인가 보다.
30년의 세월을 지나 어느덧 중년이 된 록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록키 발보아, 2007).
"이 세상은 결코 따스한 햇살과 무지개로만 채워져 있지 않아. 온갖 추악한 인간사와 세상만사가 공존하는 곳이지. 인생은 난타전이야. 중요한 건 네가 얼마나 센 펀치를 날리느냐가 아니야. 얻어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그게 바로 진짜 승리야."
5분만 더. 딱 10분만 더… 사각의 방에 쓰러진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야근에 절인 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만 같다. 좀만 더 누워있자. 나 대신 휴대폰을 깨워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괜찮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 겨우 일어나서 세수를 한다. 물 한잔 급히 넘기고 집을 나선다. 버스에 오르니 사람들이 손잡이 하나씩 매달려 샌드백처럼 흔들리고 있다. 피곤한 얼굴들을 하고서.
저들 모두 어딘가에 내려서 또 처맞겠지. 부디 너무 아프지 않기를. 부디 가드하기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