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chun Kim Aug 27. 2019

밥보다 평화

한 인간이 태어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을 나는 안다. 그것은 근원에 관한 것도, 목적에 관한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다.


"점심 뭐 먹지?"


간단한 질문이지만 답 찾기는 결코 간단치가 않다. 먼저 식사할 곳이 60분 내외 한정된 시간 안에 먹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청결과 친절은 기본소양이겠다. 메뉴는 먹고 나면 퇴근까지 든든해야 하며, 가격은 1만원을 넘기면 좀 그렇고, 돌아와 양치하고 잠깐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음식이 빨리 나와야 한다. 물론 맛있어야 한다. 날마다 점심이면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회사는 점심시간이 1시간10분간으로 여유있는 편이다. 붐비는 시간을 피해 12시40분부터 1시50분까지로 정했다. 홍대사거리 근처여서 선택지도 넓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역부족이다.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메뉴를 정하지 못한 자들이 1층에서 표류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가 회사 사람이 내리면 그를 붙잡고 뭐 드실 거냐고, 제발 나에게 해답을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내린 자도 답을 알지 못한다. 먼저 나간 사람이 1층에 있겠지,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표류자 무리는 그렇게 불어난다. 12시47분쯤이 되면 높은 확률로 회사 인원의 삼분의 일 이상이 둥글게 모여 갑론을박을 벌인다. 좀 멀지만 든든한 삼겹살 백반을 먹자, 아니다 회사 앞 중국집에서 볶음밥 먹고 빠르게 돌아와 남은 시간 동안 탁구를 치자, 저 오랜만에 카레가 땡기는데 아비꼬 갈 사람 없나요, 혹시 초밥 먹으러 가실 분은 없으신지, 돈까스는 어떤가, 아비꼬 갈 사람 진짜 없나요. 표류자들은 스스로도 확신 없는 제안을, 그래서 아무의 동의도 얻지 못하는 답을 허공에 던지며 학익진으로 엘리베이터를 둘러싸고 서있다. 이 순간 그들의 목적은 자신의 제안에 동의를 얻는 일이 아니다. 그 힘없는 제안은 그저 과정일 뿐이다. 그들은 다만 기다린다. 무얼 기다리는 건지 스스로도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뒤늦게 내려온 자가 나타나면 일제히 말을 멈춘다. 그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낸다.


이단이 등장했다. 메뉴파괴자 혹은 불백요정이라 불리는 자의 출현이 그것이다. 점심마다 표류하며 매일 10분을 허비하는데 지친 나머지 그는 불경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하나의 메뉴를 정해놓고 50일 주기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불백? 불백?? 처음에 사람들은 그가 불백집 사장님과 친인척 관계 혹은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불백성애자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불백? 불백?? 1층의 학익진 가운데서, 그는 당당히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매일 그렇게 말했다. 불백? 불백??


50일이 지났다. 그는 말했다. 돈까스? 돈까스??


나도 이단이 되었다. 최근에야 유효한 답을 찾았다. 내가 찾은 정답, 나의 메뉴는 평화였다. 밥보다 평화다. 더 이상 점심메뉴를 고민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되면 책 한 권 챙겨들고 나간다. 주저없이 회사 옆 건물 1층 카페로 간다. 가격이 약간 비싸지만 커피가 맛있고 베이커리를 하는 곳이다. 거기서 빵과 커피로 점심을 해결한다. 열량이 높은 소시지 빵 같은 걸 주로 먹고, 커피는 과테말라 드립커피를 따뜻하게 마신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커피를 다 마신다. 커피를 리필해준다. 계속 읽는다.


그걸로 평화가 찾아왔다. 그 한 시간의 평화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일이 정말 많다. 9월말까지는 아예 작정하고 달려보기로 했다. 거의 매일 대중교통이 끊긴 후에 택시타고 집에 돌아간다. 체력관리를 위한 운동을 할 수도 없다. 최근 하고 있는 일은 그 종류도 그다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페이스가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점심시간의 평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간 동안 하루치의 에너지가 매일 충전된다. 생각해보니 전에도 그랬다. 회사 앞에 비건식당이 있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면 거기서 점심을 먹곤 했다. 조용히 혼자 야채를 씹다 오면 차분해지곤 했다(버섯의 소중함도 알게 된다).


지금 그 카페다. 그간 책만 읽다 오늘은 잡글을 한번 써볼까 하고 랩탑을 가지고왔다. 역시, 평화롭다. 시간이 다 됐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처맞으러 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