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기는 망할 것이다. 인간은 답이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나 역시 그간 인간에 크게 기대하는 바는 없었으나 올해 미국 대선을 보면서 확신하게 됐다. 아 시간문제구나.
트럼프와 해리스의 저 ‘배틀’을 보라. “님 긁?” “님 늙?” 채팅 도발하는 피씨방 초딩이나 유튜브 댓글로 싸우는 시간빌게이츠들 수준과 다를 게 없다. 저딴 게 이 행성 1짱 국가의 대표자 선발과정? 자 슬슬 우리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자.
희소식이 있다. 그래도 초록색으로 망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기왕지사 칙칙한 잿빛보다 초록으로 망하면 기분이라도 좀 낫지 않겠는가.
해마다 가을이면 빨갛고 노란 단풍을 구경 다녀온다. 한데 지난주의 남산은 아직도 한여름처럼 푸르렀다. 좀 이른가 싶어 찾아보니 다 그렇다고.
나무는 기온이 내려가면 잎에 영양공급을 멈추고 겨울날 준비를 하는데, 더운 날들이 9월까지 계속되니 나무도 엽록소를 계속 만들어버렸다. 끝까지 나뭇잎을 쥐고서 영양분을 나누어주다 이제 그 초록이 무거워 그냥 툭 놓아버리고 있다.
우리나라만 그럴 리는 없겠다. 기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전 세계의 단풍 물드는 시기가 20년 전보다 평균 2주 이상 늦어졌다. 이 변화의 속도는 가을 단풍에 관해 지금껏 인류가 정의하고 이해해온 모든 지식이 의미 없어진 수준이라 한다.
비슷한 일이 행성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중이다. 나사의 환경감시위성으로 추적한 바다 색깔 변화 결과가 작년 7월 네이처지에 실렸는데, 지난 20년간 전세계 바다의 56%가 더 녹색이 됐다고 한다. 더워지고 온실가스도 늘면서 식물성 플랑크톤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남극도 비슷한 상황이다. 온난화로 얼음이 녹으며 바다가 더 많은 태양빛을 흡수하고, 그로 인해 얼음 녹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얼음과 눈에 덮여있던 녹색땅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록이라니. 줄곧 새까맣거나 새하얗게, 혹은 시뻘겋게 망할 거라 생각해왔지 초록빛 종말을 상상해보진 못했는데. 하긴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종말 색이긴 하다. 자연에서 초록색은 무언가의 생산 결과다. 기본색은 원래 단풍처럼 바스러지게 붉거나 무채색이다. 초록빛 종말은 달리 말하면 과잉생산의 종말이다. 그러니 인간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응당의 종점이겠다.
초록색 종말은 그래도 호상이다. 장점이 많다. 우선 행성 회복력이 빠른 종말이다. 태양빛을 양껏 먹고 과잉생산된 식물들은 인간(a.k.a 좆간)이 남긴 쓰레기들을 어떻게든 해결해줄 것이다. 우리회사에 맨날 똥싸지르던 인간이 퇴사했을 때 봐서 안다. 인간 없어서 새로운 쓰레기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지구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이 빠르게 치울 거다. 다음 지배종은 지구로 이사 올 때 입주청소를 따로 부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초록은 또 생명의 상징이다. 대기가 있고 액체 상태의 물이 있다는 증거다. 이건 유니버셜하지 싶다. 지구가 정리를 좀 하고서 다시 손님맞이할 준비가 됐을 때 초록빛은 우주에서 눈에 띌 것이다. 즉 영업 마케팅에 크게 도움이 된다. 빙하기가 와서 새하얗게 얼어붙어있거나, 화산이 쾅쾅 터져 울긋불긋 잿빛이면 누가 들어오고 싶겠는가. 공실률 감소에 초록만한 게 없다.
다 떠나서 기왕이면 그래도 좀 예쁜 색으로 망하면 기분이라도 좋지 않나. 초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