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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Apr 03. 2016

17. 소아레스 씨,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늘 불안해 보이지만 은근 끌리는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씨에게..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정말 얼마나 많이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편지지를 채웠다 버리기만 수 백번 반복했지만, 결국은 쓸 수밖에 없다는 제 마음을 깨달았네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당신을 만난 건 정말 운명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이 리스본으로 돌아온 1905년에 저 또한 처음 리스본에 자리를 잡았으니까요. 돌아보면 볼수록 당신과 나의 인연의 끈은 신비로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리스본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아마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11월 중순쯤이었을 겁니다. 당신은 짙은 잿빛의 쓰리피스 양복에 보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동그란 안경과 페도라가 인상적이었어요. 한 잔의 레드와인을 시키고는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바를 천천히 둘러보고 계셨는데, 무심한 듯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 선 그 빛나던 눈빛을 저는 아직 기억합니다. 어쩌면 그 눈빛에 제 마음이 끌렸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주문한 와인이 나오자 그 자리에 선 채로 글라스를 한 바퀴 휘 돌리고 향을 맡은 다음 홀짝홀짝 몇 모금 들이켰습니다. 손놀림이 참으로 우아하셨지요. 그리고는 노상에 늘어선 테이블로 가서 앉더니 호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열심히 적기도 하고, 신문을 펼쳐놓고 정독하기도 하면서 한참을 계셨습니다. 그 후로 자주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참으로 좋았습니다. 당신은 눈치채지 못하셨겠지만, 저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답니다. 어쩐지 계속 끌리는 관심을 어쩔 수 없었거든요.


어쩌면 당신은 첫 눈에 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 잘생기지 않은 얼굴에 왜소해 보이는 체구만으로는 솔직히 매력적이라고 얘기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사소한 동작들 끝에 묻어나오는 우아함에서 설명하기 힘든 매력을 느꼈습니다. 저의 솔직함이 무례하다 여겨지신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단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처럼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이니까요.

  

어떤 날은 지인들과 모임을 갖기도 하셨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분들과 미술과 문학에 대해 논하실 때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빛이 났습니다. 감정을 그대로 내비치는 것에 늘 조심하셔서 말씀은 많이 없으셨지만, 눈빛에 만큼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있음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지요. 당신은 늘 당신의 진짜 모습을 감춰두고 계셨지만, 그 눈빛만큼은 저를 속일 수 없었나 봅니다.


가끔은 끄적거린 종이 쪼가리들을 흘리고 가시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과연 어떤 맥락인지는 감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제 마음을 끄는 어떤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I've never done anything but dream. This, and this alone, has been the meaning of my life. My only real concern has been my inner life.
나는 꿈꾸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 오직 이것만이
내 삶의 의미일 뿐. 내 유일한 진짜 관심은 내 이면의 삶뿐이다.


당신이 흘리고 간 냅킨 위에서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저는 당신이 상당히 외로운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평범한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한 남자로 위장을 하고 있었지만, 당신 안에 한없이 침잠해 있던 당신의 진짜 모습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을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연민은 허락하지 않으셨겠죠. 당신은 분명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하셨을 겁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가 말했지요. 외로움(loneliness)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고, 고독(solitude)은 혼자 있는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아마도 그런 고독이 당신 안에서 당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원동력이 되었겠지요. 아!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Literature is the most agreeable way of ignoring life.
문학은 삶을 무시하는 데 있어 가장 받아들여지기 쉬운 방법이다.


당신의 삶은, 당신의 글로 위로를 받았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늘 끊임없이 뭔가를 쓰고 계셨던 당신의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였습니다. 당신이 세상의 다른 것들에는 관심을 돌릴 여지가 없었을 까닭이었겠지요.

가끔은 철없는 마음에 글 쓰는 것 이외에도 제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며 혼자 속상해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당신을 보면 그저 좋았습니다. 무언가에 열정을 쏟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몰래 흐뭇했습니다. 몰두하고 있는 그 무언가가 비록 제가 아니라도, 당신을 그렇게나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졌으니까요.


I’ve dreamed a lot. I’m tired now from dreaming but not tired of dreaming. No one tires of dreaming, because to dream is to forget, and forgetting does not weigh on us, it is a dreamless sleep throughout which we remain awake.
In dreams I have achieved everything.
나는 많은 꿈을 꾼다. 난 지금 꿈꾸느라 피곤하지만 꿈을 꾸는 것이 지겹지 않다.
꿈꾸는 걸 지겨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꿈꾸는 것은 잊는 것이고, 잊는 것은 우리를 짓누르지 않으며, 우리가 깨어있는 내내 취하는 편안한 잠이기에.
꿈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이룬다.


그대의 일상은 무역회사의 평범한 해외통신원이었지만, 그대의 머릿속은 늘 꿈을 꾸고 있었나 봅니다. 저는 당신의 그런 모습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비치는 당신의 모습은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 당신을 지켜봐왔지만, 당신의 주위에서 여자나 아이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거든요.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보편타당한 꿈이기에, 언젠가부터는 당신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현실과의 타협에서 얻어지는 보편적인 행복보다는 늘 깨어있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고, 상상 이상으로 영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이 꾸는 꿈이 어쩌면 당신 주위의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I am nothing. I'll never be anything. I couldn't want to be something. Apart from that, I have in me all the dreams in the world.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어떤 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언가가 되길 원할 수 없다. 그 이외에, 나는 내 안에 세상 모든 꿈을 지니고 있다.


그래요. 겉으로 보이는 당신의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40대 중반에 들어선 당신의 모습은 어느 순간 희끗희끗 바라고 낡아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늘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어느 날부터 당신의 발걸음이 뜸해지더니, 당신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 살던 당신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당신이 많이 아프다는 소문을 들었고, 얼마 있지 않아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지요. 그때가 1935년이었으니, 당신은 고작 47세였습니다. 세상에 남겨진 건 읽는 사람 없는 시집 한 권뿐..




그리고 세상을 떠난 무수한 무명씨들처럼 당신도 그렇게 잊혀갔습니다.

그 자물쇠 잠긴 트렁크가 당신 방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말이죠. 당신의 아파트 방을 치우려던 청소부들이 당신의 트렁크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잠들어 있던 무려 26,000장이 넘는 시와, 사색의 흔적, 글 무더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잊혀가던 당신의 이름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곳에는 내로라하던 당대의 지식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당신이 남겨놓은 글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저는 깜짝깜짝 놀라며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놀랍게도 그 대부분은 감탄과 경이로움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이름을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낙서 중에 그 이름이 적혀있었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알베르투 카에이루, 혹은 알바루 데 캄포스였으며, 리카르두, 혹은 그 형제인 페데리코 레이스이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당신의 이름과 함께 80명에 가까운 다른 이름들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은 페르난두 페소아였다는 사실을..


당신 안에 75명의 또 다른 당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당신이 창조한 그 존재들은 각기 다른 성격과 취향은 물론, 각기 다른 삶의 과정과 그것을 통해 형성된 다양한 세계관을 갖고 있네요. 마치 그들 모두 리스본 어딘가에 실제로 살고 있을 것처럼, 당신이 쌓은 놀라울 정도로 견고하고 디테일한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팔딱팔딱 살아있습니다.

그 75명의 각기 다른 목소리를 통해 당신은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것만이 당신이 부여받은 소명이라는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이 노랫말이 어쩌면 당신의 마음을 표현해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 안에서 창조된 75명의 존재들이 좀 더 일찍 세상을 만났더라면,

당신이 살아생전에 그들이 거리낌 없이 혼탁한 세상에 촌철살인 같은 말들을 툭툭 던져주었다면,

어쩌면 당신의 삶도, 그리고 이 세상도 좀 더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습니다.

당신의 뛰어난 마인드를 이해해줄 수 있을 만큼 동등한 수준의 지적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세상에 흔치 않아서겠지요? 그래서 지나치게 뛰어난 많은 예술가들과 지성인들이 당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쓸쓸히 하늘의 별이 된 거겠지요? 하지만 그것 또한 당신의 운명.. 아! 당신은 너무나 고결한 존재였습니다.



Follow Your Destiny  

너의 운명을 따르라 


Follow your destiny,  

Water your plants,  
Love your roses.   

너의 운명을 따르고,

너의 화분들에 물을 주고,

너의 장미들을 사랑하라.
The rest is shadow  
Of unknown trees. 

휴식은 이름 모를

나무들의 그림자.

Reality is always  
More or less     
Than what we want.

현실은 늘

우리가 바라는 것의      

이상이거나 이하.                                        
Only we are always                      
Equal to ourselves.

다만 우리는 늘

우리 자신과 동등할 뿐.                     

It’s good to live alone,                

And noble and great                     
Always to live simply.

혼자 살아가는 것은 좋다,

고귀하고 훌륭하게                

늘 단순하게 산다면.
Leave pain on the altar                
As an offering to the gods.

고통은 신에게 바친 공물처럼

제단 위에 남겨두라.        

See life from a distance.              
Never question it.

거리를 두고 인생을 관조하라.

절대 그것에 의문을 두지 말라.                     
There’s nothing it can                   
Tell you. The answer                    
Lies beyond the Gods.

그것이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답은

신의 영역 너머에 있다. 

But quietly imitate                         
Olympus in your heart.

하지만 조용히 흉내 내라

천상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The gods are gods                          
Because they don’t think             
About what they are.                     

신들은 신들일뿐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해.


- Fernando Pessoa                            




이제는 당신을 페르난두 페소아 씨라고 불러야 하겠지요..

저는 당신이 늘 찾아주던 그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당신을 그리워하겠습니다.

당신도 저를 가끔은 그리워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영원히 흠모하는 브라질레이라 드림..





페르난두 페소아 씨, 늦어서 미안합니다.. (Lisbon, Portugal - Nov. 2015)


[에필로그]

1.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포르투갈의 시인, 작가, 문학비평가, 번역가, 발행인이자 철학가로 20세기 가장 두드러지는 유럽 문학의 지성으로 손꼽힌다. 포르투갈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작가이지만, 사망 이후에야 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명 이외에도 무려 75개에 달하는 이명으로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페소아는 그 이름들이 단순한 필명(psuedonym)이길 거부하여 이명(heteronym)이라는 새로운 문학용어를 탄생시켰는데, 그들에게 각자의 인격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체격과 일생, 글 쓰는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대표작으로 '불안의 책'이 있고, 아쉽게도 아직 우리나라에 출판된 번역본은 '불안의 책'외 산문 모음집을 제외하고는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다. <Wikipedia 참조>


2. 아 브라질레이라 (A Brasileira)

R. Garrett 120, 1200 Lisboa, Portugal

리스본 시아두 지구에 위치한 카페로, 그 앞 노상에 그의 동상이 놓여있다. 페르난도 페소아가 생전에 즐겨 찾던 곳으로 당대 그가 속해있던 예술가와 시인들의 모임인 오르페우(Orpheu) 그룹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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